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6월 14일, 프랑스의 장군 루이 드제 (Louis Charles Antoine Desaix, 1770 ~ 1800) 별세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프: Louis Charles Antoine Desaix, 1770년 12월 31일 ~ 1800년 6월 14일)는 프랑스의 영웅적 군인이다. 루이 16세가 폐위된 뒤 왕당파라는 혐의로 감옥에 갇혔으나 1793년 ~ 1794년에 큰 활약을 했다. 1793년 독일 슈트라스부르크 전투, 1794년 마인츠 전투, 1795년 만하임 전투, 1796년 바이에른 전투에서 활약을 했고 1797년 나폴레옹을 만났다. 1798년 피라미드 전투에서 맘루크들과 치열하게 싸운 끝에 상이집트를 점령했다. 1800년 이탈리아 마렝고 전투 중에 가슴에 총을 맞고 전사했다.

– 루이 드제 (Louis Charles Antoine Desaix)
.별명: 정의의 술탄 (Sultan juste)
.출생: 1770년 12월 31일, 프랑스 오베르뉴
.사망: 1800년 12월 31일 (전사, 30세), 이탈리아 로마
.국적: 프랑스
.직업: 군인 (프랑스의 장군)
.참전: 1793년 독일 슈트라스부르크 전투, 1794년 마인츠 전투, 1795년 만하임 전투, 1796년 바이에른 전투, 1798년 피라미드 전투, 1800년 이탈리아 마렝고 전투 (전사)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으로 루이니콜라 다부와 같은 귀족출신 장군이다.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드 베구 (Louis Charles Antoine Desaix de Veygoux)라고 쓰기도 하며, 별명으로는 특이하게 ‘정의의 술탄 (Sultan juste)’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과 군인의 길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Louis Charles Antoine Desaix)는 1770년 12월 31일에 프랑스 퓌드돔 (Puy-de-Dôme) Ayat-sur-Sioule이라는 도시에, 몰락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드제는 프랑스 원수인 데퓌아트 (d’Effiat) 장군이 세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 드제에게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는데, 학교에 처음으로 군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드제는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했다.
그가 근위대에서 6년동안 복무하는 동안 그는 스스로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근위대였던 드제는 당연히 체포 대상이 되었고, 주변에서 조언하는 것을 듣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하늘이 드제를 도왔던 건지,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는 것을 거부한 드제에게 샤를 루이 빅토르 드 브로이 (Charles Louis Victor de Broglie) 경이 손을 뻗쳤고, 드제는 그의 막하로 들어갔다. 그의 두드러진 활약은 공화국 정부의 호감을 얻었고, 게다가 (공화국 정부가 보기에) 구체제의 인물들과는 달리 새 질서에 적응하고 말을 잘 듣는 드제는 비교적 빨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94년에 사단장의 지위에 올랐다.
- 프랑스 혁명군에서의 드제의 활약상
.1795년의 라인 전역에서부터 나폴레옹을 만나기 전까지
드제는 1795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공했을 당시 주르당 장군의 우익군을 맡아 지휘했다. 그리고 모로 장군의 바이에른 침공 때에 모로 장군이 이끄는 라인 방면군에 종군했다. 여기까진 별다른 활약이 없었지만 이듬해인 1796년에 벌어진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의 전투에서 그는 중요한 지휘를 맡게 되었다.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에서 각각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에게 박살난 모로 장군의 라인군이 후퇴하게 되는데 그 후위를 맡은 것이다. 이후 케흘 요새까지 무사히 후퇴하자 그에게는 매우 큰 영예가 주어졌는데, 드제가 바로 그의 가문명이 된 것이다.
이듬해인 1797년에 그는 첫 군사적 성공을 거두게 될뻔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좌절되었고 그 때문에 어떻게든 무언가라도 해보고 싶어서 무작정 이탈리아 원정에 따라갔다. 그 때, 그를 맞아준 젊은 장군은 동년배인 드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드제는 그를 계기로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이집트 원정, 그리고 제2차 이탈리아 전역에서
이탈리아 원정에서 나름대로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있던 드제는 임시적으로 “Army of England”의 사령관직으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폴레옹에 의해 이집트 원정군에 소속되어 이집트를 향해 출발했다. 그의 사단은 이집트 일대를 주름잡고 있던 맘루크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피라미드의 전투) 곧 쳐바르고 별동대를 이끌고 나일 강 상류로 올라가 무라드 베이 (Murad Bey)마저 두들겨 팼다. 이 일로 인해 상이집트에 있던 농부들로부터 “정의의 술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줄 함대가 아부키르에 정박하고 있던 중에, 하필이면 호레이쇼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에게 함대가 완전히 박살이 나면서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이집트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란츠 2세는 “기회다!”를 외치며 이 기회에 잃어버린 땅 좀 찾아보자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국내의 여론마저 그다지 좋지 않은 낌새가 느껴지자, 나폴레옹은 일단 급한대로 자신과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일단 프랑스로 빨리 돌아왔다.
그 때 나폴레옹은 총재정부를 갈아엎고 집정정부를 세운 뒤 자신이 제1집정에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드제는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다. 그리고 마침 거의 망국으로 만들어 놓았던 오스트리아가 다시 일어나 북이탈리아를 빼앗으려 들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향해 1800년 제네바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5월에 군대를 출발시키게 되는데 드제도 나폴레옹 휘하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즉시 두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군단을 지휘하여 제노바를 제압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드제는 행군 중 리발타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었는데, 마침 나폴레옹의 참모장교가 지나가던 길이라 그를 불러 정황을 알아본 뒤, 곧바로 부대를 재편, 드제 스스로 분견대를 조직하여 부대와 함께 빠른 길로 해서 마렝고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마지막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목숨과 맞바꾼 승리
오후 3시경 나폴레옹의 군대는 마렝고 전투에서 완전히 오스트리아군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패주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한 무리의 프랑스 군대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 바로 드제였다. 드제는 바로 전령을 보내 지금 자기 부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보냈다. 드제가 도착하자 나폴레옹은 드제에게 “귀관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고 물었고, 드제는
“이 전투는 명백한 패배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이길 차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한 후 마르몽이 지휘하는 포병대의 포격과 함께 휘하 3개 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으로 돌격해, 오스트리아군을 혼란에 몰아넣고 패주시켰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에 적의 총알에 맞아 전사했다.

- 영웅의 죽음
드제가 마렝고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의 친구이자 부관이었던 루이니콜라 다부에게도 전해졌다. 그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슬퍼했을 거라 추측한다.
나폴레옹은 그의 친구인 드제를 위한 기념비를 파리의 도팽 광장과 빅투아르 광장에 각각 하나씩 세웠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 놓일 조각들을 당대의 장인 장 기욤 모아트에게 명령하여 만들게 했고, 드제의 무덤은 생베르나르 호스피스에 마련했다고 한다. 원래는 밀라노에 묻혀 있었으나 1805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렇게 두드러지게 활약한 내용은 없었지만, 마렝고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나폴레옹군을 구하기 위해 신속히 달려와 무지막지한 돌격을 성공시켜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 그가 세운 군사적 업적이다.
이집트나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베르티에, 란, 다부 등이 원수에 오른 것을 보면 만약 드제가 살았다면 원수봉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 특히 다부가 원수가 된 것은 그의 상관이었던 드제의 영웅적인 최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