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 교수의 신학논단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3)
우리가 읽는 신약성경은 주후 1세기경에 기록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사역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태동된 교회가 성장하며 확산하는 일이 그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또한 지리적으로 볼 때, 그러한 운동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사마리아, 유대, 그리고 소아시아지역을 거쳐 그리스와 로마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1세기에 기록된 신약의 저자들과 독자들은 그 당시 그러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당시의 문화와 공간에 대한 이해는 결국 신약이해의 핵심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와 로마로 대별된다. 그래서 필자는 신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인 유대문화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먼저 유대 문화의 이해에 필요성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예수 운동의 핵심적 내용, 즉 예수님에 관한 내용은 그 배경과 출처가 구약성경, 율법, 유대인, 유대사회, 유대교, 유대역사와 같은 것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이것을 통칭하여 유대문화라 하자. 특별히 예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를 읽을 때, 이러한 유대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복음서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는데 한계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종교적 이해와 율법 이해, 또한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와 대제사장 등과 같은 유대인들의 구성성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예루살렘과 갈릴리 땅의 오랜 갈등이 되었던 유대의 분열역사 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복음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유대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2가지 예를 들어보자;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일(마 21:12-18; 막 11:15-19; 눅 19:45-48; 요 2:12-25)을 하셔야만 했는가? 왜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공히 다루고 있지 않지만,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네 편의 복음서가 다 언급해야만 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유대문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먼저 성전청결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성전청결사건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어떻게 그 당시의 권력가들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거룩한 공간이 어떻게 차별의 상징이 되었는지를 유대문화의 이해가 없이는 잘 파악할 수 없다. 성전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를 나누고, 남자들과 여자들을 나누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공간으로 전락하였고, 막강한 권력과 부를 축척하는 사유화된 기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성전은 4개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유대 남자들의 뜰), 그리고 제사장의 뜰. 이러한 뜰은 그것이 제대로 기능할 때는 만만이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며 예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누구나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방인들과 여인들까지도.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그 공간은 차별의 공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차별되어 이방인은 유대인들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남자와 여자는 차별되어, 여자는 남자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제사장과 평신도는 차별이 되어, 평신도는 성직자의 공간에 들어갈 수 없게 됨으로, “너는 나와 달라, 나는 너보다 더 우월한 존재요 기능을 하는 자”라는 차별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제물의 매매와 환전으로 인해 동전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결국 이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권을 가진 권력가들의 부와 힘의 축척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다시 선언하셨고, 이 성전의 원래의 기능을 자신을 통해 회복하실 것을 선언하셨는데, 이것은 이방을 향한 문을 여시는 선언이기도 했으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예수 운동에 동참자로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또한 남자와 여자, 성직자와 평신도의 개념을 새롭게 하셨다. 자유인과 죄인의 개념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지향하셨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한 개념을 바꾸심으로, 고정된 성전에서 움직이는 성전의 개념이 새롭게 형성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이시다”라는 사상은 바울을 통해 그 예수님의 몸의 지체인 성도들(엡 2:21-22; 3:15-16), 그리고 성도들의 몸이 성전, 즉 성령이 거하시는 전의 개념으로 확대되며 새로운 성전관으로 발전하게 된다(고전 3:16-17). 그로 인해, 고정된 공간, 물리적 공간으로써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몸의 지체인 성도들이라는 움직이는 공간, 영적인 공간으로써의 성전의 개념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교회의 태동과 성장과 확산에 중요한 신학적 기초가 되었다.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예수님의 몸인 성전; 요 2:21), 스데반의 설교에서 등장하는 성전에 대한 이해(건물로써의 성전폐지론; 행 7:48-50), 바울의 성전관 (고전 3:16-17) 등은 동일한 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 당시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왜 이러한 예수의 운동이 복음이 되고, 세상을 저항하며 전복하는 혁명적 운동이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는 유대문화가 신약을 형성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축이 됨을 반드시 알고, 그 문화에 대한 이해를 습득함으로 신약을 더 잘 이해하고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 탄생의 기록은 마태와 누가에게서만 기록되어 있는데, 세례 요한의 대한 기록이 왜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언급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이에 대해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왕적(정치적), 제사장적, 선지자적 메시야관으로 존재했었지만 점차 왕적 메시야, 다시 말해 승리자적 메시야관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러한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고, 그러한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성경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다(말 3:1; 4:4-6; 사 40:3-4). 결국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확인을 위해 끊임없이 그 후보자가 되는 자들을 향해 엘리야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메시야, 엘리야, 그 선지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그에게 질문하며, 그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였던 것이다(요 1:19-21). 따라서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의 대한 설명을 통해, 즉 오리라 한 엘리야가 왔기에(마 11:13; 17:10-13), 그리고 그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기에(마 3:3; 막 1:3; 눅 3:4), 이제 메시야가 오실 때가 되었다는 방식으로, 메시야가 오셨음을 확증하는데, 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라는 논증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이다.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복음서가 공히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입증적 근거이다. 첨언하자면, 성탄을 앞둔 즈음에 우리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세례 요한의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세례요한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구약, 즉 유대문화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에 대한 이해는 신약에서 왜 예수님이 메시야이신가를 이해하게 만드는데 핵심적인 기초를 제공하여 주면서도 동시에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는가를 설명하는 기초를 제공해 준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왕적(정치적) 메시야, 승리적 메시야관은 군중들로 하여금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지만, 반대로 당시의 권력가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력을 상실케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었기에 예수의 정체성은 그들에게 더 첨예한 사안이 되었다.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우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거하기로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예수가 왕적(정치적) 메시야, 승리적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요 7:45-52).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반역자의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게 함으로 자신들의 메시야관에 대한 손상을 가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죄목, 즉 “유대인의 왕”에 대한 심판이었다(마 27:11-26; 막 15:2-15; 눅 23:3-25; 요 18:33-19:16). 그들은 승리자 아닌 패배자로 예수님을 마감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그들의 메시야관에 대한 도전은 결국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나타나고 극복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때 선포되었던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행 2:14-36). 결국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는 유대인의 메시야에 대한 이해를 신약성경은 우주적 메시야로써의 예수에 대한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다(골 1:15-20).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이해는 유대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문화을 넘어서는 기독교의 세계관을 확보할 때 명확하게 된다. 신약은 예수님에 대해 궁극적으로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의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을 토대로 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다음 호에서는 신약성경 이해의 두 번째 축이 되는 그리스-로마 문화와 신약의 관련성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김세현 교수(SCD 신약학)
시드니예안장로교회 담임, 시드니신학대학한국신학부 교수, 시드니하우스 성경언어연구소 소장, 영국셰필드 대학교 성서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