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12)
루터: 종교개혁과 교회분열의 사이에서
들어가며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를 파문하지 않았다면 현대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을 해본다. 만약 루터가 중세 가톨릭교회 안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면 현재 개신교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루터의 교회 개혁의지가 중세의 부패한 기독교를 변화 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 가정은 가정일 뿐 실제 어떤 변수가 역사안에서 벌어졌을지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권이 루터를 파문하지 않았다면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안에 머물렀을 것이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루터의 신학 사상과 개혁 의지가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중세교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해 중세교회가 개혁되었다면 현재 수백개로 분열된 기독교 교파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세계 개신교 진영에서는 많은 기념 행사들로 분주하다. 그리고 매 종교개혁 행사 때마다 오르내리는 ‘루터’ 이름만큼 역사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이름은 없을 것이다. 한스 큉의 주장대로 11세기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개혁과 로마카 톨릭이라는 패러다임이 생긴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만큼 서구 기독교 세계안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중대사건은 없다. 그만큼 루터는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에게 있어서 뜨거운 감자이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의 루터상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므로 종교개혁에 불을 붙인 종교개혁가, 순수한 이신칭의 교리의 복원자, 하나님이 파견하신 원천적 복음의 선지자등 정통 개신교의 문을 연 회심과 기도의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반해 근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의 루터상은 험악하기 그지없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포도원을 허무는 멧돼지”에 비유하고 있다.
주여 일어나소서 심판하소서, … 숲에서 뛰쳐나온 멧돼지 한 마리가 당신이 가꾼 포도원을 파괴하고 있고 온갖 들짐슴이 먹어 치우고 있나이다.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은 루터가 교회를 분열시킨 인물로 보고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400년 동안 가톨릭에서는 루터를 ‘교회와 제국의 분열자’ ‘타락한 수도자’, ‘선동적 자유 사상가’, ‘이단의 괴수’ ‘정신병자’ 등 온갖 험악한 인간 군상의 대표자처럼 취급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로마 가톨릭에서도 루터에 대한 진지하고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로르츠는 루터가 중세기 교회의 부패와 폐단들을 드러냄으로 종교개혁을 수행한 종교적 인물로 그림으로 교회분열의 큰 부분은 루터 몫이 아님을 밝히기도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르츠는 여전히 루터를 신학적으로는 편협하고 경솔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루터에 대한 예전의 평가와 비교해 볼 때 가톨릭의 이러한 접근은 상당히 공정하고 균형잡힌 평가이며,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간의 화합과 대화를 위한 긍정적인 발걸음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를 객관적으로 살펴봄으로 루터에 대한 개신교의 긍정 일변도의 평가와 가톨릭에서 평가절하하고 있는 루터에 대해 다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적 인물이나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평가함에 있어, 한 가지 잘한 일들이 부풀려져 잘못된 폐단들이 묻혀지는 오류를 극복할 수 있고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에는 반드시 명암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시시비비를 정확히 밝혀 흑 아니면 백이라는 미성숙한 논리들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과거를 되돌아봄으로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의 발전을 위한 지혜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각 시대는 역사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대변혁들은 우연히 일어나기 보다는 그 사건 이면에 그러한 대변혁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요인들이 이미 시대속에서 조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를 살펴봄으로 한국교회가 당면한 현실을 외적, 내적인 환경속에서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 또한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2. 루터의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지난 번에 살펴보았던 종교개혁의 다양한 시대적 배경들과 종교적 요인들은 종교개혁이 그 시대에 자연히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요건들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필자는 과학문명의 발달과 인문주의 운동이야 말로 종교개혁의 내적인 동력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기억을 되살려 다시 간단하게 루터 시대의 종교개혁의 동인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와 서방교회의 분열로 인한 여러명의 교황들의 분립 그리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민족 국가들의 강력한 부상.
–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인한 농노의 이동과 경제 구조가 변화되면서 사회적 불안 심리가 최고조에 달함. 동방과 서방의 교역이 활발해 짐으로 상인들의 부상과 상인들이 신 귀족으로 등장하면서 경제구조의 개편이 일어나게 되고, 기존 기득권층의 일부가 몰락하고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최저생활을 보장받지 못함으로 숫적으로 무산계급인 하층민이 증가함으로 사회적 불안이 확산. 당시 세속 제후직을 겸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많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시달리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프로레타리아 계층은 사회 지배 계급과 교회를 불의의 원인으로 원망하고 불만이 최고조에 달함
– 그럼에도 교황청의 전제 군주제적 중앙 집권주의, 방만한 재정정책, 교황청과 교회안에서의 개혁에 대한 거부, 위선과 허례, 성직자들의 부도덕,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독일에서는 이것을 교황청의 착취의 극치로 보았다).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도 폐해가 극에 달했다.
– 귀족들에 의해 고위 성직이 독점됨, 하급 성직자들의 불만과 소외, 부유한 영주들과 수도원들의 세속화, 대다수의 많은 성직자들이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성직자 프로레타리아. 이러한 요인으로 인한 민중들의 경악스런 미신과 성상, 성자유물 숭배, 미신적, 광신적 묵시론적 형태를 띤 종교적 일탈.
– 교회조직의 반동성, 교회에 대한 세금면제, 재판권 보유, 성직자들에 의한 교육 독점, 동냥(탁발) 수도사의 폐습 조장, 너무나 많은 교회 축일.
– 급진적 교회 개혁자들 등장(위클리프, 후스, 마르실리우스, 오컴, 인문주의자들) 그리고 신학의 방향상실과 불확실성.
– 과학문명의 발달, 합리적 이성으로 인한 지리상의 탐험과 신대륙의 발견, 무역의 증가와 새로운 것에 대한 자각 새로운 지평, 인문주의 운동의 발흥으로 인한 중세 신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덕목과 탁월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인간이해로 변화. 이 인문주의는 교부들의 고전에 대한 부흥과 성서를 원어로 연구하면서 교황보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종교개혁에 관한 서적들이 쉽게 전 유럽에 확산.
이러한 다양한 요인들이 중세 말기 종교개혁 전야의 유럽의 풍속도를 보여 주고 있다. 중세는 극히 복합 적인 증후들로 실로 심각한 총체적 위기를 드러냈으며, 동시에 이 위기를 극복해 내기에는 중세는 전통적인 신학, 교회, 사회의 무능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교회의 타락에 분개하여 우연히 일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우연히 일어난 단순한 사건은 일시적으로 진행하다 금방 끝날 수 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급물살을 타고 전 유럽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루터 혼자서 만들어 낸 사건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유럽의 모든 정황이 개혁을 갈망하고 있었고 개혁에 대한 열망이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던 대중의 저항과 교회에 대한 일반 민중의 누적된 불만이 루터라는 인물을 휘감고 뻗어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
3. 루터와 신학사상의 배경
프로테스탄트로 불리우는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중세 말기의 신학적인 기류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특징지울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동방과 무역이 활발해 짐에 따라 이교적인 사상들이 확산되어 있었고 이것은 특히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불확실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때, 한스 큉의 표현대로, 천년동안 정체기간의 구길(Via antiqua)을 닫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역사는 한 사람을 위해 무르익었다.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3.1 루터의 개략적 생애
루터(Martin Luther)는1483년 11월 10일에 독일의 작센안할트주의 아이스 레벤((Eisleben) 에서 광부로 일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산층으로 생계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상당히 검소하여, 그의 모친은 다른 동네 부인들과 같이 장작을 주워야 했다. 그의 부친은 교회의 타락을 묵인하지 않는 양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의 아버지는, 자신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재능있는 자기의 아들은 좋은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루터는 대략 1491년부터 1497년까지 만스펠트에서, 1497년부터 1498년까지 마그데부르크에서 그리고 1498년부터 1501년까지 아이제나하에서 학교를 다녔다. 비록 마그테 부르크에서는 1497년에서 1498년까지 짧은 기간 학교를 다녔지만 이곳에서 루터는 공동생활 형제단과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루터가 고백하듯이 훗날 중요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이곳 마그데 부르크에서 루터는 공동생활 형제단관의 만남과 공동생활을 통해 그들의 경건생활과 친숙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신앙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 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 그래서 진로문제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정해야 했는데,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키워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인문학부를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루터가 법학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만스펠트에 사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1505년 7월 2일,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구원 받을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공포에 싸여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 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구해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는 아버지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그 당시 가장 엄격한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에 들어가 수사신부가 되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벼락을 내려 세상을 심판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금욕주의적 고행을 다 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이러한 수도원생활과 금욕주의적 고행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중세교회가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엄격할 정도로 중세교회가 제안한 고행들을 지켜 나갔다. 첫째로 그는 금식, 철야,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부정하였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빵 한조각 먹지 않고 삼일동안 금식하기도 하고, 정해진 규칙 이상으로 과 도하게 철야와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방법이 그에게 내적인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루터는 이러한 것들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는 후에 수도원 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수도사가 수도원규칙을 잘 지킴으로 말미암아 천당에 이른다고 한다면, 나는 참으로 좋은 수도사였고 내 수도원의 규칙들을 엄격하게 지켰으므로 내가 천당에 갈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도원에서 나를 알고 있는 모든 형제들이 이 사실을 입증해 줄 것이다. 내가 만약 수도원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면 나는 금식, 기도, 독서 및 다른 선행들로 말미암아 순교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은 수도원에서 살던 루터를 신앙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신앙의 완성과 구원의 길을 루터는 수도자의 길을 평생 가면서 율법적 행함을 완수하고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루터에게 양심의 평화와 내적 확신을 가져다주기는 커녕 불안과 회의를 안겨 줄 뿐이었다. 이때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슈타우비츠가 루터에게 자신의 구원이 예정되었는지를 놓고 피말리며 골똘히 생각하지 말고, 성서를 연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깊이 묵상하라고 충고한 것은 후에 그의 이신칭의 교리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3.2 루터와 신비주의적 영향
아돌프 하르낙은 루터가 신비주의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단정한다. 아돌프 하르낙이 지 적하는 것처럼 루터에게서 신비주의 영향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어거스틴 수도회의 원장이었던 슈타우피츠는 1516년 루터에게 도미니크 신비주의자인 타울러(Johanes Tauler, 1300-1361)를 소개해 주었다. 루터가 1516년 12월 14일 슈팔라틴(Georg Spalatin, 1484-1584)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루터가 타울러에게 얼마나 빠져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독일어로 되어 있고 교부들의 수준에 가장 근접한 수준인 순수하고 충실한 신학을 읽기를 기뻐한다면, 당신은 도미니크 수도사인 요한 타울러의 설교들을 택하십시오,….나는 라틴어나 독일어로 된 신학적 저서중에 이보다 더 건전하고 복음과 일치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슈타우피츠에게 신비주의자 타울러를 소개받은 후 타울러의 저서들을 탐독하므로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516년과 1518년 루터는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익명의 신비주의 저서인 독일신학(Theologia Germanica)을 출판하면서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배워왔고 또 배우고 싶은 것 중에, 성서와 성 어거스틴말고는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그리고 만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해 이 책만큼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없었다.
루터는 특히 신비주의 저서들에서 인간의 죄된 본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적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루터는 한동안 신비주의적인 신테레시스(Synteresis)의 교리, 즉 신비적 연합의 인간적 근거인 영혼의 긍극적 본질 이라는 교리를 받아 들였다.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은 이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에 대해 논의하기를 즉,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테레시스(synteresis)’ 즉 선을 행하게 하는 인간의 이성 또는 양심, 의지에 기초해 하나님이 용납할 만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더 많은 은혜를 보답으로 받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한다. 곧 선한 업적을 더 많이 행할수록 하나님께로 부터 더 많은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한행위가 상호협력(cooperate)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루터는 1515년 행한 한 설교에서 신테레시스(Synteresis)란 ‘재아래 있는 불꽃들로, 땅속에 묻힌 씨로, 형상을 입기를 기다리는 질료’로 묘사하고 있다. 루터는 이사야 1:9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면 우리가 소돔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하는 말씀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서 “만일 자연의 신테레시스(synteresis)와 남은 것들이 보존되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들이 파멸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차츰 죄인인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거나 하나님 앞에 의를 내놓기에는 철저하게 무력하고 비참한 존재인 것을 인식하면서 신테레시스(synteresis)개념을 인간의 이성, 의지 등 신인협력성과 분리시켜 단순히 죄인인 인간이 가야할 목표만을 지시하는 기관으로만 인정하고 자기 나름대로 변형해서 사용하였다.
루터에 대해 비평하는 학자들은 루터의 이러한 사상이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키고 은혜받은 자의 성화를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루터가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선한 행위와 업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자 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신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루터는 죄인인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기위한 그 어떤 자연적 능력(신테레시스)이 없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처럼 루터는 그 당시 유행했던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졌지만 신비주의 구원의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3.3 루터와 인문주의 영향
필자가 계속 강조하듯이 종교개혁은 인문주의의 부흥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버나드 뮐러(Bernd Moeller)가 남긴 “만약 인문주의가 없었다면 종교개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뮐러의 말처럼 중세교회의 암흑과 타락에 인문주의의 부흥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 자신도 성서해석에 있어서 중세 신학자들의 성서해석 방법보다 인문주의 해석 방법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고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높이 평가한 점에서 인문주의자들과 생각이 같았다. 심지어 키케로에 대해 이렇게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키케로는 최선의 철학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이 불멸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나는 하나님이 키케로와 같은 사람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설사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우리 마인츠의 추기경을 위해서 예정된 것보다 몇 등급 더 높은 지옥에서 삶을 누릴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중세의 타락한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돕기 위해 고전과 인문주의 운동을 회복하게 하였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을 1523년 루터의 한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과거시대에 학문이 쇠퇴함에 따라 신학이 반드시 비참하게 저하되고 약화되었음을 볼 때, 학문 연구에서 숙련된 훈련없이 어떤 참된 신학도 세워지고 지탱될 수 없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다른 한편 세례요한의 경우처럼 먼저 언어와 학문 연구를 재흥시키고 추구함으로써 길을 예비하지 않는다면 신적 진리의 분명한 계시가 결코 있을 수 없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인문주의자들의 생각을 높이 평가했으며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어린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과 그들을 교육하는 것에 대해 공감했다. 그리고 공공 도서관을 세우고 거기에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고전과 그리스, 로마고전들을 비치해 사람들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는 법률, 의학, 예술, 과학에 대한 여러 도서들을 비치하고 역사에 대한 도서들을 비치해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터의 인문주의에 대한 생각은 모든 인문주의자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당시 대표적인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보다 루터는 교회에 대한 훨씬 강경한 입장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비해 루터는 노예 의지론을 펴서 논쟁했던 것을 알고 있다.
3.4 루터와 옥캄 그리고 스콜라주의
중세교회의 공식적인 신학은 스콜라 신학이었다. 스콜라 신학은 중세 전체를 지배하였던 사상이었고 피터롬바르드의 교의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의학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A.D 1100년경에 시작되어 종교개혁시기에 이르러 종결되었다. 종교개혁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는 중세교회의 제도적이며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내적 확신을 추구하는 노력들이 다른 두 가지 방향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종교적 주관주의를 주장하는 신비적 경건운동과 다른 하나는 합리주의적 객관주의를 부르짖는 스콜라신학이었다. 인간구원에 대한 내적 확신에 대해 신비적 경험주의는 영적 체험이라고 보았고, 스콜라신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스콜라신학 에서는 모든 성서 교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하여 사물의 관념과 실체에 대하여 반대되는 사상들의 인식체계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실재론(Realism)과 유명론(Nominalism)이다.
실재론은 옛길(Via Antiqua)이라고 불리웠으며, 토마스학파(Thomist schools)와 스코투스학파(Scotist schools)를 언급할 때 보통 사용하였고, 유명론은 새길(Via Moderna)이라고 불렀으며 보통 옥캄의 윌리 엄(William of Ockham), 잉겐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Inghen),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와 같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초기의 루터는 스콜라주의적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루터는 스콜라신학자 가운데 옥캄의 가르침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루터의 스승인 트루트페터(Trutfetter)는 옥캄을 가장 훌륭한 새로운 철학자라고 칭했다.
루터는 스승의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옥캄의 학문적 방법론들을 따랐다. 루터에게 옥캄주의는 인식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 철학과 신학의 관계, 성만찬과 관련된 기독론과 같은 신학분야 그리고 죄론 및 은총론 같은 문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다. 루터는 옥캄으로부터 그의 예리한 학문과 비판적인 정신을 배웠다. 이양호 교수의 지적처럼 루터의 초기신학사상은 유명론의 대표적인 스콜라신학자인 옥캄과 같은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1513년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강의를 시작했을 때 루터는 “선생들이 자신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실패없이 은총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론(Via Moderna)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안에 있는 것을 행하면(facere quod in se est), 즉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자기안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 불완전한 공적을 쌓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면 완전한 공적이 쌓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1515년 여름학기부터 1516년 여름학기까지 루터가 비텐베르그대학에서 강의한 로마서 강의 에서는 이러한 Via Moderna(유명론: 후기 스콜라주의)사상을 펠라기우스적 오류라고 강하게 비판 했다.
자기의 능력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오류없이 하나님의 은총을 부어 준다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사상이고 어리석은 펠라기우스적 오류를 지지 하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1515년부터 루터는 후기 스콜라 신학신학인 옥캄주의로부터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다.
3.5 루터와 어거스틴의 영향
앞에서 루터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루터는 젊었을 때 어거스틴소속의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슈타우피츠 역시 어거스틴수도회 소속 원장이었다. 그러므로 루터가 어거스틴수도회의 전통속에 있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사실 루터는 인문주의 영향으로 고전으로 돌아가 교부들의 글들을 즐겨 읽었고 그중에서 그의 관심을 끈 교부는 단연코 어거스틴이었다. 루터가 스콜라신학에 대한 반박으로 97개조를 작성하였을 때 루터가 얼마나 중세교회에 대해 비판적이고 어떻게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이단에 대해 언급하면서 과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죄, 은혜, 그리고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도 명확하고 그의 신학적인 권위는 매우 지대해서 중세의 신학자들이 어거스틴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거스틴이 이단들을 반박하는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외치는 것 밖에 없다고 표현한다. 중세에는 이렇듯 어거스틴을 폄하하는 것이 상당히 널리 수용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잘못된 것들에 대해 분명히 비판하고 경고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자세는 루터의 신학이 얼마나 어거스틴적인가 하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처럼 루터의 순수한 관심은 어거스틴적인 신학적 유산을 유지하고 잘 계승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초기에 타락한 인간의지의 특성에 관심이 많았다. 루터가 발견하기로는 인간의 의지는 타락한 속성에 예속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는 단지 악만을 행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루터는 어거스틴의 교리 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루터는 후에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어거스틴은 모든 스콜라 철학자들 보다 바울의 의미에 더 접근하였다. 그러나 그는 바울에게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처음에 나는 어거스틴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그러나 바울을 향한 문이 활짝 열렸고 내가 이신칭의가 사실상 무엇인지 알았을 때 그것은 어거스틴과 불일치하였다.
루터는 로마서 강의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그 자신에 있어서 의로운 그 의로 이해 되어서는 안되고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되는 그 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신앙을 통해 일어난 다”고 함으로 하나님의를 형벌적 의로 보는 어거스틴과는 달리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의로 보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능동적인 의, 곧 심판하시고 정죄하시는 의로만 생각하여, 그 무서운 심판앞에 죄인인 모습 때문에 루터는 한 때 절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죄인을 벌하시는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얻어진 의로서 무조건적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수동적인 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는 분명 루터는 어거스틴과 차이가 큼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상호보충적이요, 인간 외적요소(extra nos)와 인간 내적요소(in nos)가 함께 이해되며 전가되고 주어지는 의(imputation)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sanctification)와 의인화(칭의:impartation)의 양면성이 모두 있다고 볼 수 있다.
3.6 루터와 이신칭의
이처럼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뇌 하였는데, 비텐베르크대학의 요한 슈타우피츠교수는 루터가 성서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면 평안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서학 교수사제로 임명하였는데, 슈타우피츠 교수의 결정은 루터가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루터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칭의론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이신칭의에 관한 바울의 교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온다. 어거스틴은 칭의교리에 대해 칭의와 성화를 혼합시킴으로 분명한 이해를 어렵게 했다. 즉 어거스틴을 따르는 중세교회의 입장은 의롭다 함(Justification)은 신앙(믿음)과 선행에 의해 결정되는 점진적 과정이지만 루터에게는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단독행위이며 그 뒤에 성화가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의롭다함(Justification)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그 조건은 믿음이고 선행은 그 표현인 것이다.
루터는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인 1545년에 자기의 라틴어 저서들을 편집한 책 “자서전적 단편”이란 글을 썼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이신칭의교리를 깨닫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확실히 로마서에 있는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열정에 사로 잡혔다. 그러나 그 때까지 내 길을 막고 있던 것은 내 심장주위의 차가운 피가 아니라 로마서 1장 17절에 있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한 단어였다.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그 단어를 증오하였다 … 마침내 내가 밤낮으로 그 말씀을 묵상하였을 때,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나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의 문맥에 내 주의를 돌리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 즉 믿음에 의해 사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인데, 즉 그 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 믿음에 의해 우리를 의롭다하는 수동적인 의로써, 즉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서 나는 내가 전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4. 루터 그리고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평가
루터는 분명 시대의 아들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신학과 사상은 그 시대의 가톨릭교회의 사상속에서 출발하였고, 루터의 신학은 전부가 동의되지 않을 지라도 그 시대의 가톨릭 전통안에 뿌리 박혀 있었다는 점에서 루터가 전혀 중세 가톨릭과 분절되고 연속성이 없는 개신교적 인물로만 치부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인식하기에는 그 당시의 로마가톨릭은 면죄부가 성행하고 모든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들이 부패하였으며, 교회는 불의의 온상이었던 것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수도원에서 치열할 정도로 교회의 전통과 율법적 행위의 완수를 통해서 구원에 다가가려는 루터에게 구원에 대한 일반 가톨릭교회의 전통과는 달리 ‘성서’와 ‘십자가의 그리스도’ 그리고 ‘어거스틴’을 소개했던 멘토 슈타우비츠 같은 학자요 경건한 사제들도 가톨릭교회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슈타우비츠의 조언은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에 단초를 제공할 정도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톨릭의 칭의 사상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논리를 제공한다. 또한 온건한 개혁을 주도해 나간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들도 가톨릭교회안에 남아서 당대 성직자들의 타락과 교회 및 교리의 불합리성을 신랄한 풍자와 독설로 드러냈다.
이처럼 개신교가 중세 천년을 지탱해온 중세교회를 바라보는 획일적인 생각들은 교정을 필요로 한다. 특히 일반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종교개혁이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이 면죄부를 팔아 일어난 사건”이라는 중학교 세계사 수준의 이해가 전부라 할 수 있다. 물론 많은 부분들에서 중세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시대의 모든 교회와 사제가 천편일률적으로 다 타락하고 부패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조셉 로츠는 루터가 토마스 아퀴나스보다는 옥캄의 전통에 있었으므로 중세말 가톨릭교회안에 만연한 부패현상을 가톨릭의 신앙과 동일시하는 오류에 있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중세교회가 루터가 주장하는 대로 그렇게 타락한 요소를 교회의 본질로 붙잡고 있었는지는 다시 평가 해봐야 할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은 살펴 본대로 여러 시대적 요인과 배경들이 있지만, ‘면죄부 판매’라는 인간의 탐욕과 부패한 행위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고 이것은 새로운 질서를 열망하던 민중의 저항과 교회에 대해 누적된 불만이 순식간에 표출된 사건이다. 그렇다고 종교개혁의 의미를 과도하게 부풀림으로 개신교가 가톨릭은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복음의 원형을 회복했다거나 부패하고 타락하여 진리가 없는 가톨릭과는 전혀 다른 복음과 도덕적인 기초위에 교회를 다시 세웠다는 주장은 지난 500년 동안 전개된 역사적 경험을 볼 때 크게 설득력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한스 큉이 지적하는 것처럼 루터는 먼저 가톨릭 신자 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루터가 1500년 동안 누구도, 심지어 어거스틴 조차 못했던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사상을 성서의 뜻에 맞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한 것은 위대한 일이다(물론 여전히 성서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러나 루터는 중세 교회안에서 믿음에 의해 발생한 근본적인 영적 체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루터는 그 체험을 자신의 천부적 자질로 돌려서는 안된다. 왜 이러한 깨달음과 체험이 루터에게 허락되었을까? 결국 바른 신앙과 복음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인데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은 지나치게 신앙의 개인주의화 되는 특성이 있음을 개신교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바 이다. 로마가톨릭은 제 2차 바티간 공의회 이후 이신칭의 사상에서 개신교가 이해한 이신칭의와 결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천명한다. 그리고 이신칭의 사상이 오늘날 개신교와 가톨릭을 갈라놓지 않는다는 것을 양측의 공식 합의문서에서 확인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개신교에서는 루터의 이신칭의와 종교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가 마냥 긍정적이고 복된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오늘날 수천 수만개로 갈라진 개신교의 개교회주의와 분리주의 그리고 신앙의 개인주의에 함몰 되어가는 교회들을 바라볼 때 종교개혁에 대한 또 다른 평가를 해봐야 할 것이다.
나가며
루터의 종교개혁의 결과는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있던 유럽의 정치적 일치를 무너뜨렸다.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교회가 로마 교황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는 것은 교황청이라는 종교권력이 아니라 이제 부터는 국가라는 세속 권력에 예속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의 영향력을 받지 않으니 국가에 따라 종교가 달라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은 신자들이 성서를 직접 읽고 실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안에서도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개혁과 변화의 운동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가톨릭의 반성 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가톨릭의 반성과 변화가 그 자체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루터의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아 야기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비롯되었는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교회개혁을 중세 가톨릭이 수용했다면 교회분열은 안일어 났을 것이다. 또한 중세 가톨릭이 루터를 파문하지 않았어도 교회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역사에 대한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역기능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종교개혁 결과 수많은 개신교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는 국가기관에 등록되어 있는 장로교 교단만 120개가 넘는 현실이다. 개신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황의 수위권과 교회 전통보다 오직 성서를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생각이 교단마다 다 다르다. 그러다 보니 성서의 해석을 둘러싸고 새로운 개신교단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수많은 종파로 분리되어 있다(사실 성서해석보다는 돈과 권력에 연관된 인간의 탐욕이 한국교회 교단 분열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개신교가 교회의 역사와 전통보다는 성서를, 성례보다는 말씀을, 선행보다는 믿음을 중요시 하다 보니 신앙에 있어 독선적, 배타적으로 흐르기 쉬운 입장에 서있고 자연히 이것은 개인주의, 개교회주의에 함몰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이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보수적인 신앙인 일수록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수적인 신앙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한국 장로교단의 분열이 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부패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이제 자정 능력을 잃어 버렸다”,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등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바라볼 때,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분열과 개교회주의이고 이것은 어떤 한 교단과 개 교회를 쇄신한다고 한국교회 전체가 바뀔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이 가장 심각한 개신교의 문제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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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식 교수
(현 호주비전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