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인간이 가장 오래 마주해 온 현실이지만, 여전히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누구도 죽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며, 누구도 죽음 앞에서 완전히 담담할 수만은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단지 생물학적 종말로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인간 안에 두 겹의 반응을 일으킨다. 하나는 육체가 사라진다는 본능적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 과연 끝인가를 묻는 실존적 질문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하려 하지만, 죽음의 의미를 묻지 않고서는 끝내 자기 삶의 의미도 온전히 묻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기독교는 바로 이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가장 진지하게 응시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응시는 냉혹한 관찰이 아니라, 계시의 빛 안에서 죽음을 다시 읽어 내는 성찰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단지 자연의 순환으로 축소하지도 않고, 인간의 공포만으로 해석하지도 않는다. 또한 죽음을 허무한 소멸로만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죽음을 죄로 인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온 비극으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그 죽음이 더 이상 마지막 승리자가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죽음을 말하는 일은 단순히 마지막 순간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죄와 구원과 영원이라는 가장 깊은 주제를 함께 말하는 일이다.

- 죽음은 죄로 인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온 비극적 현실이다
기독교가 죽음을 이해하는 첫 번째 출발점은 창조와 타락의 질서이다.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생명과 평화와 충만의 질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소멸이 아니라 생명이었고, 단절이 아니라 교제였으며, 허무가 아니라 은총의 충만함이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지음받았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본래 창조의 이상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온 비극적 현실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죽음을 단순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보편적 현실이다. 계절이 지나듯 세대가 바뀌고, 꽃이 피고 지듯 인간의 생애도 마침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보편성만으로 죽음의 의미를 다 설명하지 않는다. 죽음은 단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 존재가 겪는 깊은 상실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생명의 충만함이 깨어진 자리이며,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사건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는 언제나 슬픔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단지 호흡이 멈춘 사건이 아니라, 한 인격의 부재가 남겨진 이들의 삶 속에 깊은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집의 공기가 달라지고, 식탁의 자리가 비어지고, 일상의 시간표가 바뀌며, 마음속 기억의 결이 새롭게 흔들리게 된다. 죽음은 한 사람의 생을 마치게 할 뿐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의 삶의 구조를 바꾸어 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울고, 무너지고, 질문한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사실은 이 진실을 가장 아름답고도 엄숙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주님은 죽음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않으셨다.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도 눈물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죽음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인간됨의 정직한 표현이다. 애통은 믿음 없음의 표지가 아니라, 상실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마음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죽음의 비극을 외면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비극을 가장 깊이 인정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을 비극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죽음이 아무리 깊은 어둠처럼 보일지라도, 그 어둠이 마지막 진실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멀리서 설명하신 분이 아니라, 친히 그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분이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버려짐과 고통과 죽음을 몸소 감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무덤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활은 죽음이 더 이상 절대적 권세가 아님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승리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는 죽음을 새롭게 이해한다. 죽음은 여전히 아픈 사건이지만, 더 이상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적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패배가 결정된 적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최종 붕괴가 아니라, 이 땅의 시간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경계가 된다. 죽음은 끝처럼 보이지만, 신앙 안에서는 영원의 문턱이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한 질서를 향해 들어가는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죽음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운명이 단지 흙으로 돌아가는 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존재라고 말한다. 죽음은 의식의 단순한 소멸로 축소될 수 없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와 영원이라는 더 큰 차원을 마주하게 하는 문턱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죽음을 가볍게 말하지도 않고, 죽음 앞에서 절망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죽음은 여전히 눈물의 사건이지만, 소망 없는 눈물은 아니다. 이별은 여전히 아프지만, 영원한 단절만으로 규정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기독교는 매우 귀한 균형을 보여 준다. 한편으로 죽음을 신비롭게 미화하지 않는다. 죽음은 여전히 적이며, 인간을 찢고 울게 하는 현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죽음을 허무와 절망의 최종 결론으로 방치하지도 않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인간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최종 권력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죽음을 말하면서도 소망을 함께 말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값싼 낙관론이 아니다. 눈물을 무시하는 위로가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죽음을 해석하는 가장 깊은 이유이며, 교회가 장례의 자리에서도 찬송을 잃지 않는 근거이기도 하다.
- 죽음을 아는 일은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게 하는 영적 성찰이다
기독교가 죽음을 말하는 목적은 사람을 공포에 묶어 두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삶을 더 분명히 보게 하기 위함이다.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는 사람은 비로소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하게 된다.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않게 된다. 관계가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용서와 화해를 뒤로 미루지 않게 된다. 인생이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순례의 시간임을 아는 사람은 오늘을 허투루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은 단지 마지막 순간의 준비를 넘어선다. 그것은 삶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누구와 화해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껍질을 벗기고 본질 앞에 서게 만든다. 죽음은 삶의 바깥에 있는 주제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바로잡는 영적 도구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 안에서 성도들이 죽음을 기억하라고 권면받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죽음을 자주 생각하라는 말은 허무주의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땅의 삶을 더 책임 있게 살라는 뜻이다. 오늘의 시간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만나는 하루의 일이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매 순간이 거룩한 소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죽음을 묵상하는 사람은 삶을 경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더 진중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하며, 사랑해야 할 이를 더 깊이 사랑하려 하고, 하나님께 받은 시간을 더 바르게 사용하려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단지 생의 끝을 알리는 암울한 주제가 아니라, 오늘을 더 충만하게 살도록 부르는 하나님의 조용한 경종이기도 하다.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결국 생명을 더 깊이 존중하게 된다. 유한함을 아는 사람은 존재의 귀함을 더 선명히 보게 된다.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순간의 유혹과 헛된 교만을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삶의 회피가 아니라 삶의 성숙으로 이어진다. 잘 죽는 문제는 결국 잘 사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맺는말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질문이며, 가장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을 단지 어둠의 끝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죄로 인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온 비극적 현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더 이상 마지막 승리자가 아닌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분명 슬픔이지만 소망 없는 슬픔은 아니며, 분명 이별이지만 영원한 단절만으로 설명될 수도 없는 사건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말할 때 두 가지를 함께 붙든다. 하나는 인간의 죄와 유한함을 직면하게 하는 엄숙한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바라보게 하는 복음의 소망이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죽음은 비로소 바르게 이해된다. 죽음은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절망의 최종 언어도 아니다. 믿음 안에서 죽음은 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을 향한 문턱이 된다.
결국 죽음을 바르게 아는 일은 오늘을 바르게 사는 일과 깊이 연결된다. 죽음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서 자신을 더 진실하게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을 묵상한다는 것은 생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의 의미를 더 깊이 붙드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독교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죽음은 마지막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이 아니며, 무덤은 끝처럼 보이지만 끝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마지막 말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이지만, 기독교는 죽음을 단지 생물학적 끝으로만 보지 않는다. 성경은 죽음을 죄로 인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온 비극적 현실로 말한다. 그래서 죽음은 슬픔이고, 이별이고, 눈물의 사건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죽음 앞에서 애통하는 일은 믿음 없음이 아니라 인간됨의 정직한 표현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을 절망의 마지막 말로 두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죽음은 여전히 아픈 현실이지만, 더 이상 최후의 승리자는 아니다. 죽음은 끝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경계이며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문턱이다.
그래서 죽음을 묵상하는 일은 삶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더 바르게 살게 하는 믿음의 성찰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사랑을 미루지 않게 되고, 회개와 용서를 내일로 넘기지 않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더 진실하게 살게 된다.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죽음은 비극이지만 절망은 아니며, 이별이지만 끝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마지막 말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인 것이다.

기독교 상담학이 바라보는 죽음학 (Thanatology)
죽음은 인간이 끝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가장 말하기 어려워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죽음을 늘 가까이에서 경험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존재이다. 그러나 기독교 상담학은 죽음을 외면할수록 삶도 얕아질 수 있으며, 죽음을 성찰할수록 오히려 삶과 신앙과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는 학문이다. 죽음학은 죽음을 배워서 죽음을 잘 맞이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오늘을 더 진실하게 살도록 돕는 학문이다.
- 죽음은 실존적 사건
기독교 상담학은 죽음을 단지 육체적 기능의 정지로 보지 않는다.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며, 애착의 상실이며, 인간 존재 전체를 흔드는 실존적 사건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을 끝내는 사건일 뿐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내면에 깊은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슬픔이 있고, 분노가 있고, 허무가 있고, 후회와 죄책감과 두려움이 함께 자리하는 법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소멸설(Annihilationism)’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정말 끝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더 두려워한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단순히 “슬프다”는 감정만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왜 지금인가?”, “왜 하필 이 사람인가?”,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흔들리는 존재이다.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관계와 믿음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된다. 그러므로 죽음을 다룬다는 것은 단지 임종의 순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깊이를 함께 다루는 일이다.
기독교 상담학이 죽음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은 의학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영적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붙들고 살아왔으며, 결국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묻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의미를 다시 묻는 시작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 애도는 사랑의 흔적
죽음과 상실의 자리에서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동행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해석보다 곁에 있어 줄 존재를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법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받는 것보다, 이 아픔이 결코 가볍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 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기독교 상담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설명보다 동행을 더 귀하게 여기는 학문이다.
교회는 때때로 너무 빠른 위로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상처를 깊게 만들기도 한다. “천국에 갔으니 괜찮다”는 말은 교리적으로는 틀리지 않을 수 있으나, 애도의 첫자리에서는 울음을 억누르게 만드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는 말 역시 선한 의도에서 나올 수 있으나, 슬픔과 질문과 분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압박이 될 수도 있다. 기독교 상담학은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 진실한 위로는 정답의 전달이 아니라, 눈물을 함께 견디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먼저 우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은 죽음 앞에서 차가운 설명자가 아니셨고, 먼저 눈물 흘리시는 동행자이셨다. 이것은 기독교 상담이 지향해야 할 태도를 잘 보여 주는 장면이다. 상담자는 고통을 분석하는 사람 이전에 고통의 곁에 머무는 사람이어야 한다. 슬픔과 침묵과 분노와 죄책감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존재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적 돌봄이며, 기독교 상담이 지닌 품격이기도 하다.
또한 기독교 상담학은 애도를 병리로만 보지 않는다. 애도는 사랑의 흔적이며, 상실이 남긴 거룩한 통증이다. 많이 운다는 것은 많이 사랑하였다는 뜻일 수 있으며,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삶 속에서 얼마나 깊은 자리를 차지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상담은 애도를 빨리 끝내려 하지 않고, 그 슬픔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흘러가도록 도와야 하는 사명이다.
- 죽음은 영적 각성의 통로
기독교 상담학이 죽음학을 다루는 이유는 단지 죽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죽음을 통하여 오늘의 삶을 더 진실하게 살도록 돕기 위함이다. 죽음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을 미루지 않게 되고, 용서를 미루지 않게 되며, 회개와 화해를 내일로 미루지 않게 되는 법이다. 죽음의 성찰은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 본질적으로 붙들게 하는 힘이 된다.
죽음은 삶의 이야기를 끊어 놓는 사건이지만, 동시에 삶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드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은 단순히 과거를 붙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묻게 된다. 떠난 이의 삶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이 상실 이후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시는지, 나는 어떤 믿음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게 된다. 기독교 상담학은 이 물음들을 억지로 봉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물음 속에서 삶의 이야기를 다시 써 가도록 돕는 학문이다.
여기에서 기독교 상담학은 분명히 소망을 말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슬픔을 건너뛰게 하는 얕은 위로가 아니다.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의 위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지만, 그것은 고통을 무시하는 문장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게 하는 능력이다. 참된 소망은 눈물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눈물 속에서 더 깊어진다. 상실을 경험한 영혼이 충분히 울고 충분히 묻고 충분히 하나님 앞에 머문 뒤에야, 소망은 비로소 영혼을 일으키는 진실한 힘이 된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상담학이 말하는 소망의 품격이다.
죽음을 말할 수 있어야 삶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죽음을 직면할 수 있어야 인간은 삶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오늘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루가 얼마나 경건한 부르심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학은 삶의 끝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이전에, 삶의 깊이를 회복하게 하는 영적 각성의 통로이기도 하다.
맺는말
기독교 상담학의 관점에서 죽음학은 죽음을 해설하는 지식이 아니라,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돌보는 지혜이다.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흔드는 실존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는 성급한 설명보다 함께 머무는 동행이 필요하다. 또한 죽음을 성찰하는 일은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을 더 사랑하고 더 바르게 살도록 부르는 영적 초대이다.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적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애도는 무너짐이 아니라 사랑의 흔적이다. 상담은 해석의 기술 이전에 동행의 은총이다. 그리고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성숙한 길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상담학이 죽음학을 붙드는 이유가 있으며, 또한 교회가 이 주제를 더 깊이 배우고 더 품위 있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4번의 편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두 편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그 사이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9절에서 이미 전에 보낸 편지를 언급합니다. 또 고린도후서 2장 4절에서는 많은 눈물로 쓴 편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는 이전 편지, 고린도전서, 눈물의 편지, 그리고 고린도후서라는 흐름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전편지
먼저 이전편지는 우리가 현재 갖고 있지 않은 편지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 하였다”(고전 5:9)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이전에 이미 한 차례 서신 왕래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편지의 주된 목적은 교회 안의 도덕적 타락, 특히 신자라고 하면서도 공개적으로 죄 가운데 사는 사람과의 교제 문제를 경계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운 뒤 그냥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목회적으로 간섭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 고린도전서
그 다음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이 편지는 이전편지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완하고 확대하는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 형제라 불리면서도 음행과 탐욕 가운데 사는 자를 말한 것”이라고 다시 풀어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편지가 비교적 짧고 원칙적인 경고였다면, 고린도전서는 그 원칙을 구체적 목회 지침으로 확장한 편지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7:1을 보면 바울은 “너희가 써 보낸 문제들에 관하여” 답하고 있으므로, 이 편지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질문들과 교회 내부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공식 답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질서, 거룩, 예배, 은사, 부활 등을 바로 세우는 교정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뒤에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심각한 긴장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괴로운 방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1에서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미 한 번 고통스럽고 아픈 방문이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여러 해설은 이 방문 때 어떤 사람이 바울을 공개적으로 거스르거나 모욕했고, 교회도 그 자리에서 바울을 충분히 지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큰 상처를 안고 돌아갔다고 봅니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단지 윤리 문제나 예배 문제를 넘어서, 바울의 사도권과 바울-고린도 교회의 관계 자체로 번졌습니다.
- 눈물의 편지
바로 그 다음 단계가 눈물의 편지, 곧 “엄한 편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3–4에서 그 편지를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 가운데” 썼다고 말하고, 7:8–10에서는 그 편지가 고린도 교회를 잠시 슬프게 했지만 결국 회개로 이끌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단순한 교리 설명서가 아니라, 관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랑과 권위를 함께 드러내며 회개를 촉구한 매우 강한 편지였습니다. 고린도후서 7:12를 보면 이 편지는 단순히 “누가 잘못했고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만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곧 그들의 충성과 진심을 드러내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 눈물의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다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는 강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매우 교육적이고 질서정연한 답변 형식인데, 바울이 말하는 눈물의 편지는 훨씬 더 상처와 위기 속에서 나온 직접적인 편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해설은 이 편지가 괴로운 방문 이후에 쓰였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보통은 “고린도전서 후, 괴로운 방문 후, 눈물의 편지 발송”이라는 순서를 취합니다. 디도가 이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 고린도후서
그리고 그 결과가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은 디도가 돌아와 고린도 교회의 슬픔과 열심, 그리고 바울을 향한 사모함을 전해 주었을 때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7장은 단순한 안부 편지가 아니라, 왜 자신이 방문 계획을 바꾸었는지 설명하고, 눈물의 편지 이후 이루어진 회개와 화해를 해석하며, 징계를 받은 사람을 이제는 용서하고 사랑으로 다시 품으라고 권면하는 회복의 편지입니다. 이어서 8–9장에서는 예루살렘 연보 문제를 다시 다루고, 10–13장에서는 아직 남아 있는 반대자들과 “거짓 사도들”에 맞서 자신의 사도직을 강하게 변호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화해의 편지이면서 동시에 사도권 변호의 편지입니다.
이렇게 보면 네 편지의 관계는 매우 분명해집니다.
이전편지는 “교회 안의 죄를 경계하라”는 초기 경고이고,
고린도전서는 “그 경고를 더 구체적으로 풀어 주며 교회를 바로 세우는” 교정의 편지이며,
눈물의 편지는 “바울과 교회의 관계가 흔들린 위기 속에서 회개를 촉구한” 아픈 편지이고,
고린도후서는 “그 회개 이후에 화해를 회복하고 남은 반대에 대응하는” 회복의 편지입니다.
즉, 주제가 점점 이동합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문제였고, 다음에는 교회의 질서 문제였고, 그다음에는 관계와 권위의 위기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회개와 화해와 재확인으로 나아갔습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이 네 편지는 바울의 참모습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단지 교리를 가르치는 신학자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꾸짖고, 상처받았기 때문에 눈물 흘리며, 회개가 일어났을 때 기꺼이 용서와 회복을 말하는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서신들은 교회 문제 해결의 문서이기 전에, 상처 입은 관계를 복음 안에서 다시 세워 가는 목회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전기지 (secure base)와 퀘렌시아 (Querencia)
현대인은 풍요 속의 빈곤과 군중 속의 고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을 맡길 사람은 적고, 머물 공간은 많지만 편히 쉴 자리는 적은 현실이다. 겉으로는 바쁘게 살아가지만 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긴장, 공허와 피로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이런 시대일수록 인간의 마음은 단순한 해결책보다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더 깊이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안전기지(secure base)는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에서 나온 개념이다. 내가 불안하고 흔들릴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지지해 주는 관계적 기반이다. 반면 ‘퀘렌시아'(Querencia)는 마음이 쉬고 힘을 회복하는 공간이며, 영혼이 다시 숨을 쉬는 정서적 안식처를 뜻하는 말이다. 전자는 관계의 언어이고, 후자는 공간의 언어이지만, 결국 두 개념은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 버텨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안전한 관계와 공간 안에서 회복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상담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 상담은 단지 심리적 기술을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고, 그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회복시키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전기지와 퀘렌시아는 단순히 상담이론의 언어에 머무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치유적 관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통로가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궁극적 안전기지이다.
인간은 본래 관계적 존재이다. 사람은 홀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또한 관계 안에서 회복되는 존재이다. 상담학이 애착의 중요성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 안에서 안전함을 느낄 때 세상을 탐색할 수 있듯이, 성인도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안에서만 자신의 감정을 열고 삶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관계는 한계를 지닌 관계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때로는 우리를 오해하고, 가까운 사람도 우리의 깊은 아픔을 다 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관계 때문에 상처받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기독교 신앙은 아주 중요한 진실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안전기지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고,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며, 상한 마음을 가까이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은 조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시는 분이다. 세상은 강한 자를 환영하고 약한 자를 밀어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분이다. 이 사실은 기독교 상담에서 매우 중요하다. 내담자는 먼저 자신이 문제 많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임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울면 약해 보일까 염려하고, 도움을 청하면 무능해 보일까 두려워하며, 자기 상처를 말하면 거절당할까 불안해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며, 우리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눈물까지도 기억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치유는 내 문제를 없애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다는 감각을 다시 배우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은 바로 그 안전감을 회복하도록 돕는 사역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수용과 경청, 인내와 자비를 반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궁극적 안전기지이심이 드러나는 것이다.
- 교회와 상담의 자리는 퀘렌시아가 되어야 하는 자리이다
퀘렌시아는 본래 스페인어로 가장 익숙하고 힘을 회복하는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퀘렌시아는 한 방의 고요함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따뜻한 목소리일 수 있으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무는 기도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퀘렌시아란 내 마음이 공격받지 않고, 내 존재가 해체되지 않으며, 내 영혼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자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이런 퀘렌시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집이 있어도 쉼이 없고, 교회에 다녀도 안식이 없고, 관계 속에 있어도 마음 둘 곳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인간이 단지 공간만으로 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용받는 경험 안에서 쉬는 존재이며, 안전하다고 느끼는 관계 안에서 비로소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존재이다.
기독교 상담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상담의 자리를 내담자에게 퀘렌시아가 되게 하는 일이다. 상담실은 분석의 장소이기 전에 안식의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말을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사람이기 전에, 그 사람이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담자가 자기 실패를 말해도 괜찮고, 수치심을 꺼내 놓아도 괜찮고, 눈물을 보이며 침묵해도 괜찮은 자리가 될 때, 상담은 비로소 치유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정답을 빨리 말해 주는 곳이기 전에, 지친 영혼이 숨을 고를 수 있는 퀘렌시아가 되어야 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현실 속 교회가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쉼이 아니라 더 큰 긴장과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앙이 강해야 한다는 압박,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조급함,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은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을 더 위축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먼저 머물게 하는 공동체인가”라는 질문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대하신 방식을 보면, 주님은 먼저 사람을 머물게 하신 분이다. 예수께서는 상처 입은 자를 급하게 몰아붙이지 않으셨고, 눈물 흘리는 자를 정죄하지 않으셨으며, 넘어진 자를 단번에 평가하지 않으신 분이다. 주님은 먼저 만나 주셨고, 들어 주셨고, 함께 계셔 주신 분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의 몸 된 공동체라면, 마땅히 사람들에게 퀘렌시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기독교 상담은 사람을 하나님께 다시 연결하는 회복의 사역이다
기독교 상담은 세속 상담과 여러 지점에서 만나는 영역이 있다. 경청과 공감, 수용과 반영, 정서적 지지와 관계 형성은 모두 중요한 상담의 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 상담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은 사람을 단지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도록 돕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처는 단지 감정의 문제만이 아닌 경우가 많다. 상처는 존재의 문제로 이어지고, 존재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로 이어지며, 의미의 문제는 결국 영적 질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왜 이런 일을 겪었는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가고, 그 질문은 다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기독교 상담은 인간의 고통을 단지 증상으로만 다루지 않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피는 사역인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담이 설교로만 흐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의 경청과 수용을 통하여 실제로 그 사랑을 경험하는 일이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기독교 상담자는 정답을 많이 말하는 사람보다,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자신의 태도 속에 담아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경청 속에서 하나님의 인내가 느껴지고, 그의 수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느껴지며, 그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전해질 때, 상담은 말 이상의 치유가 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상담은 회복을 개인 안에만 가두지 않는 사역이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된 사람은 다른 이의 안전기지와 퀘렌시어가 되어야 한다. 자기 상처만 붙들고 있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물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자기 불안 때문에 타인을 밀어내던 사람이 이제는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 가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회복력이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방식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치유되면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관계가 회복되면 한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상담의 목표는 단지 증상을 줄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목표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 존재를 다시 받아들이고, 안전하게 사랑받는 법을 배우며, 나아가 다른 이에게도 그런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상담은 문제를 다루는 기술이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존재 안에 다시 뿌리내리게 하는 목회적 돌봄의 사역인 것이다.
맺는말이다
안전기지는 나를 붙들어 주는 관계의 자리이며, 퀘렌시아는 내가 다시 살아나는 회복의 자리이다. 그리고 기독교 상담은 이 두 자리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발견하도록 돕는 사역이다.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궁극적 안전기지이시며, 지친 존재가 돌아가 안식할 수 있는 참된 퀘렌시아이신 분이다. 교회와 상담의 자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더 많은 정보보다 더 깊은 수용이 필요하고, 더 빠른 해결보다 더 안전한 머묾이 필요한 시대이다. 사람은 분석만으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리에서 비로소 다시 일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먼저 하나님 안에서 안전기지를 발견해야 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누군가에게 퀘렌시아가 되어 주어야 하는 존재이다.

안전기지(secure base)와 퀘렌시아(Querencia)
사람은 누구나 지치고 흔들리는 존재이다. 삶의 무게가 클수록 마음은 더욱 숨을 곳을 찾게 되는 법이다. 상담학은 인간이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 안전한 관계 안에서 회복되는 존재임을 보여 주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안전기지와 퀘렌시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안전기지는 나를 붙들어 주는 관계적 기반이며, 퀘렌시아는 내가 다시 숨을 쉬고 힘을 회복하는 자리이다. 이 두 개념은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 회복의 깊은 진실을 함께 말해 주는 개념이다.
- 사람은 안전기지가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 존재이다
애착이론에서 말하는 안전기지는 단순히 편안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불안하고 흔들릴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받아 주는 관계적 기반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라는 안전기지를 가지고 있을 때 세상을 탐색할 수 있듯이, 성인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지지해 주는 관계가 있을 때 사람은 삶의 어려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상담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문제 자체 때문만이 아니다. 그 문제를 함께 견뎌 줄 안전기지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감정을 표현하면 비난받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무시당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당했던 사람은 점점 자기 마음을 숨기게 되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내면은 늘 긴장 상태에 머물게 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회복의 출발점은 강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안전한 품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법이다.
- 사람은 퀘렌시아를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존재이다
퀘렌시아는 본래 스페인어로 가장 익숙하고 힘을 회복하는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마음이 쉬고 영혼이 다시 숨을 쉬는 공간, 곧 정서적 안식처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이것은 꼭 물리적인 장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조용한 방이 퀘렌시아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품, 한 공동체, 한 시간의 기도가 퀘렌시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상담학적으로 보면 퀘렌시아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긴장만 하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회복될 수 있는 자리가 없는 사람은 결국 정서적으로 고갈되는 존재가 된다. 쉬어도 쉬지 못하고, 사람들 가운데 있어도 외롭고, 사랑을 받아도 불안한 상태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회복은 단지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회복은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는 일이다. 상담실이 그 자리가 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그 자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 머무는 기도의 시간이 그 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퀘렌시아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을 채워 주는 자리이다.
- 사람은 서로에게 안전기지와 퀘렌시아가 되어 주어야 하는 존재이다
상담은 단지 기술이 아니다. 상담의 핵심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안전한 존재가 되어 주는 것에 있다. 좋은 상담자는 내담자를 서둘러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대신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감정을 견뎌 주고, 판단하지 않는 태도로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다. 그럴 때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안전기지가 되고, 상담실은 퀘렌시아가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상담실 밖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이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누군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 주는 것, 약한 모습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 들기보다 함께 있어 주는 것, 이러한 태도들은 한 사람에게 큰 회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말은 많지만 쉴 자리는 적고, 관계는 많지만 안전한 품은 적은 시대이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누군가가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주는 사랑이다. 사람은 정답 속에서보다 안전한 관계 속에서 더 깊이 변화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안전기지와 퀘렌시아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한 자리의 쉼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삶이 고단할수록, 관계가 힘들수록, 마음은 더 깊이 숨을 곳을 찾게 되는 법이다. 상담학에서는 이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안전기지를 말한다. 안전기지는 내가 흔들릴 때에도 나를 지지해 주고 받아 주는 관계적 기반이다. 사람은 안전기지가 있을 때 비로소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또 하나의 말은 퀘렌시아이다. 퀘렌시아는 마음이 쉬고 영혼이 숨을 고르는 자리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따뜻한 품이 퀘렌시아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시간이 퀘렌시아가 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문제만 해결된다고 회복되는 존재가 아니라,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경험할 때 다시 살아날 힘을 얻는 존재이다.
신앙 안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안전기지이시며, 동시에 참된 퀘렌시아이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판단보다 경청을, 조급한 충고보다 따뜻한 동행을 내어 줄 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살리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