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년 11월 15일, 에지카 / 에기카 (Egica, ? ~ 702)가 서고트족의 제16대 왕에 즉위
에지카 / 에기카 (Egica, ? ~ 702)는 서고트족의 제16대 왕 (재위: 687년 11월 15일 ~ 702년)이다.
그는 왐바 왕의 친척으로, 왐바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에르위그의 딸 시실로와 결혼한 뒤 왕위 계승권자로 지명되었다.
687년 11월 15일 임종을 눈앞에 둔 에르위그는 그를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삼고, 자신의 가족을 보호해 줄 것과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고 권력을 함부로 쓰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게 한 뒤 숨을 거두었다. 에기카는 687년 11월 24일 톨레도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688년 5월 11일 제1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에기카는 에르위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에르위그가 몰수한 재산이 왕과 가족에게 들어간 것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에르위그의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의무를 풀어주기로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아무도 황태후에게 결혼을 강요하거나 간음을 범할 수 없다는 특별법을 마련했다. 겉보기에는 왕비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 왕의 미망인과의 교제를 통해 왕위에 오르려는 경쟁자들의 희망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691년, 사라고사에서 지방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왕의 미망인은 수도원에 즉시 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로 인해 에르위그의 왕비 리우비고토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잃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한편, 사라고사 공의회에서는 특정 지역 주교의 결정에 따라 해방된 이들을 다시 노예로 삼는다는 법안을 채택했다. 이는 주교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막아서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에르위그의 지지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이 커졌다.
693년 봄, 톨레도에서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일어났다. 툴레도의 대주교 시시베르트는 수니프레드를 왕으로 내세우고 에기카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에기카는 시시베르트를 해임하고 세비야의 주교 펠릭스를 톨레도 대주교에 선임했으며, 시시베르트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교체하고 새 주교를 세웠다. 그는 교회에 대한 이같은 간섭이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693년 5월 제16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게 했다. 공의회는 왕에 대한 음모를 꾸미거나 스페인 내에서 반란을 일읔킨 사람은 존엄과 지위에 관계없이 재산을 박탈당하고 그 자신과 모든 후손이 결코 궁정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결의서를 반포했다. 여기에 귀족과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햇던 친다수윈트와 왐바의 반역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유효하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주교들의 잠식으로부터 지방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을 채택함으로써 하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694년 11월, 에르위그는 제17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는 왕실의 자손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시실로 왕비가 자손을 낳은 채 미망인이 될 경우, 아무도 그녀의 자녀가 수도자가 되도록 강요할 수 없으며, 그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일련의 법률을 반포했다. 유대인이 시장을 방문하고 기독교인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세례받기를 원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 세금은 유대인 공동체가 분담해야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유대인들이 아랍 세력과 내통해 왕국을 팔아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며, 내통한 것이 드러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고, 유대인들이 공직에 참가할 권리 자체를 박탈했으며, 유대인들의 자녀들은 7세 때까지 부모와 헤어진 채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게 했다. 한편, 제17차 공의회는 에기카의 왕비이자 에르위그의 딸 시실로를 “영광스러운 여인”이라 칭했다. 그러나 에기카는 공의회가 끝난 직후 그녀와 이혼해버렸다. 이는 전 왕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림으로써 자신만의 왕조를 창건하겠다는 의중이 담긴 결정이었다.
698년과 701년 사이, 동로마 함대가 스페인 동부 해안가에 상륙했다가 알리산테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서고트 귀족에 의해 격퇴되었다. 비슷한 시기, 에기카는 셉티마니아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을 진압하고 프랑크군과 3차례 싸웠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 반란을 구실로 삼아 벌금, 몰수 및 해임 법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금화에 은이 갈수록 많이 첨가되었으며, 몇년 동안 기근이 들어서 많은 이가 굶어죽거나 나라를 등지면서 일꾼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693~694년 페스트가 침투하여 각지에 전염병이 횡행하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특히 셉티마니아의 인구 감소가 심했기에, 셉티마니아 공작은 어떻게든 인력을 모으기 위해 에기카의 반유대주의 법안을 시행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이렇듯 인력이 줄어들면서 노예의 도피를 막으려는 귀족들의 욕망이 커지자, 에기카는 귀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도주한 노예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에기카는 친다수윈트 왕의 아들 테오도프레드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하여 눈을 멀게 했다. 그 후 왕실에서 추방된 테오도프레드는 코르도바에서 살다가 리킬로와 결혼하여 아들 로데리크를 낳았다. 에기카는 세습을 이뤄내기 위해 아들 위티자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옛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다스리게 했다. 701년 11월 15일 아들을 톨레도로 불러들여 왕으로 즉위하게 한 뒤, 702년 말에 자연사했다. 그리하여 위티자가 왕위에 올랐지만, 710년 또는 711년 모종의 사유로 죽고 로데리크가 왕위에 올랐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