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독사신론 (讀史新論) : 신채호 한국 고대사 역사서
신채호 / 부크크 / 2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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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민족주의 사관 논문
50여차례 신문 논설로 기재했지만 미완에 그쳤다.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 것은 활발한 저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 목차
머리말
- 인종
- 지리
제1장 단군시대
제2장 부여 왕조와 기자
부론(附論)
제3장 부여족 대 발달시대
제4장 동명성왕의 공덕
제5장 신라
제6장 신라 백제와 일본의 관계
제7장 선비족 지나족과 고구려
제8장 삼국 흥망의 이철(異轍)
제9장 김춘추의 공죄(功罪)
제10장 발해국의 존망
부록.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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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신채호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한다.
1907년 신채호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1908년 신채호는 여성 계몽 잡지 『가정잡지』의 발행인이 됐고,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에 5월부터 8월까지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한다. 5월에는 『을지문덕』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다음해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출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신채호는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사상의 전파를 위해 『해조신문』를 발간한다.
1914년에 『조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신채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다음해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위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다. 또 박은식(朴殷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1919년 신채호는 임시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글을 썼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가 된다. 다음해, 보합단(普合團)의 내임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군 자금을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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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북경에서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다음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다음해 관음사(觀音寺)에서 역사 연구에 몰두한다.
1925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다음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에 그는 『조선일보』에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1936년 2월, 신채호의 나이 57세,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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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사신론 (讀史新論) 개관
- 정의
1908년 신채호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이다.
- 내용 요약
독사신론은 1908년 신채호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이다.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는데 『소년』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서론과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상세(上世)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에서 벗어나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이 식민사관에 대처하기 위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근거가 되는 역사서이다.
- 개설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 편찬/발간 경위
신채호는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
1910년 국권 회복 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는데, 이따금 표현의 차이 및 삭탈된 부분이 있다.
이를 전재하면서 최남선은 “순정사학(純正史學)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한지라……조국의 역사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해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드러내려고……이를 수록하노라.”고 평하였다.
- 서지적 사항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완결 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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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내용은 ① 단군 시대 ② 부여 왕조와 기자(箕子) · 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 · 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 · 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
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국가주의 ·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즉, 국사란 국가의 역사로서, 국가가 민족에 의해 성립된 유기체이므로 민족사가 곧 국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 주족(主族)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 성쇠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을 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부여족이 살았던 만주를 우리나라 영토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긍 의지를 뚜렷이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단군시대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 과정으로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단군의 정통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로 계승되며, 종래에 중시되던 기자 · 위만 · 한사군은 부여족의 역사에 부속시켜 서술하였다.
따라서, 기자조선에서 마한 또는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하던 정통론 사학의 고대사 인식 체계가 뒤집어지게 되었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 · 김춘추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본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 의의와 평가
이 논문에 의거해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이 식민지화된 뒤에 식민사관에 대처하기 위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애국계몽운동기에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서 싹텄음이 밝혀졌고, 민족주의사학의 발생 상한선이 올라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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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