1871년 10월 8일, 시카고 대화재 (Great Chicago Fire) : 미국 시카고에서 대화재 발생해 건물 1만7천여 동 불타고 300여 명 사망
시카고 대화재 (Great Chicago Fire)는 1871년 10월 8일 토요일부터 10월 10일 화요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이다. 이 화재로 300명 가까이 사망하고, 시카고의 9 km2에 달하는 지역이 불에 타고 10만명 이상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다.
이 화재는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시카고 도심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화재 이후 재건을 통해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큰 경제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이 화재가 일어난 날과 동시에 위스콘신주의 페스티고에서도 대화재가 일어나 그린베이 북부를 태웠다.

- 발단
이 화재는 10월 8일 오후 9시 즈음 데코벵가 137번지 뒷편 골목에 위치한 올리어리 가족이 가진 헛간에 불이 붙으며 시작되었다.
헛간에 불이 붙으며 그 옆의 창고가 불이 타기 시작하며 화재가 번졌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시 관계자는 화재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수년 동안 이 대화재의 원인에 대해서 많은 추측이 오갔다.
가장 유명한 가설로는 올리어리의 소가 랜턴을 발로 차서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설로는 남자들이 헛간 안에서 도박을 하던 도중 실수로 랜턴을 떨어뜨려 불이 일어났다는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이 날 동시에 일어났던 중서부의 화재와도 관련이 있다는 가설도 존재하는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화재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로는 당시 시카고의 건물 대부분이 경골 구조 (balloon frame)로 지어진 목재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에 심하게 건조했고 도시 중심을 향한 강한 남동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에 세워진 건물의 3분의 2 이상이 목재 건물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주택과 건물은 옥상이 가연성 타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보도와 도로도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더하여, 시카고는 7월 4일부터 10월 9일까지 비가 고작 1인치 (2.54cm) 이하로 내리는 등 매우 건조한 상태였다.
1871년, 시카고 소방국은 말이 끄는 증기엔진 소방차 17대와 소방대원 185명만으로 도시 전체 소방을 맡아야 했다.
소방서의 초기 반응은 빨랐지만, 경비원인 마타이스 샤퍼의 실수로 소방관이 잘못된 장소로 달려갔고 그 동안 불이 번졌다.
또한, 불이 일어난 지역 근처에서 보내진 경보는 소방서에서 받지 못했다. 거기에 소방관들은 대화재가 일어나기 전 지난 한주에만 1개 대형 화재 및 소형 화재 수백건을 처리했다.
이러한 요소가 한데 모여 거대한 대화재가 되었다.

- 결과
시카고 대화재는 3일 동안 계속되면서 시카고 지역 3.3스퀘어마일을 초토화시켰다.
시카고 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건물 1만7천여 동이 불타고 300여 명이 사망했다.
소위 ‘불타버린 지역’은 길이 6.4㎞에 너비 1.2㎞에 이르렀으며, 8㎢ 넓이에 34개의 블록, 45㎞ 길이의 도로, 190㎞ 길이의 보도, 2천 개의 가로등을 포함했다.
- 재건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뒤, 즉시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 시카고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5년 후에는 도시 어느 곳에서도 화재로 인한 피해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건물들이 깨끗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화재를 계기로 시카고에는 목조 건축 대신 강철과 석조를 이용한 건축들이 대세를 이루었고, 19세기 말~20세기에 빠르게 발전하는 건축 기술이 반영되어 시카고에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마천루의 밀집도가 대단해져서 이후 시카고는 미국 마천루 건축의 박물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 영향
시카고 대화재는 시카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미국사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860년대 동서 대륙 횡단 철도의 건설은 전례 없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으며 1870년대에 들어서는 너도 나도 새롭게 발전하는 산업이었던 철도 건설과 운송 사업에 투자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철도 산업의 수익성이 너무 낮아 정부가 눈물을 머금고 기업들에게 각종 혜택을 배풀어야했으나, 동서횡단철도가 건설되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운송 비용이 낮아진데다 추가적인 철도 건설까지 보장되자 모두가 한탕을 노리고 철도 건설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도 건설 산업 붐은 어디까지나 그 특성상 더욱 많은 자본이 유치되어야 유지될 수 있음을 뜻했고 자연스럽게 불안정한 산업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붐이 꺼진 하나의 이유가 시카고 대화재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미국 중서부 제1의 대도시인 시카고의 중심지가 사실상 전소하면서 전례 없는 대도시 전면 재건축 사업판이 시카고에 펼쳐졌고 이는 수많은 미국 토건 사업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특히 대륙횡단철도 건설 이후 미국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른 시카고였기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파산할 위험도 컸던 철도 산업 투자에 비해 시카고 대화재로 인한 재건축 사업은 시카고 시민들이 갑자기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가지 않는 한 성공할 확률이 훨씬 컸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토건 사업가들은 철도 건설 및 운송 사업에 투자하는 대신 시카고 재건축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871년 보불전쟁과 그 이전의 보오전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타협,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던 파리 코뮌 등등으로 인한 유럽의 정치, 외교적인 불안이 확산되면서 유럽의 증시가 폭락했고, 다급해진 유럽 자본가들이 미국 철도 사업에 투자했던 자본을 회수해가면서 순식간에 철도 사업은 빌린 돈의 이자조차 갚을 수 없을정도로 투자자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갔으며 줄줄이 도산하였다.
철도 사업의 도산으로 인해 남북전쟁 당시 채권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던 “채권왕” 제이 쿡을 비롯한 상당한 수의 거부들과 유니온 퍼시픽 철도, 노던 퍼시픽 철도 등 거대한 철도 회사들이 파산을 선언했고, 이들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사람들은 불안에 휩쌓여 은행에 맡겨둔 돈을 급하게 찾으려고 은행으로 밀려들었다. 뉴욕 금융거래소는 뱅크런을 막기 위해 10일간 폐장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전 미국의 증시가 폭락하고 공황이 찾아온 것이다. 이를 1873년 미국 장기불황 (Long Depression)이라고 부른다.
1870년대 장기불황은 미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장기불황은 기존 미국의 사업을 떠받치던 철도 사업과 농업, 전통적 공업의 종말을 의미하였으며 장기불황을 통해 미국 산업은 대대적으로 구조조정되었다. 특히 밴더빌트와 J.P. 모건 등의 사업가들이 이 혼란의 시기를 틈타 작은 기업들을 합병해 사업을 크게 불리는 방식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1873년 불황기에서 시작되어 1893년까지 유지된 이러한 시대를 도금시대라고 부른다.
한편 서부의 농민들은 장기공황으로 삶이 크게 어려워졌으며, 이들을 타겟팅한 “인민주의 (포퓰리즘)” 운동과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등장했는데 이는 민주당 진보화의 서막이었다.
- 기타
메이저 리그 사커에 소속되어 있는 축구 클럽인 시카고 파이어의 이름은 이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1937년, 이 사건을 주제로 타이론 파워가 주연한 인 올드 시카고라는 영화가 있다. 개봉 당시 미국 국내에서 관객 1000만이라는 경이로운 흥행을 가져왔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