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속에 던져진 질문들(4)

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창세기 16장 1~9절
오늘의 제목 :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세기 16장 1~9절)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던지신 질문을 묵상하는 세번째 시간입니다. 제일 처음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두 번째로는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오늘 세 번째로 나눌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이 제기된 배경은 이 앞 창세기 15장입니다. 하루는 별들이 찬란하게 비치는 깊은 밤, 하나님께서는 환상 중에 아브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하늘을 울어러 보아라. 네가 이 수 많은 별들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내가 장차 너의 자손을 이와같이 번성케 해 주리라> 그리고 성경은 아브람이 이를 믿었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시사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다고 기록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 16장,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15장에서 아브람과 하나님 사이의 믿음과 약속은 확실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이 주어지지 않게 되자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는 애굽에서 끌려온 여종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을 계획을 꾸미게 됩니다. 우리는 늘 <믿음, 믿음>하지만 사실 인간들의믿음이란 한없이 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랬는데 하물며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믿음이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사실 얼마나 유치하고 형편없는 것인지우리 양심이 우리를 증언합니다. 하여튼 그렇게 되어서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고 하갈은 임신을하게 되었습니다. 하갈에게 아이가 생기자 사래는 하갈을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학대로 까지 발전 되더니 드디어 사래는 남편 아브람의 동의를 얻어 하갈을 내쫓았습니다. 오 갈데 없는 하갈은 임신한 몸을 이끌고 광야로 도망쳐 <술>이라는 한 오아시스 곁에 이르게되었습니다. <술>이란 곳은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중간 지점인데 요즘 지명으로는 브엘세바 지역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하갈이 갈려는 목적지는 애굽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녀는 본래가 애굽여인이었고 쫓겨난 종으로써 그래도 갈수 있는 유일한 곳은 고향 땅 애굽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 술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던지신 질문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대답은 이미 창세기 3장 19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에 대해서는 앞서 하나님이 던지신 제일 처음 질문 <아담아 네가어디 있느냐?>를 살펴볼 때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이 질문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는 호칭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갈이라는여인의 신분 상태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갈은 종입니다. 사래와 아브람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라는 호칭은 하갈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신분이며 타이틀이가도 합니다. 인간이란 사실누구의 종이고, 무엇의 종인지만 다를 뿐이지, 종이라는 신분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둘째는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인데 이는 하갈의 신분 상태의 출처를 물으신 것입니다.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너의 출생, 너의 생태적 근원은 무엇이냐?>는 물읍입니다. 하갈이란 여인은 어디서왔습니까? 그녀는 근본적으로 종이었고 본래부터 노예였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하갈아,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냐?> 이 물음도 같은 성격의 질문입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너는 아마 지금 사래의 휘하에서 벗어나 애굽으로 도망치면 거기에서는 자유인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니다” 너는 애굽에 가도 여전히 종이다. 너라는 존재는 사래 아래에 있던지, 아니면 거기에서 나와 애굽으로 가던지 어디에 가서 살아도 너는 영원히 종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날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던지셨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하는 이 물음은 <영원히 종의 신분을 벗어날수 없는 인간>의 현존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에덴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이란 그 누구를막론하고 과거에도 종이었고, 현재도 종이고, 앞으로도 결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죄의 종이요, 탐욕과 이기심의 노예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면서 오늘은 <종된 우리 인간의 실상>을 살펴 볼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서 한글로 번역된 <종> <여종>이란 단어는 <노예> 혹은 <여자 노예>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slave of Sarai> 혹은 <slave-girl of Sarai>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종이나 노예는 번역상의 문제일 뿐이지 똑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어느날 공원 벤취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나는 마침내 어디로 갈 것인가?>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 하다가 드디어 해 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관리인이 공원 문을 잠그려는데 웬 사람이 벤취에앉아있는 것을 보고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공원 문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쇼펜하우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지금하루 종일 제가 어디서 왔는지 그 생각을 하던 중입니다. 선생님이 혹시 그걸 아시면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폴 고갱이 1897년에 그린 작품 중 그 유명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타히티를 배경으로 그린 대작인데 아마 사진으로라도 한두번은 보셨을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나 고갱을 비롯한많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인간의 기원와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다양한 형태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만 그들 대부분은 불가지론자들 입니다.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란 실로 어디서 왔는지 모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김현경 교수가 쓴 책 <사람, 장소, 환대>에는, 사람은 사람인데, 고대로 부터 사람으로 불러주지도않았고,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던 것에는 4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첫째는 아직 태어나지 않고 엄마 태 속에 있는 아기, 둘째는 노예로 끌려왔거나 노예로 태어난 자손, 셋째는 군인, 그리고넷째는 사형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태아와 노예, 그리고 군인과 사형수들은퍽 오랫동안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타인들로 부터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엔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사람으로인정 받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갈이라는 여인도 사람이기는 하지만 사람 취급을받지 못했던 종이였습니다. 노예의 역사는 아주 깁니다. 아마도 선사시대나 성경에서는 노아 시대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수 있을 겁니다. 하무라비 법전이나 구약성경에도 노예들의 이야기는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후 수메르, 이집트,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 이슬람과 중세시대를거쳐 근세 유럽과 아프리카에서의 각종 노예무역 시대와 18세기 미국에서의 흑인노예 해방에 이르기 까지 그 역사는 굉장히 길고 깁니다. 고대 아테네에는 전체 시민의 2/3가 노예였고 로마 역시 인구의 35%가 노예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미국 역시 18세기 독립을 전후하여 동부 13개 주에서만도 아프리카 노예들을 수입하여 공식적으로 판매하였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당시의 노예판매 광고를 보면 정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1770년 기록엔 전체 주민 중 메릴랜드주가 32%, 버지니아주가 42%, 조지아주가 45%, 사우스 캐롤라이나주가 61%가 노예였습니다. 그유명한 독립운동의 아버지들인 조지 워싱톤이나 토마스 제퍼슨 같은 이들도 수 많은 노예들을 거느린 대농장의 지주들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역사상 노예란 일종의 <생명을 지닌 도구>요, 혹은 <말 할줄 아는 도구> 라고 여기면서 가축이나 재산 처럼 취급했습니다. 노예는 소유주 개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죽이거나 폐기 하거나 양도하거나 판매 할수 있었습니다. 노예는자신의 체면이나 명예, 권리나 의무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이름이나 출생증명이나 사망 신고 같은것이 필요 없는 존재였습니다. 노예는 태어나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고 죽어도 그냥 내다 버릴뿐이지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의례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노예는 자기의 재산도 갖일수 없었으며 남편이나 아내도 들일수가 없었습니다. 소나 말처럼 그냥 어쩌다가 동거 중에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주인의 것이지 노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송을 걸거나 재판을 받을수도 없었고심지어는 피고가 될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노예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고 일종의 가축 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래의 종 하갈>도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일체의 자기 것이 없는 존재 – 생명과 재산과 자식과 인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도 갖일수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래의종인 하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날 하갈을 부르실 때, 그냥 <하갈아!> 하면서 이름만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하갈의 정체성, 하갈의 ID를 확실하게 규정하셨습니다. 아무리 아브람의 씨를 갖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도망쳐서딴 곳에 가서 산다 하더라도 <그래도 너는 종이다> <너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종이다. 너는종의 신분을 벗어날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하게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를 포함하여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종이요, 노예입니다. 우리는 물질과권세와 명예의 종들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학벌과 건강을 하나님 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노예들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탐욕의 종이요, 탐심의 노예들입니다. 입만 열면 건강, 건강 하면서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이것 저것 유투브와 카톡을 search하며 온갖 건강에 좋다는 것은 다 찿아보지만 이 또한 탐욕입니다. 아무리 건강을 향한 욕구가 차고 넘쳐도 않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만큼 산 것만 해도 감사히 여겨고 <부르시면 언제든지 가겠습니다>라고 말 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도 없고 끝도 없는 탐욕의 노예가 우리들의 신분증입니다. 아무리 내숭을 떨고 아닌척 하면서 치장을 하고 위선적으로 자신을 가리운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쩔수 없이 탐욕의 노예들입니다. 하갈은 단순히 <사래라는 한 인간의 여종> 이었을 뿐이지만 우리는 셀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탐욕의 노예들입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끝도없는 권력의 노예요, 재벌이 되어도 맘몬 신을 섬기는 물질의 종이요, 건강하게 살면서도 영생까지 갈망하는 생명의 탐욕에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100평 짜리 집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가 100평 짜리 인간이 된줄로 착각합니다. 시드니 동부 해안가에는 5천만불 짜리, 1억불 짜리 집들이 있습니다. 남태평양이 굽어 보이는 곳에 500에이커, 1000에이커가 되는 넓은 대지에 수영장과 스파와 Gym은 물론 테니스장도 있고 집안에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갖추어진 집들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런 집을 소유하고 그런 집에서 사는사람들은 만족하고 감사하느냐? 그렇질 않습니다. 커다란 저택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도 그렇게크고 높고 위대한 인간이 된 줄로 착각하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10평 짜리 지하 아파트에서 사는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신앙과 인격도 작고 보잘 것이 없는 게 아니듯이 천평 짜리 저택을 갖고있는 부자라고 해서 그의 신앙과 품격이 본받을 만한 것도 아닙니다. 열명, 이십명 모이는 작은교회에서 목회하는 이는 수준이 고만고만하고, 만명, 십만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역자는 진정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종이요. 노예들입니다. 종과 노예 사이에선 그게 그것이고 오십보, 백보일 뿐입니다. 비슷하거나똑같은 신분을 지닌 인간들 끼리 <누가 누가 더 크냐?> 시합하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하는 것과같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이니, 나의 기업이 실로 내 마음에 흡족합니다. 시편 16:6>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다윗이 아무 것도 없던 시절에 고백했던 노래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질 발견하게 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갈은 현실을 도피하고 있습니다. 학대와 슬픔, 억울함과 좌절을 견딜수가 없었겠지요? 하갈은 현실과 상황을 도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녀는 노예의 신분이기에 당연히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삶의 자리를 바꾼다고 해서그의 본래적 신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는 여기서 살아도 노예고 저기 가서 살아도 노예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로 가려느냐?> 하신 물음이 바로 그걸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애굽으로 간들, 고향 땅으로 돌아가 본들, 너는 종의 신분, 노예의 처지를 벗어 날수 있다고 보느냐?>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갈아, 돌아가라. 네 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라.> <돌아가라>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너하갈이란 존재는 종이다, 노예다. 너는 너의 본래적 신분과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네가 종이요, 노예라는 사실을 받아드리고 거기에서 다시 출발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사래 밑에서 살든, 애굽으로 내려 가서 살든, 종이요 노예라는 천한 신분에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가져 올수 없는 존재이니 도망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돌아가서 현실을 받아드리고 그 현실을 극복해 내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철없는 사춘기 10대 청소년들 처럼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무작정 가출만 한다고 해서 신분 상태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듯이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서 주어진 현실을 희망과축복,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드리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보다 나은 종, 아름다운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부터는 사래의 종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들에게 대입해 봅니다. 권력과 물질과 명예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의 종, 말씀의 종, 복음의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종이라고 해서 다 똑 같은 종은 아닙니다. 종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마귀의 종도 있고 하나님의 종도 있습니다. 거짓의 종도 있고 진리의종도 있습니다. 탐욕의 종도 있고 사랑과 섬김의 종도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럼 <누구의 종이 될 것인가?> 우리는 <사래의 여종 하갈>로 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쫓기고 도망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하갈은 그 날 거기 도피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천사, 아니 하나님 자신을 만났습니다. <인생길에서 누구를 만나느냐>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결정해 줍니다. 참 다행스럽게도 그날 하갈은 하나님을 만났고 우리 역시도 이 험한 인생길, 이 노예와 같은 인생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건 우리가 찿아가서 만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갈과 우리를 찿아 오셔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면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하갈을 만나주신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라 네 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라> 하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침내 그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은 무슨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사래의 종이 아니라 이제 부터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부터는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할 것이며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종으로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드디어 하갈은 입을 열어 자기에게 나타나신 새로운 주인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에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가 함이라, 13절>
말씀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더 강조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주인을 바꾼 하갈>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하갈은 더 이상 사래의 종이 아닙니다. 그녀는 새로운 주인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주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래에게서 도망치다 보니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주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희들의 진정한 주인이냐? 진정 너희는 누구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냐?> 우리는 대답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주인의 종들입니다> 사래가 더 이상 하갈의 주인이 아닌듯이 우리에게도 권력이나 재물,명예나 탐심이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주인이 될수도 없고 되어서도 않됩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주인, 참되고 영원한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 놀랍게도 주께서는 당신을 주인으로 삼는 자는 더이상 종이 아니요 자유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8:32> <나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 요한 15:14-15> 우리 모두는 이제 이후로 영원토록주님의 종이요, 말씀의 종들로만 살아갈 것입니다. 진실로 거기에는 참되고 영원한 자유가 있기때문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주 말씀 하시길 쇠사슬 끊겼네. 우리 자유 얻었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자유인입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