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6월 6일, 영국의 군인•탐험가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 ~ 1912) 출생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CVO, 1868년 6월 6일 ~ 1912년 3월 29일)은 영국의 군인, 탐험가이다.

– 로버트 팰컨 스콧 (Robert Falcon Scott)
.출생: 1868년 6월 6일, 잉글랜드 데번주 플리머스
.사망: 1912년 3월 29일 (43세), 남극 대륙 로스 빙붕
.국적: 영국
.성별: 남성
.직업: 군인, 탐험가
.배우자: 캐슬린 브루스 (1908년 결혼)
.자녀: 피터 스콧 경 (1909~1989)
.병역: 영국 왕립해군
.계급: 해군 항해대령
.복무: 1881년 ~ 1912년
.상훈: 로열 빅토리아 훈장 3등급 (1904), 베가 메달 (1905), 컬럼 메달 (1906)
영국 해군 장교이자 남극 탐험가이다.
로알 아문센과의 남극점 정복 경쟁으로 유명하다.
영국 왕립해군으로 최종 계급은 항해 병과 대령이다.
1904년에 로열 빅토리아 훈장 3등급을 수훈했다.

○ 생애 및 활동
로버트 팰컨 스콧 (Robert Falcon Scott)은 1868년 6월 6일, 잉글랜드 데번주 플리머스에서 태어났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 각국은 항로개척, 극지방 정복에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경쟁을 펼쳤다. 1900년,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가 남극 탐험대를 보낸다는 소문을 들은 영국 왕실은 이전부터 남극 정복을 꿈꾸던 70대 나이의 왕립지리학회 회장 클레멘츠 마크햄 경을 후원하기로 했다.
마크햄은 탐험대장을 맡을 해군 장교를 물색하는데 당시 독일과 전쟁이 곧 날거라는 풍문에 장교들은 남극 탐험에 무관심했다.
스콧은 1882년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31세의 해군 대위였던 스콧은 전부터 알고 있던 마크햄 경을 직접 만나 자신이 탐험대장을 맡겠다고 자원 했고 1900년 6월 30일, 스콧은 공식적으로 남극 탐험대 대장으로 임명되고 중령으로 승진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디스커버리 호를 타고 남극 탐험을 지휘하였다.
이때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발견하여 남위 82도 17분까지 도달, 당시 가장 남쪽에 당도한 기록을 세웠다.
섀클턴이 1908년 12월에 남극점 100마일 전방까지 갔다가 상황이 악화되어 퇴각하고 돌아와 유명해지자, 스콧은 섀클턴이 다음 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했기에 섀클턴보다 먼저 성공하려고 남극점 도달을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스콧은 섀클턴이 아니라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1910년 테라노바 호를 이끌고 제2차 남극 탐험에 나서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극점은 1911년 12월 14일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먼저 도달하였기 때문에 첫 정복의 목표는 깨어졌다.
그와 4명의 동행자는 귀로에 악전후로 조난, 식량부족과 동상으로 전원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겠다는 꿈이 좌절된 이후, 지칠대로 지친 영국 탐험대는 철수를 시작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힘이 없었다. 말도 개도 스노모빌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 썰매를 끌고 강행군을 했기 때문이다.
운도 따르지 않았는데, 출발전에 참고한 남극의 기온변화표는 현대 기준으로도 매우 정확한 물건이고 그에 따르면 스콧과 그의 탐험대에는 사람이 버티기 힘든 추위가 오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이상 기온 탓에 갑자기 빨리 찾아온 추위로 영하 40도를 연속해서 견뎌내야했다.
1912년 2월 17일, 크레바스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뇌진탕과 폐렴 합병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해군중사 (First Class Petty Officer) 에드거 에번스 (Edgar Evans, 1876 ~ 1912)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두 번째 희생자는 오츠였다. 보어 전쟁 때 입은 총상이 동상으로 도져 발이 썩어들어가서 오래 걷지 못하게 되자, 스콧에게 자신을 놔두고 가라고 애원했지만, 스콧은 그럴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오츠는 3월 16일 발의 고통을 참으며 신발을 신고 스스로 눈보라가 불어대는 천막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한국내에도 번역된 스콧의 일기인 남극일기에 나온다.
오츠: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Oates: I am just going outside and may be some time
스콧: 우리는 가엾은 오츠가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향해 걷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그것이 용감한 자의, 영국 신사의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 스콧의 일기에서
결국 오츠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3월 17일은 오츠의 32번째 생일이었다. 오츠가 쓰던 침낭은 구조를 위해 파견된 후발대에 의해 회수되었고, 케임브리지의 스콧 극지 연구협회에 전시되어 있다.
스콧 일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오츠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나를 놔두고 가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힘을 내 귀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계속 몰아치는 눈보라가 기다리고 있었고, 9일 동안이나 계속된 이 눈보라는 스콧 일행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등유도 바닥나 뼈까지 얼어붙을 듯한 지독한 추위 속에 식료품이라고는 홍차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진정제 30알과 모르핀 주사액 등의 의약품과 탐험 일지, 광물 샘플들 뿐이었다. 물을 끓일 수 없었으니 홍차는 그냥 이파리 째로 먹어야 했고, 진정제와 모르핀은 자살을 원한다면 바로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 기독교 사회에서 자살은 금기시되는 행동이었기에 하지 않고, 끝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실제 죽음의 원인도 전원 동사, 즉 얼어죽은 것이다. 사실상 자살에 가깝게 죽은 사람은 오츠뿐인데 자살이라기보다는 동료들을 위한 희생이었고 후일 찢어진 침낭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는 당연스럽게도 살려고 몸부림친 것이 확인된다.
1912년 11월 12일 탐색팀의 에드워드 앳킨슨 (Edward L. Atkinson)에 의해 유해와 일기 (마지막 일자는 3월 29일)가 최후를 맞았던 텐트에서 발견되었는데, 불과 11 miles (18 km)에 스콧의 메인 베이스 캠프 (‘One Ton Depot’)가 위치해 있었고, 24 miles (38 km)에 예정지였던 베이스 캠프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영국 신사다운 최후를 마친 것이 알려져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저서로는 《탐험항해기》 (2권, 1905), 《스콧 C.M.Scott 최후의 원정》 (1913)이 있다.
다만 스콧이 로알 아문센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이 탐험에 성공한 것에 비해 스콧이 탐험에 실패한 탓으로 스콧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 사망 당시 일기
일기를 보면 스콧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탐험 일지 마지막 페이지에 먼저 세상을 떠난 오츠 대위와 에번스 중사, 그리고 자신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가 생을 마감한 헨리 바워스 (Henry R. Bowers, 1883 ~ 1912) 해병 소위와 민간인 탐험가 에드워드 윌슨 (Edward A. Wilson, 1872 ~ 1912)의 아내와 식구들에게 사죄하는 글까지 써두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식구, 그리고 지인들에게 글을 쓴 스콧은 글 말미에 ‘침낭에 누운 채로 잠자듯이 영원히 눈을 감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저 홀로 남아있는 게 괴롭습니다…’라고 적어두고 있다.
3월 29일 남긴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다.
“Thursday, March 29. Since the 21st we have had a continuous gale from W.S.W. and S.W. We had fuel to make two cups of tea apiece and bare food for two days on the 20th. Every day we have been ready to start for our depot 11 miles away, but outside the door of the tent it remains a scene of whirling drift. I do not think we can hope for any better things now. We shall stick it out to the end, but we are getting weaker, of course, and the end cannot be far. It seems a pity but I do not think I can write more. R. Scott.”
“3월 29일 목요일. 21일 이후로 남서남과 남서 방면에서 계속해서 강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20일에 우리에게는 두 잔의 차를 끓일 연료와 이틀 분량의 날것의 식량 뿐이었다. 11마일 떨어진 우리 창고로 가려고 매일 준비했었지만 텐트 밖은 몰아치는 눈보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긍정적인 상황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끝까지 버티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끝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슬프지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 로버트 스콧”
For God’s sake look after our people.
우리 국민들을 굽어 살피소서.

이 문장을 끝으로 스콧의 탐험 일지는 끊겼다. 세 명 모두 동사한 것이다. 그리고 약 8개월 남짓 뒤, 스콧 탐험대를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후발대가 스콧과 바워스 소위, 윌슨 세 사람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후발대에는 지원대로 탐험 초기에 참가했다가 스콧의 지시에 따라 도중에 기지로 복귀한 7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앱슬리 체리개러드 (Apsley Cherry-Garrard, 1886 ~ 1959)의 회고록에서 세 사람의 주검을 발견했을 당시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12년 11월 12일 정오 쯤, 우리는 마침내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혹독한 눈보라가 모든 걸 덮어서 거대한 눈구덩이로만 보였기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곳은 윈튼 캠프로부터 12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눈을 헤치고 보니 천막이 보였다. 천막 위에는 약 2~3피트는 됨직한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천막이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걸 보고 난 짐작했다. ‘이들은 죽었구나’. 천막 입구 바깥에는 두 쌍의 스키 스틱이 눈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천막 안을 열어봤다. 안에는 바워스 소위와 윌슨이 침낭 속에 누워 있었고, 스콧은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름을 불러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셋 다 눈을 감고 잠을 자는 듯이 편안해 보였다. 윌슨과 바워스 소위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있었고, 스콧은 평생의 친구이던 윌슨에게 왼손을 내민 채로 굳어 있었다. 스콧의 곁에는 작은 가방이 있었는데 안에는 탐험 기록이 꼼꼼하게 적혀있는 세 권의 공책이 들어 있었다. 바워스 소위의 기후 관련 기록은 3월 13일까지 적혀 있었다.(중략)
해군 군의관 에드워드 앳킨슨 (Edward L. Atkinson, 1881 ~ 1929)이 고린도전서에 나온 장례식 구절을 손수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있던 자리에 그들을 묻었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장례식을 끝내고 보니 어느 새 자정이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세 사람도 남극에 묻혔다. 극지방의 추위 속에 장기간 방치된 시체는 100~200㎏이 넘는 무게가 나가서 시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유품은 영국 탐험대의 전초 기지였던 윈튼 캠프로 옮겨졌고, 이 오두막은 탐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스콧 탐험대 기념관’이 되어 있다.

스콧 탐험대는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저장고에서 17.7㎞ 떨어져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서쪽으로 80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제대로 방향을 잡아 800m만 더 갔으면, 조금이나마 식량과 연료를 얻어서 생환했을지도 모른다. 전초 기지인 윈튼 캠프까지는 19.3㎞만 가면 되는 위치였으니. 물론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겨우 800m가 그들에겐 800km처럼 느껴졌을테지만 이걸 알았더라면 희망으로 힘을 냈을테니 후세에 안타까움을 준다. 문제는 저장고를 찾지 못한 것도 스콧이 자초한 일이었다는 것. 아문센은 제 아무리 어떤 눈보라가 와도 눈이 쌓여도 생필품 저장고를 찾을 수 있도록 큰 깃발을 높이 세우고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지만, 스콧은 그런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죽음은 자업자득이 되고 말았다. 결과론적이지만, 트뤼그베 그란 (Tryggve Gran, 1888 ~ 1980)이라는 노르웨이 출신 파일럿를 초대하여 스키를 배운 스콧이지만 정작 스키는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던 일행에 그란을 놔두고 갔다가 전원 다 죽었다. 바로 이 그란이 스콧 구조대 가이드를 맡아 공교롭게도 얼어죽은 스콧 일행 시체도 먼저 찾아냈다. 그란은 스키를 잘 타고 추운 지역에 살면서 추위에 대응도 잘했기에 같이 갔더라면 최소한 목숨이라도 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데 그런 그를 놔두고 간 건 같은 노르웨이인이라고 아문센을 도와 우릴 훼방놓으리라고 여긴 스콧이 자업자득으로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

○ 귀환 실패의 원인
- 연료의 부족
남극의 혹한의 날씨로 인해 납 리벳으로 제작한 연료 저장고에서 연료가 서서히 새는 현상이 있었고 이는 이전의 탐험대에서 보고된 바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이를 간과하였다. 그의 일기 곳곳에는 저장소마다 연료 저장고의 연료의 양이 줄어들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굶주림
스콧 탐험대는 하루 평균 섭취 칼로리를 약 4,000칼로리로 잡고 식량을 분배했으나 남극에서의 강행군은 그 이상의 체력과 열량을 필요로 하였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 3월의 귀환길에서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문센의 경우도 식량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문센은 자기 대원 중에 포경선 사수를 고용하여 바다표범이 보이는 대로 사냥해서 식량을 보충했지만 스콧은 탐험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사냥을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하 대원 중 한 사람인 로런스 오츠가 스콧에게 조랑말이 죽으면 바로 고기를 뜯어서 그걸 먹어가면서 버티자고 했으나 스콧은 동물애호가 기질을 보여 그런 오츠의 조언을 묵살하고 조랑말이 죽으면 그 자리에 그냥 방치했다. - 보조 동물 선택의 실패
로알 아문센은 작은 크기에 비해서 추위에 강한 개를 택한 반면에 스콧은 큰 크기에 비해서 추위에 약한 말을 선택했다. 결국 말은 남극 수준의 추위에 약할 뿐 아니라 크기도 커서 크레바스에 개가 빠지면 손으로 개를 들어서 건지면 되지만 말이 빠지면 그냥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말은 개에 비해 식량 소모도 엄청났기 때문에 스콧은 말이 먹이인 건초를 따로 구비해서 탐험을 해야 했다. 결국 스콧이 선택한 말은 아사하거나 동사하거나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고 이로 인하여 스콧의 썰매는 탐험 중반을 넘기면서 사람이 직접 끌어야 했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시종일관 개가 썰매를 끌고 탐험한 아문센의 탐험대에 비해 심했다. - 복장 불량
아문센의 경우는 이미 이누이트들과 조우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옷, 즉 순록 가죽으로 만든 옷을 그대로 착용하여 그 옷을 입고 탐험을 했다. 그래서 추위를 완벽하게 견뎌냈다. 하지만 스콧은 겉치례에만 몰두한 나머지 이누이트들의 저질스러운 옷은 입을 수 없다며 영국에서 직조한 모직 옷을 입고 탐험을 했다. 그런데 모직 옷은 젖으면 오히려 벌거벗은 것보다도 체감 온도가 떨어지는 데다가 자체 방한 능력도 순록 가죽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게다가 아문센의 가죽 옷은 앞이 트여있는 데다가 끈으로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었지만 스콧의 모직 옷은 푸대자루처럼 입어야했던 데다가 추위에 약해서 낮은 온도에서는 부서지는 성질을 지는 금속인 주석을 단추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찬 바람을 막기 어려웠다.
이미 탐험에 실패한 다른 사람의 경험 무시 / 이미 실패한 방법을 다시 동원한 점.
스콧이 남극을 텀험하기 이전에 이미 어니스트 섀클턴이 조랑말과 설상차를 이용하여 남극탐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그 전례에 대해 스콧은 섀클턴이 왜 실패했는지 분석하지 않은 채 섀클턴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시 남극을 탐험했다. 스콧은 다른 사람이 실패했다는 것을 입증한 방법을 다시 들고 나왔다는 점은 분명히 탐험에 실패할만 했다. - 대원 선발의 문제
스콧 탐험대이나 아문센 탐험대나 둘 다 팀원 중에 해군장교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스콧과 아문센의 팀원들은 전혀 다른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문센의 탐험대원들은 해군장교 이외에 포경선 사수,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 우승자, 세계 개썰매 선수권 대회 우승자 등 한랭지역 전문가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스콧의 탐험대원들은 스콧 자신이 해군 장교인 것 이외에 지질학자, 기후학자, 자연생태학자, 설상차 정비공 등이었다. 거기에 악재까지 겹쳐 같이 동반했던 지질학자 겸 기후학자 에드가 에번스는 탐험을 할 때 이미 뇌진탕으로 정신장애를 얻은 상태였는데 이로 인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며 스콧 탐험대의 진로를 계속 방해했고 결국 스콧의 탐험대원 중 가장 먼저 사망했다. - 대원의 조언 묵살
아문센은 올라프 바야란드가 스키를 더 빨리 달리게 한다면서 개조하겠다고 하자 이를 수락해서 80kg에 달했던 스키의 무게를 22kg까지 줄이고도 성능의 변화가 전혀 없도록 개조했다. 이 스키 중량을 줄인 개조로 인하여 아문센의 탐험대는 체력소모가 덜했고 결국 남극탐험 성공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스콧은 로런스 오츠라는 매우 유능한 장교가 있었음에도 그런 오츠의 조언을 모두 묵살했고 결국 탐험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대원이 전원 사망했다. - 목표의식
아문센은 오직 남극 탐험 하나에만 몰두한 반면에 스콧은 남극 탐험과 남극의 토양 생태계 조사에 심지어는 황제펭귄의 생태에 대해 조사하는 일까지 병행했다. 즉, 스콧은 너무 많은 일을 무리하게 많이 벌인 것이다. 실제로 스콧이 사망할 당시에 갖고 있던 물건들 중에서는 남극에서 채취한 각종 광물들도 있었는데 무게가 무려 16kg에 달했을 정도였다.
자존심
스콧은 아문센이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고 나서 남극점을 비롯한 여러 곳에 스콧을 위해 남기고 간 식량과 의복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스콧은 경쟁자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았다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 나머지 아문센이 남기고 간 중요한 물자들을 일절 손대지 않았다. - 이정표 미설치
아문센은 각종 물자를 저장하는 보관창고와 자신들이 여행한 길에 깃발을 높게 세워서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스콧은 이런 조치 없이 그저 과거에 섀클턴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가기만 했다. 이것이 스콧이 탐험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는데 그 증거로 스콧은 탐험을 마치고, 메인 베이스 캠프에서 불과 11 miles (18 km) 밖에 안 남겨둔 지점에서 사망했다는 점이다.

○ 과학적 기여
스콧은 야심에 찬 과학 탐사를 기획하였는데, 당시까지 최대 규모인 극지 과학 탐사 팀으로 생물학자 2명, 지질학자 3명, 기상학자 1명 등 12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였다.
팀은 각기 다른 2,109 종류의 동물들 (이 가운데 401개가 새로운 종), 바위 샘플들, 펭귄 알들, 식물 화석들을 채집하였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인도, 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에서 자라는 고사리 유사 종의 식물 화석 (fossilised fern-like plant)으로서, 2억 5천만년 전의 기후가 충분히 온난했음을 추정하게 한다.
스콧 팀에 의해 수집된 다른 증거들과 함께 인도, 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 남극 대륙 (앤탁틱 혹은 앤타르틱)들이 모두 초대륙 (supercontinent)의 일부였다는 힌트를 준다.
과학자들은 이 대륙을 곤드와나랜드 (gondwanaland)라고 명칭한다.
○ 서훈
1901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 4등급 (Member of the Fourth Class, 현행 LVO)
1904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 3등급(CVO)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