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나의 북한 방문기 (4, 5)

나의 북한 방문기 (4)
<1997년 10월 15일 수요일 / 평양 – 약간 흐리고 구름>
평양에서의 첫날 밤은 편안하게 잘 잤다. 그 동안 쌓였던 피로에 지쳐 깊이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샤워하고 성경 읽고 기도한 후 어제 미쳐 다 마무리하지 못했던 여행일기를 정리했다. 7시엔 1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우리 넷을 위해 마련해 놓은 식탁에서 아침을 들었다. 여기 고려호텔은 특별히 외국인들이나 VIP를 위한 곳이어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모든 것이 깨끗하고 서비스도 참 좋은데다가 음식 역시 정도에 지나도록 풍성하고 호화롭다. 여기가 어디 기아와 수해로 고통 받고 있는 나라인가 싶을 정도이다.
아침에 호텔로 온 KCF의 이천민, 황시천 두 목사에게 우리는 시드니로 부터 가지고 온 200여 kg이나 되는 짐을 모두 련맹 사무실로 옮겨 주시고 오늘 오후에 우리가 방문 할 예정인 평양산원에 전달하려는 의약품만 따로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식사 후 우리는 서둘러서 <서해 갑문>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벤즈와 볼보에 우리를 태우고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평양과 남포시 그리고 서해 갑문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서해갑문은 1986년에 완공된 방파제로 남포시 서쪽에 세워진 것으로 수문만 해도 36개나 되는 커다란 갑문이다. 5만톤 급 선박이 통과할 수 있고 밀물에 따라 서해의 바닷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고 농업과 공업 용수를 확보 하는데 크게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그들로서는 참 자랑스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남포시를 거쳐 돌아오면서 우리는 북한의 시골 모습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가을 철, 밭에는 채소들이 자라고 논에는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금년엔 쌀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우리는 대동강 하류에 인접되어 있는 그 유명한 혁명의 성지 <만경대>로 갔다. 이곳은 1959년 <김일성원수의 생가>로 조성된 곳이다. 마치 성지처럼 아름답게 잘 조성해 놓고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참배하는 곳 중 하나이다. 만경대 누각에 올라서 보니 평양시 교외와 대동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정말 참 경치가 빼어나게 좋은 곳에 자리 하고 있었다. 이목사는 이곳은 김일성이 태어난 집과 어릴 때 이곳에서 공부하며 혁명 사상을 싹트게 한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주변에 북한의 고위층 자제들이 공부하는 만경대혁명학원과 강반석혁명학원을 비롯하여 놀이공원과 태권도장 등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모습에 의구심을 갖었지만 다틈이 될 만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그냥 덕담만 나누면서 둘러보았다.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학습기관이요 병영국가라 할 수 있다. 이들이 펼치는 온갖 선전과 선동은 오직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를 하나님처럼 만드는 데 집중이 되어 있다. 이들은 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종교 신앙 체제 속에서 마치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들 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젯 밤에 잠간 본 평양 TV 방송이나 오늘 아침 새벽을 일깨워 준 거리방송이나, 오늘 다녀온 서해갑문, 남포시, 가을 철 논과 밭에서 익어가는 벼이삭과 채소들, 그리고 만경대 김일성생가의 성시화운동 까지, 일체 모든 것들은 오직 수령님의 은덕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보통 기독교인들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라고 말하는 모습과 오버 랩 되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이목사는 금년에는 커다란 수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남포 일대가 이처럼 농사가 잘된 것 역시,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 할 것인데, 그이는 이 모든 것이 다 수령님의 은덕이라고 했다. 만경대에서 다시 고려호텔로 돌아 온 우리는 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잠시 쉰 후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오후 들어 우리가 처음 방문한 곳은 <평양산원>이었다. 1980년 7월에 정식으로 문을 연 이 병원은 이름 그대로는 여성들과 산모들을 위한 종합전문병원 처럼 들리지만 <평양산원>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산부인과 만이 아니라 내과와 소아과, 외과와 정형외과,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포함하여 각종 예방의학과와 의약품 및 방사선과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종합병원이다. 13층 짜리 본동 외에도 여러개의 부속 건물들이 있고 병상만 해도 1천 5백개 이상이나 되는 대형 병원이었다. 우리는 생각했던 것 보다 크고 시설도 눈에 띠게 잘 되어 있는 이 병원을 둘러 보면서 그 규모에 많이 놀랬다. 우리는 병원 중 산모 병실 한 곳과 신생아 병실과 인큐베이터 병실을 둘러 보았다. 산모 병실에는 한 20여명의 산모들이 누워 있었고 신생아 병실과 인큐베이터에도 한 20여명의 애기들이 있었다. 우리는 병원 로비에서 만난 산모들 몇 분에게 말을 걸었다. 건강하시냐, 몇일이나되었느냐, 언제 쯤 퇴원 하시느냐 같은 인사였다. 그들은 감사를 표하며 간단히 대답을 하면서도꼭 빼놓지 않고 같은 말을 하였다. <이 모든 게 다 수령님의 은혜지요!> 우리들이 만난 사람들중에서 제일 학습이 잘 된 사람들 같아서 혹시 이분들이 진짜 환자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병원의 행정 책임자를 만나 준비해 간 의약품들을 전달했다. 이렇게 엄청나게 커다란 병원에 비해 그리 많은 의약품은 아니지만 정말 필요한 환자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잘 쓰여지길 바라며 그 다음 <인민 대학습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82년에 준공된 인민대학습당은 북한을 대표하는 복합문화 시설 중 하나이며 가장 규모가 큰도서관이며 자랑스러운 건축물 중 하나이다. 면적만 해도 4만 평방 미터에 총 건축면적은 10만평방 미터를 넘는다. 조선 시대의 각선미를 따라 <지붕>을 올린 이 12층 짜리 건물은 이목사의 말대로 남북을 통털어 가장 아름다운 <조선식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민대학습당에는 수많은 고서적들과 목판본과 활자본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출판된 원서와 번역본들에 이르기 까지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고 자랑하는 종합도서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출판된 어린이 책들, 청소년 책들, 각종 만화와 성인용 도서들은 물론이고 여러 형태와 크기의 독서실, 녹음실, 학습실, 강의실, 토의실, 세미나실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도서관으로 내가 전에 가 본 미국국회 도서관이 연상될 정도였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으나 그 큰 학습당을 다 둘러 볼 수는 없었다. 참 좋은 시설이요, 좋은 자료실이며 동시에 자랑스런 관광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시천목사에게 옛날 평양신학교 자리와 숭실전문 터, 혹은 산정현교회가 있던 자리를 보고 싶으니 한번 데려다 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황목사는 아주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목사님, 저희도 정말 그러고 싶지만 평양의 그 모든 옛날 학교와 교회들과 많은 유적들은 전쟁중에 거이 다 미제들의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루에 평양 시내에만 해도 B.29를 100대 씩 띄었으니까요” 그는 울먹이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저녁 식사는 호텔 밖으로 나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했다. 물론 이곳도 이목사가 미리 예약을해 둔 곳이었다. 우리는 깔끔하게 잘 차려진 식탁 앞에서 격의없이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음식을나누었으나 대부분은 칭찬과 감사의 말들이었다. 초청받은 손님이 초청해 준 주인에게 예의에 어긋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옳바른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사 후 조금 일찍 방으로 돌아온 나와 장목사는 한참이나 어제와 오늘을 지내면서 보고 들은 북한사회 전반에 대해 “혹시 이 방에 도청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말하면서도 비판적이며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이런 생각들을 나의 일기장에다 남겨놓는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초청해 준 이들의 스케쥴과 계획에 따라서 주로 그들이 보여 주는 것만 보고, 들려 주는 것만 듣고, 그들이 소개해 준 사람들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은 지나치게 엄격하게 제한되고 규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접한 것들을 하나의 전시용이며 선전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북한, 특히 평양은 하나의 커다란 전시공간이며 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세뇌된 이데올로기의노예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방송과 텔레비젼, 새벽공기를 찢으면서 부르는 군가와 합창소리들은 인간과 그 조직을 집단적 광신도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가 훈련된 군인들이고 사로잡힌 포로들이며 노예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좋게 표현하여 북한주민 2천 4백 만은 모두 한 학교에서 학습하는 학생들 같았고 좀 심하게 말하면 거대한 병영이나 노예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수인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보통 사람들과 사회에서도 나름 <자기 式>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정한 상식과 기준에서 어긋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런데 북한사회는 그 정도를 넘어섰다. 그들은 하루 하루를 <우리 式> 행복과 만족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라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계속) *홍길복 (2026.2.23)
나의 북한 방문기(5)
<1997년 10월 16일 목요일 / 평양 – 종일 흐리고 가을비가 내리다>
요즘은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다. 참 은혜스럽다. 주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등이다. 오늘도 주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 4사람은 한 끼도 거르지 않고 함께 식사한다. 우리는 참 격의없이 친해졌다. 농담도 하면서 호주연합교회와 한인교회 이야기를 비롯하여 북한과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문제 등 많은 공통의 관심사들을 심도있게 나누고 있다.
오늘은 금수산기념궁정에 가는 날이다. 우린 대부분 정장 차림으로 하루를 시작 하지만 어제 이목사는 미리 말했다. “내일은 금수산기념궁정에 갈 예정이니 정장을 갖추고 나와 주세요. 그리고 지갑과 여권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마세요” 아침 8시경, 이슬비가 내리는데 우리는 호텔을 출발하여 9시가 되기 전에 금수산기념궁정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벌써 입구에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검문과 검색도 아주 까다로웠다. 마치 공항에서 처럼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 시키고도 다시 일일히 소지품과 몸을 손으로 쓸어가며 검색했다.
금수산기념궁정은 본래 김일성주석이 살아 있을 때엔 <금수산 의사당>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집무실로 쓰던 <주석궁>이었으나 그가 죽은 1994년 부터는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그 2층에 안치하고 이름도 <금수산기념궁정> 이라고 개명하였다. (후기 : 지금 이 여행일기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는 싯점에서 보면 2011년 김정일이 죽은 후 그 궁정의 1층에는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서 안치해 두고 궁정의 이름 또한 ”금수산태양궁정”이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금수>라는 말은 지명이 아니라 우리들이 흔히 <금수강산> 할 때의 그 錦繡로 <비단결 같이 수놓은 곳>이란 뜻을 지닌 말이다. 앞에서 나는 김일성의 시신을 <미라>로 처리했다고 썼지만 좀 더 전문적 용어로는 엠버밍 (Emberming)이란 용어를 쓴다고 한다. 엠버밍이란 사체를 단순히 방부 처리만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신을 마치 살아있는 사람 처럼 복원하여 분장하고 영구 보존하는 기술을 말한다고 알려져 있다. 김일성의 시신은 내가 카이로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본 고대 이집트의 라암세스 2세의 시신처럼 미이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본 그의 시신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교하고 품위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어 꼭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이미 수년전 베이징의 천안문광장 남쪽에 세워진 <모주석 기념당>에서 모택동주석의 엠버밍 시신을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본 김일성주석의 시신이 훨씬 더 잘 만들어 진 것 처럼 보였다. (후기 : 나는 2000년 5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성당 옆에 있는 레닌의 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유리관 안에 안치된 레닌의 엠버밍 까지 공산-사회주의 3대 지도자들의 영안을 모두 다 본 셈이다) 김일성의 시신은 그 누구도 한 자리에 멈추어 서서는 볼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커다란 관을 한바퀴 돌며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가며 둘러 보았다. 물론 그 앞에서는 사진 찰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신 앞을 지나면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모습이 보였다. 시신을 알현(?)한 후 우리는 옆에 있는 다른 방으로 안내되어 그가 생전에 쓰던 유품 중 그의 평범한 옷가지들과 편지들, 문서와 사진 등을 보고난 후 정원으로 나왔다. 우리는 20세기에 살면서 기원전 3,4세기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누워있는 파라오들 처럼 북한이라는 현대판 피라미드 속에서 새로운 파라오인 김일성 원수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계시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실감 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금수산기념궁정>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이 현장에서 우리는 20세기에도 계속하여 신화는 만들어지고 있음을 똑똑히 목도했다. 북한에서는 새해 첫날인 1월 1일 자정 첫 시간이 되면 김정일을 비롯한 당 최고 지도부가 여기 김일성의 미라 앞에 와서 인사를 드린 후 새해 업무를시작한다. 마치 우리가 새해 첫 날 자정이 되면 새해맞이 예배를 드리는 것 처럼 말이다. 그들은 죽은 김일성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이 나라를 지키주며 이끌어 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현대판 왕궁을 떠나 정원의 숲과 잔디를 지나며 커다란 나무 밑에 늘 지니고 다니던 나무 십자가 하나를 조용히 내려 놓았다.
우중에도 그 다음에 우리가 찾아간 곳은 <개선문>이었다. 평양의 개선문은 일제시대 김일성장군이 무장 독립운동을 통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조선반도 전체를 해방시켰음을 알리기 위해 1982년 김일성의 일흔번째 생일에 맞춰 만든 것이다. <김일성장군이야말로 조선민족의 진정한해방자이며 민족의 참된 영웅임>을 선포하고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개선문이다. 높이 60미터에폭 50미터가 되는 이 개선문은 그 전체를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평양개선문>은 단순히 크기에 있어서 만이 아니라 그 의미와 성격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개선문이라고 자랑한다. 이는 우리가 로마에서 보게 되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나 파리의 드골광장에서 만나게 되는 <나폴레옹의 개선문> 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여 세계에서 제일 큰 개선문이요, 그런 개선문들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것으로 세계 온 민족에게 혁명을 통한 인간승리를 안겨준 상징이라고 말한다. 개선문의 제일 위에는 <김일성장군의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 /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 아…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3절 까지 있는데 나도 그 1절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약간은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6.25 때 공산군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안내하는 여성은 이 노래는 대중가요이며 군가이지만 조선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애국가 보다 더 크게 사랑 받으며 많이 불린다고 했다. 개선문의 양쪽에는 백두산이 조각되어 있었고 앞과 뒤에는 김일성장군이 연설하는 모습들과 이에 맞추어 환호하는 북조선인민들의 모습이 새겨있었다.
오후가 되어 우리 일행은 순안에 있는 남산처소교회라는 곳으로 인도를 받았다. 작은 아파트에 12명이 모여있었는데 이런 스타일의 주거 형태가 평양에서는 중산층의 생활형태라고 한다. 김혁철집사라는 분이 아내와 아이 둘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이곳을 처소교회로 제공하여 여기에서 주일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인도자는 백봉일전도사라는 분이고 집사 두명에 전 교인은 12명인데 오늘은 다 모였다고 좋아했다. 우리로 하자면 구역예배와 흡사한 것이었다. 김혁철씨는 50대로 보이고 이기만집사는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백전도사는 3곳의 처소교회를 순회하며 돌보고 있는데 한달에 1-2번 정도 와서 예배를 인도한다고 한다. 봉수교회 옆에 있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면서 학생 때 나의 설교집도 읽었다고 했다. 우리가 왔으니 주일은 아니지만 잠간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드린 후 성경을 읽고 특송도 부른 후 설교 대신 오늘은 우리 일행에게 처소교회와 북한교회에 대해 설명을 했다. 북한에는 약 500개 정도의 처소교회가 있는데 모이는 숫자는 보통 약 20명 안팍이라고 한다. 이미 강영섭목사에게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그들은 나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나는 심령에서 울어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드렸다. 모두들 큰 은혜를 받았다며 손을 잡고 고마워했다. 우리는 이 처소교회에다 준비해 온 TV를 기증하고 미화 천불을 헌금으로 드린 후 문을 나섰다. 그러나 약 1시간 정도 우리가 집안에 머물고 있는 동안 누군가 문 밖에서 끊임없이 이들을 감시하며 어디엔가 보고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인기척이 보였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또 저녁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는 이종로선생과 황시천목사와 함께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북조선에서는 평양에서 신의주로 국내여행을 갈 때도 꼭 당에서 여행허가를 받고 여행증명서를 받아야만 합니까? 이건 지나치게 인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황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홍목사님, 목사님은 자유의 의미를 잘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지나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아니 목사님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여행을 할 때 아버님에게 인사하고 다녀와도 괜찮겠느냐고 물어 보지도 않고 그냥 떠나십니까? 아버님이 “야, 요즘은 날씨가 않좋으니 다음에 가거라”라고 말씀 하시면 순종해야 하는 것아닙니까? 우리 북조선은 수령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의 가족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모든 일은 아버지께 물어보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그냥 신의주로 갔다가 사고라도 만나면 어쩔 겁니까? 우리는 절제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고 남조선 사람들은 방탕한 자유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계속) *홍길복 (2016.3.9)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