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추석과 장막절의 영적 의미 (출 23:15-16)
한국은 내일, 10월 6일이 추석입니다. 추석 전후인 5-7일까지 휴일입니다. 오늘 5일이 주일이라서 8일을 대체 공휴일로 정하고, 9일은 한글날이라서 쉬게 되어 한국은 10월 3일 (개천절)부터 10월 9일까지 7주일간 연휴입니다.
추석은 이스라엘의 장막절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감사하며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모여 나누고 기뻐하는 명절입니다.
한국에는 3대 명절이 있습니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단오입니다. 단오는 음력으로 5월 5일입니다. 단오는 현대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전통적으로는 설과 추석 못지않게 중요한 명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세 가지 큰 절기가 있습니다. 이 절기는 역사적 의미와 농경적 의미가 동시에 있습니다. 유월절 출애굽한 날이고, 보리를 추수하는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고 밀을 추수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장막절은 광야의 장막 생활을 기억하고, 가을의 과실을 수확하는 절기입니다. 장막절은 또 다른 이름으로 수장절, 초막절입니다.
오늘은 이름을 중심으로 추석과 장막절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기억의 절기 (장막절, Feast of Tabernacles)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유랑하며 살았습니다. 장막은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임시 거처였으며, 안정감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연약한 집이었습니다. 뜨거운 햇볕과 추운 밤,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장막은 결코 완벽한 집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안정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어둠을 비추셨습니다. 하늘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그들의 배를 채우셨고, 사십 년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게 지켜 주셨습니다(신 8:4).
장막절은 바로 이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장막 속에서 살면서, 그 장막 안에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장막은 비록 약했으나,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강하셨습니다. 그래서 장막절은 단순한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삶 속에 장막을 치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의 절기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며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광야와 같은 현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건강의 위기, 관계의 갈등 속에서 우리의 삶은 쉽게 흔들리는 장막처럼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장막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건물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일상 속에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 감사의 절기 (수장절, Feast of Ingathering)
장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수장(收藏)’이라는 말은 곡식을 거두어 저장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농사 일정에서 수장절은 올리브, 포도, 대추야자 등 가을 수확을 마무리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곡식과 과실을 거두어 저장하며, 모든 수확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수장절은 풍성한 결실을 감사하며, 생명의 공급자 되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절기였습니다(출 23:16).
이스라엘 백성은 함께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감사는 단순히 농부의 수고와 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추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해의 결실을 기뻐하며 가족과 함께 나누는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우리는 단순히 풍요를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풍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숨 쉬는 것, 건강을 유지하는 것, 일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얻은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손에 열매가 맺힌 것은 단순한 인간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그 태도는, 또 다른 기적을 불러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설교의 황제’라고 불립니다. 그는 “별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히 지지 않는 주님의 은혜의 빛을 주신다.” 다고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감사 십계명’을 남겼습니다.

– 스펄전의 감사 십계명
1)생각이 곧 감사다
“Think”와 “Thank”는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은 깊은 감사를 낳는다. 생각하면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데로 생각할 것이다.
2)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바다도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된다. 사소한 것에 감사하면 큰 은혜를 보게 된다.
3)자신에게 감사하라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는 별과 산을 보고 감탄하면서 정작 자신을 잊는다.
4)일상을 감사하라
숨 쉬는 것, 맑은 하늘을 보는 것—당연하지 않은 은혜에 눈뜨기.
5)문제를 감사하라
문제는 해결책을 품고 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는 길을 연다.
6)더불어 감사하라
장작은 함께 있을 때 더 잘 탄다. 공동체의 감사는 배가된다.
7)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결과를 보고 감사하는 것보다 문제 앞에서 드리는 감사가 더 아름답다.
8)잠들기 전 감사하라
하루의 끝에 감사를 드리면 영혼이 정화된다.
9)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감사는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감사한 대로 이루어진다.
10)모든 것에 감사하라
우리의 삶에서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
어릴 때 4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옆에 있는 수많은 3잎 클로버를 밟은 적이 있습니다. 4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4잎 클로버의 발견하고 몸을 숙였을 때 바로 그 순간, 적군의 총탄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났습니다. 이 일화가 퍼지면서 4잎 크로버는 행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3잎 클로버는 꽃말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운’을 찾다가 ‘행복’을 잃어 버립니다. 우리는 ‘특별한 행운’을 찾기 위해서 ‘일상의 행복’을 짓밟고 다닙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얼마도 소중한 것인지를 잊고 삽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 지를 모르고 흘려보냅니다.
- 기쁨의 절기 (초막절, Feast of Booths)
장막절은 ‘초막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초막절에는 백성이 실제로 초막을 지어 그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단순히 개인적인 즐거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초막절은 공동체적인 축제였습니다. 온 백성이 함께 모여 초막을 짓고,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예배했습니다. 신명기 16장은 남녀노소는 물론, 종과 객, 고아와 과부까지도 모두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초막절은 차별 없는 공동체의 기쁨,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하나 되어 누리는 기쁨의 절기였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초막절은 공동체의 회복을 가져왔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율법이 낭독될 때,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며 동시에 기쁨을 회복했습니다(느 8:13–18). 말씀을 들으며 잊었던 신앙을 되찾고, 공동체적 회개와 기쁨이 회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과 예배를 통해 기쁨을 되찾는 절기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초막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실제로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전통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기억하는 신앙적 실천이며, 공동체적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표현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집의 마당이나 발코니, 옥상에 나뭇가지로 지붕을 만든 임시 구조물을 세우고, 그 안에서 식사하고 기도하며 때로는 잠을 자기도 합니다. 초막은 하늘이 보이도록 지붕을 만들고, 아이들이 만든 장식이나 성경 구절로 꾸며집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는 초막절 기간 동안 거리와 공공장소에 초막이 세워지고, 회당과 광장에서도 공동 초막이 마련됩니다.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노래와 춤으로 기쁨을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시대의 물 붓는 의식을 재현하는 행사도 열리며, 통곡의 벽 주변에는 수많은 초막이 들어섭니다. 2025년의 초막절(수콧)은 10월 6일 월요일 해질녘부터 10월 13일 월요일 저녁까지입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 초막절의 의미를 이어받은 자리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 함께 나누고 함께 기뻐할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예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임과 나눔과 기쁨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장막절이 보여주는 기쁨은 단순한 감정의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기쁨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말씀을 마칩니다.
추석과 장막절은 단순한 전통 절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 영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첫째, 기억의 절기입니다. 광야의 장막 속에서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광야와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둘째, 감사의 절기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결실은 내 손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자만이 진정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으며, 그 감사는 나눔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셋째, 기쁨의 절기입니다. 오늘 교회는 바로 그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미리 살아가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기억과 감사와 기쁨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가 추석과 장막절의 영적 의미로 가득 차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이 열릴 때 (마태복음 3:16–17 / 사도행전 7:55–56 / 요한계시록 21:1)
10월 3일은 개천절입니다. 개천절(開 天 節)은 하늘이 열린 날입니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하늘이 열린 날’로 기억되는 이 날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날로, 민족의 시작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경에도 “하늘이 열릴 때”라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늘의 시간이 땅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특별한 순간을 뜻합니다.
헬라어에는 두 가지 시간이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이며 객관적인 시간으로, 수평적인 땅의 시간입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질적이며 주관적인 시간으로, 수직적인 하늘의 시간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시작됨을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세례에서, 스데반의 순교에서, 그리고 요한의 환상 속에서 하늘이 열렸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이 세 장면을 살펴보면서, 우리 삶 속에서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예수님의 세례 – 정체성이 확증됨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며,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감당하실 분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딸이다.”
‘자아 정체성’란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다.” 그 음성이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심리학에 ‘로젠탈 효과’가 있습니다. 무작위로 학생들을 선발해서 한 반에는 교사에게 우수한 학생이라고 하고, 다른 반에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했습니다. 교사가 우수한 학생이라고 한 반은 교사의 긍정적 기대가 학생의 성취를 이끌어냈습니다. 로젠탈 효과의 반대인 ‘낙인 효과’는 부정적 기대가 사람을 억누르는 현상입니다. 누군가를 긍정적으로 바꾸려면 부정의 말을 쓰지 말고 긍정의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지적을 하지 말고 인정을 해 주셔야 합니다.
사람은 두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흑조와 같은 검은 마음과 백조와 같은 하얀 마음입니다. “양가감정(ambivalence)”은 단순한 감정의 혼란이 아니라,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깊은 인간 경험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애증’입니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감정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감정입니다.
흑조와 백조의 우리 마음에서 속에서 계속 갈등을 일으킵니다. 두 마음 중에 누가 이기는 줄 아십니까? 주인이 믿어주고 인정하는 쪽이 이깁니다.

- 스데반의 순교 – 고난 속에서도 위로가 임함 (행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사도행전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직전,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보통 성경은 예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 주님은 스데반을 맞이하시기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세상은 스데반을 버리고 돌을 던졌지만, 하늘은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결코 자녀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살면서 늘 상좌석에만 앉았고, 대접 받는데 익숙한 목사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집사가 천국에 오면 주님이 멀리서부터 일어나 맞이하시고, 장로가 오면 가까이 왔을 때 일어나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오자 주님은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목사가 따지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일어나면 네가 앉을까 봐 앉아 있었노라.”
사람들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이 마치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교인이 늘 교회 청소를 자발적으로 해왔습니다. 모두가 고마워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분이 하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아프셔서 못 나오자, 몇몇은 “왜 오늘은 청소를 안 하는 거야?”라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그 순간, 그분의 호의를 자신들의 권리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윷놀이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설날과 추석에는 매년 준비하는 조용석 부교님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조 부교님은 몇 주 전부터 준비합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매년 준비합니다. 만약 조부교님이 준비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왜 올해는 준비하지 않는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딸이 오늘 아침 Full Course 마라톤을 뛰었습니다. 2주전 하프 마라톤은 뛰었지만, Full Course는 처음입니다. 어제 저녁에 마라톤 경험이 많은 동료 교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마라톤에서 ‘마의 거리’는 30Km 지점이라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 에너지 고갈을 경험합니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정신력 싸움이 시작됩니다. 동료 교수는 그 때 “나는 왜 마라톤을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릉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 4:7-8절) 고백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마의 거리’를 지나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질문하여 보시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 요한의 환상 – 소망이 완성됨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요한은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고, 다시는 사망도, 고통도 없는 세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종말은 칼의 양날과 같습니다. 한쪽 날은 최후의 심판이고, 다른 날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종말은 세상의 파괴로 끝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지난 목요일, 박조향 부교님의 1주기 예배를 룩우드에서 드렸습니다. 공교롭게도 부교님이 소천하신 날과 제 생일이 같습니다. 추모 명패에는 출생과 소천하신 날짜, 그리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살았단 삶에 대해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박 부교님은 마지막까지 감사와 충만함으로 고백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잘 사는 웰빙(Well-Being)과 잘 죽는 웰다잉(Well-Dying)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합니다. 어떡하면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겠습니까?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하면 됩니다. 만약 이유가 다르다면 죽음 앞에서 살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늘이 열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았습니다. 지금 예배 드리는 이 시간, 우리 교회에 하늘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사람이 정체성을 회복하고, 고난 가운데에도 위로를 받고,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오늘을 살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다 같이 일어나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 교회에 하늘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성을 붙들게 하시고, 스데반처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위로를 바라보게 하시며, 마지막 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향해 성실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드니의 세 가지 대표 건축물
시드니의 세 가지 대표 건축물—하버브리지, 오페라하우스, 시드니 타워—은 단순한 도시의 구조물이 아니라, 호주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의 상징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각각의 건축물은 특정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그 과정은 도시의 성장과 사람들의 염원, 기술적 도전,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하버브리지는 1932년에 완공되었다.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기였지만, 시드니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려는 염원은 도시 전체를 하나로 묶는 상징적 다리로 이어졌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고, 이 다리는 단순한 교통 인프라를 넘어 공동체의 결속과 회복의 상징이 되었다.
철제 아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도시를 잇는 모습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떠올리게 한다.
에베소서 2장 14절의 말씀처럼, 하버브리지는 화해와 연결의 상징이다.

오페라하우스는 1973년에 완공되었다.
그 시작은 1957년의 국제 설계 공모였다.
덴마크 건축가 욘 우츠손의 독창적인 설계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였고, 공사 과정에서 기술적 난관과 정치적 갈등이 이어졌다.
결국 우츠손은 중도에 프로젝트를 떠났지만, 그의 비전은 남아 오페라하우스는 세계적인 예술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조개껍질 혹은 돛을 연상시키는 지붕은 찬양의 손길처럼 펼쳐져 있고, 그 안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은 시편 96편의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말씀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 건축물은 예술과 예배, 창조성과 공동체의 고백이 만나는 공간이다.

시드니 타워는 1981년에 완공되었다.
도시의 중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타워는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갖추고 있으며, 관광객뿐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도 시드니의 지형과 구조를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한다.
성경에서 높은 곳은 종종 하나님의 시선, 예언자의 자리, 기도자의 망대로 상징된다.
시편 119편의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구절처럼, 시드니 타워는 공동체의 방향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존재다.
골로새서 3장 2절의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이 타워의 묵상적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든다.
이 세 건축물은 시드니라는 도시의 물리적 구조를 넘어,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징한다.
하버브리지는 관계의 회복과 중보의 다리로, 오페라하우스는 찬양과 창조적 표현의 공간으로, 시드니 타워는 통찰과 기도의 자리로 해석될 수 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