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45)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 아모스서(7)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무엇인가
지난주에 필자는 아모스서의 ‘다윗의 무너진 장막’ (9:11)은 무너진 다윗의 가문 (家門)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좀더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왕이라고는 더이상 볼 수 없었던 쇠락한 다윗 가계 (家系)에서 요셉과 같이 경건하고, 마리아 같이 신실한 자들을 통해 왕을 일으키셨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한데, 마태는 요셉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기록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0, 21) 이 사자의 전언 (傳言) 속에는 ‘다윗 언약’이 메아리쳐 울린다.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대상 17:12-14) 흥미로운 것은 누가는 이 주의 사자를 가브리엘로 명시하고 있고, 마태와는 달리, 마리아에 포커스를 맞추어 같은 기사를 달리 우리에게 전한다. 누가는 마리아를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로 소개하고, 가브리엘이 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 전하는 말을 기록한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눅 1:32, 33, 35) 보도하는 저자의 시각은 차이가 있고 의도도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같다. 하나님께서 퇴락한 다윗의 가문에서 영원하신 왕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에게 잉태되셨고 그는 구원자이시다. 사가랴는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68) 시므온은 이 구원자의 구원 대상이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함을 말한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라.” (2:30, 31) 이는 아모스가 메시야의 사역을 말할 때 (9:11), 이스라엘 족속의 구원 (9:8, 9, 14)과 이방인들의 구원 (9:12)을 함께 말하는 것과 같다.
다윗의 장막 회복, 하나님 구원사의 핵심
다윗의 무너진 가계를 하나님은 다시 일으키셨고 이 가계를 통해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셨다. 손가락으로 살짝 건들어도 넘어갈 것 같은 간이건축물 ‘부쓰’ (booth), 원두막, 초막 (‘쑤콧’) 같은 몰골로 살아가던 유다 지파의 사람들, 수백년간 이 나라 저 나라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린 사람들, 쫓겨다니고 짓밟힌 사람들, 다윗이 왕이었던 사실조차 가물가물 잊어버렸을 그 후손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여호와를 기다리며 소망을 간직한 사람들, 이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셨고 약속대로 왕을 일으키셨다. 백향목 궁에 거한 자기 자신과 ‘커튼들 (휘장들 혹은 장막들, ‘예리오트’ 대상 17:1; ‘예리아’ 삼하 7:2) 아래 혹은 가운데’ 안치된 여호와의 언약궤 혹은 하나님의 그 궤 (아론 베리트 여호와; 아론 하엘로힘)를 번갈아 보면서 죄송한 생각에 하나님을 위해 멋진 집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의 결심과는 다른 방향의 말씀을 하시고, 그러나, 복된 약속들을 주셨었다. 이 약속들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실 ‘왕’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사야 등 모든 선지자들이 이 ‘왕’을 기다렸다. 물론 아모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바로 이 ‘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에게 절하던 사람들, 신전 창기들과 음행을 해대던 사람들, 빈자를 착취한 돈으로 삼일마다 십일조를 바치던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며 아모스는 탄식 속에만 침잠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실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것들의 틈을 막으실 주님을 바라보았다.
아모스의 시대와 같은 현시대에서
현시대는 아모스의 때와 다르지 않다. 그 시대에 귀신들과 영교 (靈交)하였는데 요새는 대놓고 사탄과 영교한다. 아모스 때에 음풍 (淫風)으로 온 이스라엘이 더러웠는데 지금 한국은 온세계에 음란 문화를 팔아먹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군대가 기도와 금식으로 싸우니 마귀도 더많은 음란 귀신들을 한국으로 보낸다. 아모스 시대에 부자들이 사치 방탕하고 빈자들을 압제하였는데 지금은 세계의 부가 소수의 사람들에 편중되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 이때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며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다윗 언약의 완전한 성취를 바라보는 것밖에는 우리가 바라볼 것이 없다. ‘왕’의 오심 밖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왕의 군대로서 현실 속에서 성실히 싸울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딤후 4:7).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