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5월 3일, 이스라엘의 제4대 총리 골다 메이어 (Golda Meir, 1898 ~ 1978) 출생
골다 메이어 (Golda Meir, 1898년 5월 3일 ~ 1978년 12월 8일)는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하나였다.

– 골다 메이어 (Golda Meir)
.출생: 1898년 5월 3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 (현 우크라이나 키이우)
.사망: 1978년 12월 8일 (향년 80세), 이스라엘 예루살렘
.국적: 러시아 제국 → 미국 → 이스라엘
.직업: 정치인
.학력: 4번가 학교, 노스디비전 고등학교, 위스콘신주립사범대학
.정당: 마파이당 → 이스라엘 노동당
.배우자: 모리스 메이어슨
.자녀: 2명
.종교: 무종교 (무신론)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의 노동부 장관,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69년 3월 17일부터 1974년 4월 11일까지 네 번째 총리를 역임하였다.
메이어는 마거릿 대처 등이 이 별명을 이어받기 전까지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었다.
메이어는 이스라엘의 첫 (그리고 유일한) 여성 총리이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국가의 총리로 내정된 여성이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
메이어는 골다 마보비츠 (러: Голда Мабовиц)라는 이름으로 1898년 5월 3일 러시아 제국(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그녀의 아버지가 포그롬이 다가온다는 소문을 들어서 집의 문에 널을 대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친형제가 7명 있었으나 어릴 때 5명이 숨졌다고 한다.
1906년 그녀의 가족은 미국의 밀워키로 이민 가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로 일하였고,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였다.
그녀가 8세이던 1906년 가족을 위해 가게를 맡아봐야 하였다고 한다.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특별한 재능이 있는 학생을 위한 Fourth Street School을 재학하였다.
입학 당시 영어를 구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현재 이 학교는 그녀의 이름을 따 골다 메이어 학교라고 불린다.
그녀가 14세이던 1912년 형편이 어려워져 그녀의 어머니가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하라고 권하자, 그녀는 반항하고 덴버로 가출하였다가 1913년 밀워키로 돌아왔다.

-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그녀의 남편인 모리스 마이어슨과 함께 1921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고 키부츠에 가입하였다.
그녀의 일은 아몬드를 따고 닭을 돌보고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남편은 키부츠에서의 생활에 싫증이 나서 1924년에 떠났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잠시 텔 아비브에 머물렀다. 점점 둘은 멀어졌으나 이혼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1951년 숨졌다.
1949년에서 1956년까지 노동 총리를 지냈고, 1956년 데이비드 벤구리온 아래에서 공사가 되었다.
벤구리온이 그녀의 이름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자 그녀의 성을 “메이어” (מאיר“빛을 만들다”를 의미)로 바꾸었다.
1960년대 초 그녀는 림프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1965년에 병이 심하게 악화될 때까지 비밀로 숨겼다.
총리 레비 에슈콜이 돌연사하자, 1969년에 연합당은 그녀가 그의 자리를 잇도록 선택하였다.

- 총리 재임
.뮌헨 참사
서독 뮌헨에서 개최된 1972년 하계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사살하자, “우리의 시민들을 구해달라”라고 어필하였다.
세계의 반응이 미지근하다고 느끼자, 현장에 파견된 모사드 요원들에게 조건없이 테러리스트를 죽이도록 허가하였다.
.욤키푸르 전쟁
전쟁이 시작한 날까지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인 모사드는 공격이 임박하였는지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공격이 시작하기 6시간 전에 그녀의 측근들은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으면서 시리아를 미리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권유하였다.
메이어는 유럽은 중동의 석유에 너무 크게 의지하여 무기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오직 미국만이 이스라엘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다.
선제공격을 할까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선제공격을 하면 이스라엘이 침략국으로 보일 것을 우려하여 결국에는 하지 않기로 하였다.

- 사직 및 사망
욤키푸르 전쟁 후, 이스라엘의 정부는 내부 불일치와 전쟁에 관한 판단에 대한 비난 때문에 혼란이 많았다.
결국, 골다 메이어는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74년 4월 11일에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
1978년 12월 8일에 예루살렘에서 지병인 림프종이 악화되어 별세하였고, 12월 12일에 그녀의 사망지인 예루살렘에 안장하였다.
- 주요 생애 및 경력
골다 메이어 (Golda Meir, 1898 ~ 1978)는 이스라엘의 제4대 총리로,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정부 수반이다.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 불리며, 강인한 리더십 덕분에 마거릿 대처 이전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출생 및 이민: 1898년 러시아 제국 (현재의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과 박해를 겪었다. 1906년 가족과 함께 미국 밀워키로 이민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시오니즘 운동에 투신했다.
이스라엘 건국: 1921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키부츠 생활을 시작했고,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25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정치 활동: 노동부 장관, 외무부 장관 등 요직을 거친 후 1969년 총리로 취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1969~1974)
욤키푸르 전쟁 (1973): 재임 중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다. 초기 대응 미숙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나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임: 전쟁 초기의 막대한 피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19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어록
마거릿 대처 이전 철의 여인이라고 함은 골다 메이어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강경한 말들을 많이 남겼으며 동시에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견해를 견지했다.
“오늘밤 태어날 수많은 아랍 아기들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
Don’t be humble, you are not that great.
“겸손해하지 마라. 당신은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아랍 국가들은 싸우고 질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싸우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직 한 번 질 수 있습니다.”
We have always said that in our war with the Arabs we had a secret weapon — no alternative. The Egyptians could run to Egypt, the Syrians into Syria. The only place we could run was into the sea, and before we did that we might as well fight.
“우리는 아랍과의 전쟁에서 비밀 무기가 있다고 항상 얘기했습니다. 바로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로, 시리아인들은 시리아로 도망갈 수 있지만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바다뿐이었고, 그러느니 차라리 싸우는 편이 낫죠.”
“우리가 모든 전쟁에서 이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가를 치렀습니다. 승리는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같은 경우를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팔레스타인인들이 독립 국가를 만든 적이 있습니까? 1차 대전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남시리아의 일부였고, 요르단의 일부였습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내쫓았다고 하지만 팔레스타인인과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것 자체는 없었습니다.”
It is so artificial, I know it from America. There is no need for this.
“너무 인위적이고 미국 냄새가 나서 여기와는 안 어울린다고 봅니다.” _ 컬러TV 도입을 반대하면서
“이스라엘의 약점은 아랍화되어 있고 무지하여 개조가 필요한 세파르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_ 헨리 키신저가 자신은 첫째로 미국인이고, 둘째로 국무장관이고, 셋째로 유대인이라고 말하자 그녀가 보여준 몇 안 되는 위트 있는 모습일 듯?
“그저 가정에 남아있을 수 없는 여자들이 존재한다. (…) 자녀와 가정이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자들의 본성과 존재는 그 이상의 것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여자들은 더욱 큰 사회적 삶과 이혼할 수 없다. 아이들이 그녀의 지평을 좁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여자들에게 휴식은 있을 수 없다.” _ 1930년의 발언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모두 브래지어를 태우고 남자를 증오하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임신이 불행이고 아이를 낳는 것이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정신 나간 여자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_ 1972년,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의 발언
○ 저서
이스라엘의 제4대 총리인 골다 메이어 (Golda Meir)가 직접 집필하거나 그녀의 생전 발언을 엮어 출판된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나의 생애 (My Life): 1975년에 출간된 골다 메이어의 가장 유명한 자서전이다. 러시아에서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미국 밀워키로의 이주, 시오니즘에 눈을 뜬 청소년기,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총리 재임 시절의 정치적 여정 (욤키푸르 전쟁 등)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현대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우리 자신의 땅 (A Land of Our Own): 1973년에 출간된 책으로, 골다 메이어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건국 이념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담고 있다. 구술 자서전 (Oral Autobiography)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깊이 있게 다룬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