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호 목사의 컬쳐 스테이지(Culture Stage)
졸혼(卒婚)의 시대가 다가온다
– 결혼을 졸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언젠가부터 한국의 어른들 사이에 늘어나고 있는 새로운 풍속이 있다고 합니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의 ‘졸혼’입니다. 학교를 졸업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결혼을 졸업한다는 이 새로운 풍속은 왜 이렇게 늘어나고 있는 걸까요?
“36세에 결혼한 후 1남 1녀를 낳았고 40여년 결혼생활을 이어왔다. 그리고 ‘졸혼’했다.” 지난해 11월 배우 백일섭(73)은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자신의 ‘졸혼’(卒婚)을 고백했습니다. 졸혼이란 ‘결혼을 졸업한다’라는 뜻으로 이혼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혼인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념으로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신 풍속이기도 합니다. 이런 ‘졸혼 코드’는 문화계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는 황혼이혼과 이로 인한 고독한 삶이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졸혼에 대한 대중들의 긍정적인 시선도 한몫한 것으로 풀이합니다. 한 결혼정보회사가 회원 54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졸혼에 대한 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57%가 ‘졸혼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10명 중 6명(57%)이 ‘결혼생활 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노후에라도 하고 싶어서’라는 항목을 꼽았습니다. 결국, 결혼 생활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후회로, 엄마로써 아내로서써, 남편으로써 아빠로써 살아는 왔지만 정작 자신으로써 살지 못했던 인생을 후회하며 이제라도 남은 인생을 자신을 위하여 살아야 겠다는 도전을 시작한 것입니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0년 55건이던 사실혼 확인소송은 매년 꾸준히 늘어나 4년 만에 2배가량 증가했다고 합니다.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간 분쟁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반혼 커플이 늘었다는 방증입니다. 젊은 세대가 반혼을 선택하는 것은 살아 보고 혼인신고를 하겠다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실리 추구형인 셈입니다. 물론 아예 혼인신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자녀계획이 없는 커플이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나이 든 커플의 경우에는 자식의 반대로 혼인신고를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혼인신고를 하게 되면 상속 우선 순위가 밀리게 되는 자식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반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실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걸 보면 사실혼, 즉 반혼에 대해서도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르면 회원국의 사실혼관계 출산율이 1980년 11%에서 2007년 33%로 3배 증가했습니다.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전통적 의미의 결혼이 필수가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들에게도 이 생각은 확산되고 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결혼풍습이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졸혼은 이혼하는 대신 결혼기간 중 짊어졌던 서로간의 의무에서 벗어나 결혼생활은 유지하되 보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퇴직한 남편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아내는 도시에서 생활을 하면서 한 달에 몇 번 만난다거나, 같은 집에서 살지만 남편은 사진 찍는데 시간을 보내고 아내는 수공예를 시작해 각자 취미생활에 몰두하면서 사적인 것은 터치하지 않는식입니다. 졸혼은 부부나 부모로서의 역할은 유지하면서 일종의 합의된 별거 생활을 하거나 같이 살아도 서로간의 사생활을 완벽히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은 “여전히 이혼하기엔 심리적 부담이 큰 우리나라 상황에서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을 덜며 자신을 위해 여생을 살 수 있다는 점이 졸혼을 선호하는 요인으로 꼽힌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에 따라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화계에서는 졸혼을 다룬 콘텐츠를 앞다퉈 선보이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된 이야기로 등장한데 이어 ‘졸혼남’의 이야기를 다룬 예능방송이 방영을 시작했고, 관련 서적도 출간돼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2008년 KBS ‘엄마가 뿔났다’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살아온 김한자(김혜자 분)가 주부로서 휴업을 선언하고, 시아버지의 허락을 구한 후 남편과 자녀를 뒤로 하고 가정을 떠날 때만 해도 ‘드라마니까 가능한 일’이라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와 최근 방영 중인 KBS ‘우리 갑순이’ 등에서 ‘졸혼’ 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중년층 이상 시청자들의 공감 코드로 떠오른 것입니다.
‘우리 갑순이’에서 40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온 신중년(장용 분), 인내심(고두심 분) 부부는 오랜 갈등을 못이기고 이혼 직전까지 갑니다. 하지만 그동안 쌓인 정으로 인해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했고 부부는 끝내 법적으로는 부부를 유지하고 한집에 살면서 친구처럼 지내는 졸혼을 선택합니다. 또한 3월 첫 선을 보이는 KBS 주말극 ‘아버지가 이상해’에서도 졸혼을 주장하는 부모 세대와 결혼 인턴제를 내세우는 신세대 자녀들의 새로운 결혼관을 비교합니다. 2월 22일 첫 방송을 한 KBS 2TV 예능 ‘살림하는 남자들 2’에서도 아내와 떨어져 70대의 싱글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배우 백일섭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졸혼의 실상을 공개했다. 직접 살림을 하며 ‘혼밥’과 ‘혼술’을 즐기는 백일섭의 자유로운 삶을 낱낱이 공개함과 동시에 혼자 살게 되면서 겪는 어려움도 함께 다루며 졸혼의 민낯을 보여줄 예정입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출판계에서도 졸혼 관련 서적이 발간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2014년에 발표된 졸혼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스기야마 유미코’(杉山由美子)의 ‘졸혼 시대’(원제 ‘졸혼을 권함’)가 우리말로 번역돼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졸혼을 실천한 부부 여섯 쌍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는데 책에선 가족의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인생 후반전’을 긍정적으로 보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점이 졸혼의 장점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동거 대신 별거를 할 경우에는 부부가 따로 살아가기 때문에 주거비, 생활비가 이중으로 발생하는 등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단점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가족 구조의 변화에 따라 졸혼의 장단점을 살필 수 있는 방송 제작과 관련 서적 출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졸혼을 결혼에서 해방된다는 뜻으로 ‘해혼(解婚)’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은 결국 결혼은 구속과 속박이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