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탕현조의 사상과 그의 문학 : 탕현조지사상급기문학
노상균 / 학고방 / 2005.8.10

탕현조는 명대의 저명한 희곡가이다.
본서는 탕현조가 남긴 각종의 문장을 기초로 하여 그의 중심사상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그의 철학사상과 문학사상의 체계를 확립하고, 그의 명작 ‘臨川四夢’에 대해 새로운 해석과 평가를 시도하였다.
○ 목차
제1장 硏究動機及現存硏槪況
제2장 湯顯祖的生平考察
제3장 明中後期的時代背景
제4장 湯顯祖的哲學思想
제5장 湯顯祖的政治思想
제6장 湯顯祖的文學思想
제7장 湯顯祖的<牡丹亭>硏究
제8장 湯顯祖的<紫?記>硏究
○ 저자소개 : 노상균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중국문화대학 Ph.D.중어중문학
서울대학교 석사.중어중문학
서울대학교 학사.중어중문학
논문으로 “史記에 보이는 耆老형상 고찰” 외 다수

○ 중국 명나라의 문관•각본가•소설가 탕현조 (湯顯祖, 1550 ~ 1616) 개관
탕현조 (湯顯祖, 1550년 9월 24일 ~ 1616년 7월 29일)는 중국 명나라 시대 후기의 문관 (文官), 극작가, 시인이다.
- 탕현조 (湯顯祖)
.출생: 1550년 9월 24일, 명나라 장시성 린촨
.사망: 1616년 7월 29일 (65세), 명나라 쓰촨성 청두
.국적: 명나라
.직업: 문관 (文官), 극작가 (劇作家), 시인 (詩人)
.필명: 자 (字)는 의잉 (義仍) / 아호 (雅號)는 옥명 (玉茗), 옥명당 (玉茗堂), 왕명당 (王茗堂), 해약 (海若)
.활동기간: 1573 ~ 1616년
.장르: 희곡, 시문학
자 (字)는 의잉 (義仍)이며 호 (號)는 옥명 (玉茗), 옥명당 (玉茗堂), 왕명당 (王茗堂), 해약 (海若)이다.
필명으로 청원도인 (淸遠道人)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전세계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알려져 있고 “중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별칭도 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동양의 셰익스피어”로도 불린다.
- 생애
장시성 (江西省) 임천 (臨川)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몸이 병약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총명하여 다양한 스승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그 중에는 양명학 태주 (泰州)학파의 진보적 학풍을 전수받은 나여방 (羅汝芳)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이는 탕현조의 작품에 깃든 진보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세에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8년 후인 1570년 (융경 4년), 21세의 나이로 향시 (鄕試)에 급제하였다.
23세 때 시인으로 첫 입문하였다가 이후 33세 때는 진사시에 급제. 난징의 태상박사 (太常博士), 예부주사 (禮部主事)를 역임했으나 재상을 탄핵하여 좌천되고, 48세 때 관을 물러난 그는 자적함 가운데서 사작 (詞作)을 즐기다 세상을 마쳤다.
30세경부터 극작을 시작. <자차기 (荊釵記)> <환혼기 (還魂記)>, <남가기 (南柯記)>, <한단기 (邯鄲記)> 4전기는 이른바 그의 대표 걸작으로서 <임천사몽 (臨川四夢)>이라든가 <왕명당사몽 (王茗堂四夢)>이라 칭하여 높이 평가되고 애호받았으며, 염려 (艶麗)·농후한 관능적 향기에 넘쳐, 명대 곤곡 (崑曲) 전기 (傳奇)의 대표작으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사몽 (四夢)이란 4편 (四篇), 또는 꿈에 유래된 이야기에 연유된다.
그 문체는 희곡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문학적이었으므로 상연할 때에는 각색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명대 극작가는 권력 밖에서 고투한 원대 잡극가와는 달리, 관계에서 뜻을 이룬 현관 (顯官)이나, 왕족의 여기적 (餘技的) 교양에서 나온 것으로, 그 내용은 황당한 신선담, 풍류 문인의 유락 일사 (遊樂逸事), 또는 상투적인 재자 가인 (才子佳人) 전기 등 문인 취미의 격식 속에 박혀서 사회를 보는 눈이 예리하지 못하고 생기를 결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 (嘉靖) – 만력 (萬曆)에서 명말에 걸쳐, 중국의 봉건사회가 새로운 단계 (이른바 ‘자본주의’의 맹아기)에 들어서는 시기에 강남 (江南) 극계에 등장하여, 계통적으로도 태주학 (泰州學)파나 동림당 (東林黨) 등, 당시 진보적 문인 그룹과 유대가 깊었던 탕현조의 희곡 작품에는 그 때까지의 재자 가인 전기의 한계를 넘어 개성 (個性) 해방, 봉건제 비판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대결한 면도 엿보인다.
그 점은 특히 그의 대표작 <모란정 환혼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모란정> (牡丹亭) 55장 (場)은 남송 시대의 이야기다. 두려랑 (杜麗娘)이라는 미소녀가 꿈에 이상적인 남편 유몽매 (柳夢梅)와 정을 맺어, 꿈에서 깬 뒤부터는 밤낮을 두고 연모한 끝에 죽어버리나, 3년 후 신의 힘으로 부활하여 청년과 떳떳이 맺어진다는 이야기로 작자의 훌륭한 필치에 의해 일대 로망으로 알려져 있다.
1591년 (만력 19년) 윤삼월에 혜성이 관찰되자 황제가 이를 신하들의 태만과 불충으로 인한 흉조라고 여겼다. 이에 탕현조가 전국 방방곡곡의 감찰사들과 조정 대신들의 과오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상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실세 대신들이 반박 상소를 꾸준히 하여 도리어 자신이 광둥성 서문 (徐聞)현의 말단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사실상 유배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593년 (만력 21년) 저장성 수창 (遂昌)현 지현으로 발령받아 거기에서 선정을 베풀었으나, 역시나 그 강직한 성품 탓에 한 수창현 출신 관료의 은닉 토지를 처분하여 그로부터 모함을 받아 1598년 (만력 26년) 조정에 사직을 청하고 귀향하였다. 3년 후에 사직서가 처리되어 정식으로 면직된 탕현조는 소설 창작에 전념하다가 1616년 7월 29일 (음력 6월 16일)에 고향에서 별세했다. 향년 65세
.사후
유럽의 위대한 극작가와 소설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같은 해에 별세했다.
장시 성 무주 (撫州)시 에는 현재 그를 기리는 건축물이 3개 존재한다. 하나는 탕현조의 묘지이고, 또 하나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관련 자료를 보존하는 ‘탕현조기념관’이며, 마지막 하나는 ‘옥명당영극원 (玉茗堂影劇院)’이다. 옥명당은 탕현조가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을 때 새로 지은 거처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사라졌고 대신 연극, 그림자연극을 상영하는 극장을 거기에 세운 것이다.

- 사상
탕현조는 명나라 후기의 인물로서 황제가 나태해지고 대신들은 사익만 챙기며 밖으로는 몽골과 왜구가 침입했지만 산업이 발전하여 시장 경제가 활발해지며 인쇄술의 발달로 서적의 유통이 증가한 당시 사회를 목격한 인물이다. 그는 사회 현실을 무시하고 인격 수양과 관료제의 정당화에만 사용되던 성리학을 비난하고, 양명학을 수용하여 개성과 욕망을 긍정하였으며, 자신의 사상을 소설과 희곡으로 표현하였다. 그 예로 <모란정환혼기>에는 자유연애와 여권 신장이라는 주제의식이 부각된다.
한편 말년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여 <남가몽기>, <한단몽> 등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주제로 하는 희곡을 집필하였다.
- 작품
탕현조의 문집 (文集)으로서는 <옥명당집 (玉茗堂集)>이 있다.
<자차기 (紫釵記)>
<모란정환혼기 (牡丹亭還魂記)>
<남가몽기 (南柯夢記)>
<한단몽 (邯鄲夢)>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