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유스·청년 호주코스타 ‘다원화 사회에서의 주되심!’ 성료
12월 20-22일, Katoomba Christian Convention (KCC)에서
‘Lordship in a Pluralistic Society’ 주제로
강사진들의 열정, 스탭진들의 봉사와 헌신 빛나
호주 코스타 (상임대표 최효진 목사, 이사장 김태현 목사, 이하 KOSTA)에서는 지난 12월 20일 (수)부터 22일 (금)까지 “다원화 사회에서의 주되심! (Lordship in a Pluralistic Society)”이라는 주제로 2023 호주코스타를 Katoomba Christian Convention (KCC)에서 개최했다. 대상은 유스와 청년으로 예배, 찬양, 말씀, 주제강의, 세미나, 콘서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12월 20-22일, 호주코스타 “다원화 사회에서의 주되심!” 개최
2023년 호주코스타는 “다원화 사회에서의 주되심!” (Lordship in a Pluralistic Society)을 주제로 개최하며 강사진으로 김동원 목사 (호주연합교회 목사, 호주 연합교회 빅토리아주와 타스마니아주 총회 교육부 다문화 목회부서 담당자), 이대종 선교사 (미국 코스타 강사, Lighthouse Recovery Mission 대표), 유수미 선교사 (미국 코스타 강사, Lighthouse Recovery Mission 대표), 신은영 선교사 (찬양사역자), 김경훈 박사 (미국 코스타 강사, 신혼부부 코칭, 청소년 청년 진로코칭), 전태순 집사 (미국 코스타 강사, 신혼부부/예비 부부 결혼학교 강사, 청소년과 청년 진로코칭) 등 각계각층의 강사진이 함께하는 다양한 선택강의와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첫째 날인 20일(수) 개회예배 (설교 송선강 목사)에 이어 스페셜 무대를 통해 코스타의 첫 시간을 열었으며, 강사는 신은영 선교사가 맡았다. 신은영 찬양사역자는 살아줘서 고마워요, 항상 기뻐해 등 희망과 기쁨을 주제로 삶을 나누는 사역자이다. 이어 오리엔테이션과 강사소개 후 액티비티 시간 (1)을 가졌다. 저녁식사 후에는 은혜의 강물(1) 저녁집회 시간을 통해 김동원 목사의 말씀과 기도회가 이어졌으며 Snackowship으로 첫째 날을 마쳤다.
둘째 날인 21일(목) 연합찬양팀과 함께 경배와 찬양, 유수미 선교사의 오전 강의 후 조별모임과 선택강의 시간이 이어졌다 점심식사 후 선택강의 2, 3와 액티비티 2가 있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은혜의 강물(2) 저녁집회 시간을 김동원 목사가 이어갔다. 집회후 기도회가 이어졌으며 Snackowship으로 둘째 날을 마쳤다.
한편 틈틈이 갖은 조별모임시간에는 중보기도회를 통해 묵상의 기도, 나와 가정을 위한 기도, 코스타 수련회를 위한 기도, 교회공동체를 위한 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세계선교/선교헌신/파송선교사를 위한 기도, 진로/학업/사역을 위한 기도, 타인을 위한 기도/기도응답에 대한 감사기도와 찬양의 제목을 나눴다.
셋째 날인 22일(금) 연합찬양팀과 함께 경배와 찬양, 이대종 선교사의 오전 강의와 액티비티 3, 조별모임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에는 ‘우리들의 간증 시간’을 나누고 폐회예배 (설교 임성택 목사) ‘도전의 말씀’ 시간을 갖은 후, 다함께 마지막 인사를 나눈후 모든 순서를 마쳤다.
2023 다원화 사회에서의 주 되심! LORDSHIP in a Pluralistic Society [주제문 전문]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_ 요일 4:4
You, dear children, are from God and have overcome them, because the one who is in you is greater than the one who is in the world. _ 1 John 4:4
오늘날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신념들이 선언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이제 우리 사회는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입니다. 즉, 모든 사람은 개인의 양심에 따라 예배할(또는 예배하지 않을)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 복음을 증거하려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개인은 각자의 관심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수많은 다른 이데올로기에 직면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이 보기에 기독교는 여러 가지 신념들이 담긴 매우 큰 연못 안에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들 사이에 끼어 경쟁하는 세계관들 중 하나가 될 뿐입니다.
‘기독교인 영적 형성’에 관한 저술로 유명한 미국의 철학자 달라스 윌라드는 “그동안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거부했다. 그들은 기독교의 중심적인 믿음이 과학이나 철학에 의해 오류임이 입증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통적인 기독교는 변하지 않는 진리,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자격을 잃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믿음은 사람이 진리라고 인식한 것을 기반으로 잘못되곤 했다. 즉, 이제 믿음은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잘못이다.”라고 썼습니다. 사회는 기독교 신앙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일단, 단순히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리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제는 기독교에 전혀 진리가 없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더욱더 다원주의적인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어떻게 자세를 바로잡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이 세상 기독교인들도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떠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우리가 어떻게 자세를 가다듬을 것이며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첫째, 우리는 점점 더 다원화되는 사회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야 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원적인 사회에서 사는 것에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을 표현할 자유가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나라가 많지만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고 나눌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다원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그에 따르는 삶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전해져야 하는 개개인에 대한 일종의 존경과 보살핌이 잘 드러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인 우리는 무조건 다원주의에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념을 나누는 것을 장려하고,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생각하는 방식이나 행동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을 막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다원주의적 견해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심지어 다원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관점들에 대한 우리의 이견이나 반감을 현명하고 사랑스럽게 표현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맞추어 생각하고 살도록 우리가 정중하게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다원주의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방식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장려합니다. 우리는 이 세계관을 사용하여 복음을 나누고 전할 목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둘째, 태초부터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문화의 호의를 필요로 한 적이 절대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반대가 매우 많지만, 기억하십시오. 사회적 편견이 그리스도를 반대할 때 크리스천은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스스로 기회를 놓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왕하 6:15-16을 보면, 수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싼 것을 엘리사의 종이 보고 말할 때 엘리사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박해로 중단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이 겨우 다원주의에 의해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강한 반대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눈에 불리한 평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늘의 영역에 우리와 함께 있는 자들이 세상에 있는 자들보다 더 많다고 우리는 엘리사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라고 기록한 것처럼, 이 다원주의 세상에 있는 자보다 우리와 함께 있는 이가 더 크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 신자들은 비기독교인이나 반기독교인들이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가 겸손하고 사랑스런 자세로 듣는다면, 그들과 대화할 권리를 얻을 수 있고 우리의 믿음을 그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대화할 때, 우리는 “토론에서 이길” 필요가 없지만, 그들의 마음에 복음이 심어지도록 믿음의 차이를 분명하고 확신 있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와 대화하는 사람의 믿음과 다르거나 대립할지라도,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심어진 복음이 그의 마음을 영원히 바꿀 수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세상에서 온 생각들에는 이와 같은 능력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은 이것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이 엮어 넣으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시한폭탄 같습니다. 일단 복음이 심어지면 때가 되어 폭발할 것입니다. 사람 안에 복음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복음의 폭발하는 능력이 죄악의 생각들을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마음에 불을 붙여 거듭나서 영생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진리와 현실이 존재하고 그것은 다원적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문을 열기 위해서는 차주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가진 열쇠로 이 차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아무리 확신 있게 생각할지라도 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하나의 특정한 열쇠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한 분 곧,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기독교는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포괄적입니다. 요한복음 3장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 니고데모에 관해 이야기하는 반면, 바로 다음 4장은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사회적으로 반대의 지위에 있는)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니고데모는 부유하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이었으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가난하고, 비종교적이고, 부도덕하고, 멸시를 받았습니다다. 하지만 둘 다 그리스도가 필요했고 둘 다 그리스도께 올 수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니고데모처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며 존경받는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만약 당신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가난하고, 비종교적이고, 멸시받는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누구와 같든지 예수님께 오면 환영받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주장은 배타적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주장은 매우 포괄적이어서 누구나 예수님께 올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님께 와야만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예수님께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포괄적인 복음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와 현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원화 사회에 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약속을 보장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어려워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의 말씀의 능력을 기억하고 계속 위를 올려다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당시 가장 다원적인 도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아덴에 있습니다. 아덴은 옛날부터 철학의 도시이고 동시에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행 13:16-41)할 때 구약 성경을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7장 15절 이하에 나오는 아덴에서의 설교는 다르게 합니다. 이 설교는 종종 선교 전략의 훌륭한 예로 여겨집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바울은 그 당시 유행했던 세속적인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논점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그들의 우상에 관하여 찬양한 말이 여호와 하나님, 곧 참되신 신에게 적합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 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나가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가 말했듯이,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는 시절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되새겨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11절은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광과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를 위해 싸웁니다. 하나님은 또한 대대로 완전히 성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그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시편 119:90).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전능하신 힘과 그의 왕국이 영원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다니엘서 4장 3절은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원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어려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성실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세대를 넘어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뜻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원화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담대히 선포합시다!
호주코스타 후기영상
코스타 2023 주제문 영상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