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의에 주리고 박해를 받는 자의 복
오늘은 8복의 마지막 복입니다. 다음주는 종려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은 부활절입니다. 그 다음 주일은 개영 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019년 4월 14일. 콩코드에 있는 구세군 사택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선포하신 팔복 가운데 마지막 복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전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복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대상은 부유한 사람도 아니고, 성공한 사람도 아니며,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단순히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지 않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난이 다 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함께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왜 의를 따라 살면 박해가 따르는가?
셋째,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복된가?

- 의를 위하여 산다는 것
예수님은 분명히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의’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의는 단지 도덕적인 선행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의는 인간이 자기 기준으로 정한 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길입니다. 오늘날 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점점 더 진리를 상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절)
자기 의는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에 관한 ‘행위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신 일을 믿는 ‘믿음의 의’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를 증명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종교입니다.(눅 18)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관계적 의로서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11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의란 곧 예수’입니다.
지난주에 성경에 아히멜렉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히멜렉(삼상 21,22) 아히멜렉은 사울 왕의 시대에 놉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히멜렉은 사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도망쳐 온 다윗에게 하나님께 묻고, 먹을 것을 주고, 골리앗의 칼까지 내어주며 생명을 살리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선택 때문에 그는 결국 사울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성경은 그의 행동을 의로운 제사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고,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 의를 위하여 살면 세상과 충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난은 언제나 세상과 충돌하는 자리에서 생겨납니다.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가면 큰 충돌 없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잘못을 보며 그 흐름에 역행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고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왜곡된 시대를 바로잡으려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감수하며 앞서 걸어갔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용기가 쌓여 세상은 조금씩 더 밝아지고, 조금씩 더 정의로워졌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옳은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찬양한 곡인 ‘Amazing Grace’는 세계인이 좋아하고 잘 알려져 있는 찬송가입니다. 작시를 한 사람은 ‘존 뉴턴’입니다. 그는 노예상인으로 살다가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회개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2007년 Amazing Grace란 영화가 출시되었습니다. ‘존 뉴턴’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국 국회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활동한 정치가로,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이 되었지만, 회심을 경험한 뒤 자신의 정치적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노예무역을 끝내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의회에서 끊임없이 법안을 제출하며 싸워 나갔습니다. 누구보다 노예제도의 잘못을 잘 알고 있는 뉴턴은 그가 좌절했을 때 멘토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
그의 노력은 수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그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앙적 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1807년, 영국 의회는 노예무역 폐지법을 통과시켰고, 이는 세계 인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특수부대 출신이며 친 트럼프 지지자인 미국 국가대테러센터(NCTC) 책임자 조 켄트(Joe Kent)가 2026년 3월,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전쟁 개시에 항의하며 전격 사임했습니다. 그는 “양심상 이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고 밝히며, 전쟁이 이란의 실제 위협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압력과 잘못된 정보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작금에 한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들이 국회에 상정되고 있습니다. 법을 바꾼다는 것은 개인을 처벌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국가의 사회 구조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국회의원 중에 가톨릭을 포함해서 약 40%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앙양심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념이 다르면 많은 갈등과 번민을 하게 됩니다. 과연 이들 중에 속한 당의 이념보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되는지 궁금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 의를 위한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표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초대교회 시대에 결코 가벼운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3번 나옵니다. 사도행전 11:26, 26:28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4:16절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자신의 실수나 악행 때문에 오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벧전 1: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시련이란, 예수를 믿고, 믿음을 지키며, 믿음을 전파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뜻합니다.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복된 일입니다. 핍박이 곧 내가 예수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표식입니다. 사람은 핍박을 받을 때 진짜와 가짜가 갈라집니다. 어려울 때 우리와 함께한 사람이 진짜 친구입니다. 자신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후 13: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시험은 우리 스스로를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세상으로 반응하면 세상의 사람이고 믿음으로 반응하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8복의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첫째 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둘째, 왜 의를 따라 살면 박해가 따르는가?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이 다르기에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복된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8복의 첫 번째 복도 천국이고, 마지막 8번째 복도 천국입니다. 천국이 임한 상태는 로마서 14: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로 인하여 우리가 거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면 세속화이고,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면 선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선교사입니다.
참고)
지금 1500만명의 관객을 향하여 순항하고 있는 ‘왕과 사는 남자’란 영화가 있습니다. 시드니에서도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조선 6대 왕 단종과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촌장 엄흥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엄흥도는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았습니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하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 속에 침묵했고,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못했습니다.
주인공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흩어져 오랜 세월을 숨어 지내야 했지만, 후대에 그를 충신으로 기렸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의로운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동은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문경의 엄흥도의 묘지와 동상이 있습니다. 그곳은 엄씨 집성촌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마 5:9)
2026년 지금, 세계는 다시 한 번 깊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대규모로 공습하며 전쟁이 본격화되었고, 이란은 즉각 미사일과 드론으로 보복했습니다. 중동 전역이 불타오르고,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선박 피격이 이어지며 국제 경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가 불안과 공포 속에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화평을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가정에 평안이 있기를 원하고, 교회가 평안하기를 원하고, 나라가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Troublemaker, 문제를 만들고 갈등을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립니다. 굳어 있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잇고, 상처 난 마음을 감싸 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로 상처를 깊게 합니다. 꺼져가는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름을 붓습니다. 오해를 풀기보다 더 크게 만들고, 갈등을 줄이기보다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한국 속담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등이 생기면 더 커지지 않도록 중재하고 말리고, 거래나 협상은 서로 잘 되도록 도와주고 연결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갈등은 막고, 협력은 돕는다는 아주 실용적인 지혜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Peacemaker’입니다. Peacemaker는 단순히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노포이오스(εἰρηνοποιοί)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화평이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 평화를 만들어가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지 조용한 성격의 사람을 복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을 복’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 화평은 관계의 회복
성경에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하나님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리고 나와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관계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간은 사이 간입니다. 사이는 관계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수평적으로는 이웃과의 사회적인 관계, 내적으로는 나와의 심리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가정 속에서 관계하고, 교회 속에서 관계하고, 사회 속에서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관계가 건강하면 삶이 건강해지고, 관계가 흔들리면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관계가 깨어질 때 갈등이 생기고, 관계가 온전할 때 평화가 옵니다. ‘너와 나’의 저자 마틴 부버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존재의 본질을 관계 속에서 이해하였습니다.
하버드 대학교는 약 75년이 넘는 시간 724명의 사람에게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연구를 이어왔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진은 수백 명의 삶을 오랜 세월 추적하며 건강, 관계, 직업, 감정, 생활 습관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 긴 연구의 결론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관계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관계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세족식을 마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 화평은 자기 부인
우리는 어떻게 갈등을 넘어 화평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화평은 그냥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침묵이 오해를 더 키울 때도 있습니다.
1.화평은 상대를 존중하고 문제를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자꾸 사람을 문제 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 “저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이 문제야.” 이렇게 사람을 공격하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과 문제가 뒤섞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다툴 때 “당신이 문제야”라고 말하면 싸움은 깊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지금 풀어야 할 문제가 있어”라고 말하면 함께 해결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다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이고,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은 ‘수치심’을 주는 것입니다. 행동에 대하여 지적을 받을 때는 고칠 수 있지만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는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습니다. 행동은 지적할 수 있지만, 존재는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죄는 다루셨지만, 사람의 존재는 존귀하게 하셨다.
2.화평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됩니다. 화평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종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등이 더 커지기 전에 직접 롯을 찾아가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갈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 아니냐. 우리 사이에 다툼이 없게 하자.” 그는 땅이나 재산보다 가족 관계가 먼저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누가 더 좋은 땅을 차지하느냐’보다 ‘우리가 어떻게 화평을 지킬 수 있느냐’가 더 큰 관심이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나이가 더 많았고, 약속의 주인공이었고, 문화적으로도 우선권이 있었지만, 그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선택권을 롯에게 먼저 주었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평화가 없다.
- 화평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화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품으시고, 원수 되었던 자를 자녀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얼굴을 닮기도 하고, 습관을 닮기도 하고, 성품을 닮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의 사람이 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1850년에 발표된 미국 소설가 호손이 쓴 ‘큰바위의 얼굴’이 있습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이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소년 어니스트는 이 전설을 마음에 품고 자라면서, 매일 큰 바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부자도 오고, 장군도 오고, 유명한 정치가도 왔지만, 어니스트는 그들이 큰 바위의 얼굴과 닮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니스트는 실망하지 않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인이 어니스트를 바라보며 그가 바로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어니스트는 오랜 세월 큰 바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인자함과 지혜를 마음에 새기고 살아왔고, 결국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니스트는 위대한 일을 해서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위대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 마음을 닮아가려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분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말씀을 마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모두가 Peacemaker가 되어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우리로 인하여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칭찬받는 삶을 사시를 축복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