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걷는 기도

걷는 기도 (20)
차가운 봄비가 안경의 창을 두드립니다
지난 잔해를 씻어 내는 것인지
새순을 깨우는 통증인지 알 수 없는
수직의 낙하, 오늘 그 빗줄기 사이로
오래된 생의 한 계절을 갈무리합니다
돌아보면 사역의 길은
늘 질문의 연속이었습니다
‘시작’은 당신의 부르심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빛이었으나
‘끝’은 결국
그 빛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해
투명하지 못한 그림자를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
그 광활한 여백 위에서
얼마나 자주 당신의 침묵을
불경스러운 언어로 곡해하여
당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처럼
눈부신 고통이었습니다
당신은 결코 내가 만든
교리의 상자 안에 머물지 않으셨고
가장 낮은 곳, 빗물이 고이는 융덩이마다
당신의 얼굴을 비추고 계셨습니다
당신을 안다는 것은
결국 무지함을 고백하는 일이었으며
당신의 전능함보다
‘함께 아파하심’을
온몸으로 앓아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성(聖)과 속(俗 사이
뒤엉킨 이웃들의 거친 손마디 속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고
이웃들의 연약함이
곧 당신의 골고다임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가르칠 대상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할 길동무였습니다
이웃들의 슬픔 속에
당신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음을
늘 차가운 비를 맞으며 배웠습니다
비에 젖은 목양실의 낡은 의자를 떠나며
이제 ‘끝’이 아닌 ‘심화’의 자리에 섭니다
사역은 작아졌으나
당신과의 동행은 멈추지 않습니다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에도
우주의 무개가 실려 있듯
남은 생의 적막 속에서도
당신의 숨결이 선명하도록
포월(匍越)이 되겠습니다
차가운 봄비가 오히려 포근합니다
이 비가 끝나면 꽃을 피울 때
비로소 당신의 침묵과
인간의 눈물을
사랑하는 법을 더 배우겠습니다
시작도 당신이었고
끝 또한 당신 안에서 새로운 시작임을
온 몸으로 살아내겠습니다
*匍越의 [걷는 기도] 중에서
20260410 아펜젤러 세계선교센터 숙소에서





사진 = 전현구 목사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