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호주의 화가 시드니 놀란 (Sidney Nolan, 1917~1992)의 ‘네드 켈리 연작’ (Ned Kelly series)
호주의 위대한 화가 시드니 놀란 (Sidney Nolan, 1917년 4월 22일 ~ 1992년 11월 28일)은 1917년 멜번에서 태어나 1992년 75세의 나이로 영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원시시대의 벽화를 연상시키는 소박하고 생명력 넘치는 그림과 판화를 제작하여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 시드니 놀란 (Sidney Nolan)
.출생: 1917년 4월 22일, 호주 빅토리아주 칼턴
.사망: 1992년 11월 28일, 영국 런던
.부모: 시드니 놀란, 도라 놀란
.배우자: 메리 놀란 (1978 ~ 1992), 신시아 놀란 (1948 ~ )
.자녀: 징크스 놀란, 아멜다 랭스로
.대표작: Ned Kelly series, The Trial, Inland Australia 등
놀란은 호주의 황량한 사막, 버려진 광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식물 등을 간결하고 재치있게 그려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현대문명은 자연과 공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작품들이다.

○ 네드 켈리 연작 (Ned Kelly series)
시드니 놀란 경 (1917 ~ 1992)은 호주의 위대한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중 네드 켈리 (1854 ~ 1880)는 중요한 주제이다.
네드 켈리는 놀란이 전 생에 걸쳐 반복한 주제였다.
놀란은 켈리 그림을 통해 자기 개인 측면의 다양한 문제들 뿐만 아니라, 호주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한 생각들을 탐험할 수 있었다.
놀란이 초기에 보여준 반 (半) 추상 작품들은 조국에서 다양한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의 예술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기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호주의 거친 풍경과 풍부한 민속 문화를 한결 구상적인 양식을 이용하여 화폭에 옮겼다.

많은 호주인들이 켈리를 권력 앞에 결연한 입장을 굽히지 않은 전설적 영웅으로 생각했다 할지라도, 켈리는 소도둑이자 은행 강도였다.
놀란이 이 무법자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켈리 일당을 쫓는 경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46년 놀란은 빅토리아주 북동쪽에 위치한 ‘켈리 나라’의 황량한 풍경을 보러갔고, 그 후 나이브 (naive)한 양식을 이용해 무법자를 소재로 한 첫 번째 연작을 그렸다.
1955년부터 작업한 두 번째 연작은 훨씬 우수했다.
많은 그림들에서 보듯, 켈리는 집에서 손수 만든 갑옷으로 무장했으며, 그의 일당은 훔친 쟁기를 무기로 이용했다.
놀란은 이러한 장비들의 사각형 모양을 이용해 단순한 산적들을 ‘강한 숭배의 인물’로 바꿀 수 있었다.
사각형 모양은 다양한 구성을 위한 다용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갑옷은 결국 켈리를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는데, 왜냐하면 경찰들은 단순히 그의 다리를 향해 수 차례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이다.

○ 네드 켈리 (Ned Kelly)에 대하여
네드 켈리 (Ned Kelly, 1854년 ~ 1880년 11월 11일)는 19세기 후반 호주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은행 강도이다.
안타까운 사연과 그만의 독특한 신조로 인해 호주에서는 한국의 홍길동, 임꺽정 만큼이나 유명하다.
불우한 가정사와 가난한 자는 털지 않는 규칙으로 인해 의적으로 여겨졌고, 그 지역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강도질 중에도 인질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보상까지 한 덕분에 사형 선고를 받을 당시 이에 반대하는 서명운동까지 있었다고 한다.
《네드 켈리》 (Ned Kelly)는 프랑스에서 그레고 조던 감독에 의해 2003년 영화화 되기도 했다.
영화 ‘네드 켈리’는 Robert Drewe의 1991년 소설 “Our Sunshine”에 기반을 두고 있다.
히스 레저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린다 하우스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 생애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다
네드 켈리 (Ned Kelly, 1854년 ~ 1880년 11월 11일)는 1854년,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 아버지 존 켈리와 어머니 앨런 켈리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켈리 가족은 빅토리아 주 베버리지에서 소작농 일을 하며 근근히 먹고 살았는데, 그 지역 지주들의 갖은 괴롭힘 때문에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궁핍했다.
지주들은 황무지 개척이라는 구실로 주인없는 빈땅을 무단으로 선점했고, 주변 농민들에게 무거운 소작료를 부과하곤 했다.
네드 켈리는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비교적 올곧게 자랐다.
하루는 물에 빠져 죽어갈 위기에 놓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어, 친구의 부모에게서 금색 술이 달린 초록색 목도리를 선물받았다.
그의 가족도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존 켈리가 죽으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뒤바뀐다.
악덕한 지주들이 켈리 가족의 땅을 빼앗기 위해 허위 신고를 하였고 아버지는 절도죄의 누명을 써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고 만 것이다.
그의 가족은 가세가 크게 기울어 집값이 더 싼 그레타의 오두막으로 이사하게 된다.
방황하던 그는 아버지의 친구 해리 파워를 만나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둘은 부자들의 말과 소를 털며 한동안 그 일대에서 유명한 무법자로 활동한다.
하지만 켈리의 삼촌이 해리를 밀고하면서 해리는 경찰에 체포당했고, 사람들은 켈리를 배신자라고 생각하여 온갖 비난을 하였다.
그는 범죄에서 손을 털기로 마음먹고 이를 감내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다
어느 날 켈리는 부모의 친구로부터 밤색 말을 선물받는다.
그는 말이 마음에 쏙들어 애지중지 보살폈고 말을 몰아 시내로 나간다.
그러나 그는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알고보니 그 말은 훔친 말이었고 켈리는 절도죄와 경찰 폭행죄 명목으로 3년간 수감된다.
켈리는 석방되고 나서도 올바른 삶을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전과자를 고용하는 곳은 아무도 없었고, 간신히 들어간 직장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시비와 무시로 얼마 못 버티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이를 버텨내었고, 마침내 세 번째 해가 지나자 그는 마침내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14살 동생은 젖소를 훔치다 감옥에 갇히고, 경찰이 항상 따라붙어 그의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주변에 절도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경찰들은 항상 켈리 가족의 집부터 수색했으며, 별 것도 아닌 일로 경찰서에 소환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편, 지주들은 여전히 켈리 가족을 경제적으로 압박했고, 땅을 빼앗으려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켈리에게도 누명을 씌우기 시작한다.
소를 일부러 풀어놓고 켈리를 소도둑으로 신고하던 것이 수 차례로, 켈리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과거로부터 도망치려 무진히도 노력했지만, 결국 세상 모두가 자신을 달갑지 않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쳤고, 다락방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잠들어있던 아버지의 낡은 권총을 꺼내든다.

.그레타 도적단을 창설하다
네드 켈리는 댄 켈리, 존 번, 스티브 하트를 동료로 삼아 그레타 도적단 (Greta Mob)을 결성한다.
그들은 부자들의 우마를 탈취한 뒤, 멀리 떨어진 다른 농장에 데려갔다.
그리고 다른 부자들에게 되팔아 이윤을 남겼다.
아직 통신 장비가 미비하던 시절이라 정보의 전달이 느렸기 때문에 상인들은 절도된 가축인지도 모르고 선뜻 매각 증서를 써주었다.
모든 증서가 협박이나 공갈 없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레타 도적단을 어찌할 수 없었다.
피해가 막심해지자, 정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레타 도적단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고 그해 토벌대가 조직된다.
4명의 무장 경찰로 이뤄진 첫 번째 추격대는 매우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역추적당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 떠들며 호기롭게 전진해 나아갔다.
추적대가 스트링이바크에서 야영하는걸 확인한 도적단은 추적대 중 두 명이 외출한 틈을 타 기습을 가한다.
조잡한 사냥총과 콜트 리볼버 1정이 전부였지만 어둠과 고지대를 이용해 교전에서 승리한다.
항복한 매킨타이어 순사를 제외하고, 저항한 세 명은 바로 사살된다.
그리고 도적단은 이날 이후로 “그레타 갱단”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게 된다.

.Kelly’s country
추적대를 성공적으로 따돌린 그레타 도적단은 본격적으로 주변의 은행가를 접수하기 시작한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들을 “Outlaw” 상태로 선포한다.
1879년 그는 경찰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갑옷을 만들기 위한 돈을 구하려 유로아 (Euroa)와 뉴사우스웨일스의 제릴더리 (Jerilderie)에 있는 두개의 은행을 턴다.
1879년 2월 네드 켈리에게 걸린 현상금은 8000파운드로 올라갔지만 켈리 갱단은 잡히지 않았다.
이때쯤 그는 출판사에 긴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는 제릴더리 편지 (Jerilderie Letter)라고도 불렸으며 켈리 갱단의 활동에 대한 네드 자신의 생각, 그의 가족이 받는 대우 그리고 아일랜드 카톨릭들이 영국 경찰과 아일랜드 개신교 경찰들에게 받는 대우를 설명한다.

.마지막 전투, 그리고 최후
경찰이 그의 행적을 찾아낸 것은 1880년 6월이다.
켈리 갱단은 존스 가족이 운영하는 글렌로완 여관에 도착하여 70명의 인질을 잡게 된다.
갱단은 훔쳐낸 철로 그레타 늪지 (Greta Swamps)의 은신처에서 직접 만들어낸 갑옷들을 입었는데 각자의 갑옷들은 80파운드 (36 킬로그램)나 나갔다.
글렌로완 여관에 본거지를 만든 네드의 갱단은 특수경찰들이 탄 기차를 탈선시키려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인질로 잡힌 학교장 토마스 커노우 (Thomas Curnow)가 풀려나자 바로 선로로 달려가 해가 뜰 때까지 열차에 치여 죽을 각오로 촛불과 붉은색 스카프를 휘둘러 열차를 멈췄기 때문다.
6월 28일 새벽, 네드 갱단은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는데 네드 켈리는 이 전투에서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다리에 28개의 총알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다른 켈리 갱단 모두 호텔에서 죽었는데 조 번은 대퇴부의 동맥을 관통한 총알로 인한 과다출혈으로 죽었고, 댄 켈리와 스티브 하트는 여관이 불타 무너진 후 잔해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네드 켈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재판에 보내져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1880년 11월 11일 아침 멜번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참고로 교수형 직전 남긴 유언이 유명한데, 유언은 아래와 같다.
“such is life.” (이게 삶이지)
유해는 의과대학생들이 해부되었다가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2011년에 공식적으로 DNA을 통해 유해를 찾았으며, 2013년이 돼서야 장례식이 치러졌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