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무 목사의 주일묵상
사악한 정치권력을 보며
정치권력은 인간이 만든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장치다. 권력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통제되지 않은 권력은 반복해서 사악함으로 기울어져 왔다. 역사는 이를 예외 없이 증명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황제 네로는 권력을 사유화하며 공포 정치로 제국을 잠식했다. 20세기에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국가 권력을 통해 대량 학살과 체계적 폭력을 합리화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개인의 악의보다도 제도화된 권력이 도덕을 압도했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정치권력이 얼마나 쉽게 일상의 폭력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치권력이 사악해지는 순간은 대개 3가지 조건이 겹칠 때이다. 첫째, 권력이 집중될 때. 둘째, 비판과 견제가 제거될 때. 셋째, 국가나 안보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될 때이다. 이때 권력은 스스로를 절대 선으로 규정하고 반대자를 적으로 만든다. 역사는 이 구조가 반복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국민의 투쟁 방법은 무엇인가. 폭력은 가장 직관적인 대응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를 외쳤지만 곧 공포 정치로 전락했고 무장 혁명은 새로운 억압 체제를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효과적이었던 투쟁은 대부분 권력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시민 불복종, 동유럽의 평화적 민주화는 권력이 유지되는 핵심과 복종 그리고 침묵을 흔들었다. 권력은 총보다도 시민의 동의에 더 의존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정확히 꿰뚫었다.
투쟁은 단번에 승리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루하고 느리며 때로는 무력해 보인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 사법의 독립, 시민사회의 연대, 기억의 기록은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요소이다. 잔악하고 타락한 권력은 빛보다 어둠에서 강해지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의 사악함은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인간이다. 질문하고, 기록하고, 연대하는 일. 그것이 거창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역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방향을 바꿔왔다. 투쟁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각성과 참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안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 중 한 명으로, 정치권력, 전체주의, 자유와 인간 책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긴 학자>

한상무 목사
(시드니생명나눔교회, smhan21@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