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동양철학에서 보는 인간 본성론
1.고대의 本性說
– 인간 본성에 관한 본격적 논의 대두 – ‘戰國시대’(기원전 400 – 기원전 250) 부터
– 인간은 과연 합리적인 존재인가 불합리적인 존재인가?
– 행동의 원동력인 마음의 본질을 좋은지 나쁜지, 선한지 선하지 않은지 (악한지)의 측면에서 문제 제기
– 다양한 본성론
性善說 :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性惡說 :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하지 않다)
善惡混在說 : 인간의 본성에는 선한 요소도 악한 요소도 있다.
白紙說 (性無記說) : 인간의 본성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성선설은 선악혼재설로 나아가고, 성악설을 백지설로 나아간다.)
2.맹자의 성선설
-생득적인 선의 맹아 : 四端 (양심)
惻隱之心 – 仁의 端緖
羞惡之心 – 義의 端緖
辭讓之心 – 禮의 端緖
是非之心 – 智의 端緖
-이 사단 (양심)이 모든 이에게 있으므로 이들이 억제 제어되지 못하게 잘 키우면 네 가지 덕을 갖춘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맹자의 본성은 생득적인 것임과 동시에 도덕규범적인 것을 의미
-한편 또한 생득적인 이목의 감각기관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이끌려 마음의 기관인 양심의 활동이 막혀 기능하지 않게 될 때 악이 생긴다.
3. 순자의 성악설
-타고난 그대로의 본성은 惡하며, 善은 작위 (僞)에 의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소인배적이며, 본래 무색, 또는 손보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것이라고 표현.
-그러나 인간 누구나가 성인 곧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타고난 그대로의 인간에게 선이 없기에 외부에서 규범을 가져와야 한다. 그리하여 禮 義 즉 관습의 집성에 의한 감화라든가 규범이나 형벌에 의한 교정 등을 통해 타고 난 그대로의 성정을 교도하고 지도함으로써 비로소 평화롭고 이상적인 상태에 이른다.
-도덕적 측면에서 하늘 (천지자연)과 인간이 서로 무관하다. 천지자연의 성질을 그대로 따르면 욕망이 서로 충돌하게 되어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혼란이 곧 악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을 선하지 않다 (악하다)고 함.
-선한 가치가 하늘에서 부여 받는다는 발상이 부정됨에 따라 결국 인간은 선하게 만드는 예의나 규범은 곧 성인의 작위에 근거.
-순자의 사상은 결국 바깥으로부터의 교화를 중시하고 강조함.
-순자와 맹자의 차이는 생득적인 성질과 기능 중 어느 것을 본성 곧 타고난 그대로의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느냐에 의한 것.
4.기타 철학자
<도가>
-타고난 그대로의 실질은 선하다.
-인간들이 말하는 선악을 넘어서서 무조건적으로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
-인간들의 작위에 의해 만들어진 인의 등의 도덕으로 대표되는 문화의 외피를 벗겨내고 타고난 본래의 것 즉 처음으로 되돌아 갈 것을 주장.
<법가>
-정면으로 본성을 논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타고난 그대로 방치하면 혼란에 빠진다는 입장으로 순자의 인간관과 일치.
-인간은 본래 공리를 좇는 존재로서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보려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방임하면 사회질서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묵자>
-인간이란 파랑으로 물들이면 파란색이 되고 노랑으로 물들이면 노란색이 되는 천이나 베와 같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물들어야 하는 곳은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고 이롭게 하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뜻 (天志)에 물들어야 한다.
5. 주요 어록
<孔 子>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익힘 (학)에 의해 차이가 커진다. _ 논어 양화편
<孟 子>
사람들은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 (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
선왕이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두어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사 (不忍人之政)을 시행하셨으니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사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은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일 수 있은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에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지니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며 향당과 붕우들에게 인자하다는 명예를 구해서도 아니며 잔인하다는 악명을 싫어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측은해 하는 마음’ (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 (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 (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 지심은 인 (仁)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 (義)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 (禮)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 (智)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 (四端)을 가지고 있음은 사체 (사지)를 가지고 있은 것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요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넓혀 채울 줄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 만일 능히 이것을 채운다면 충분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 만일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_ 맹자 공손추 상
공도자가 말하였다. “고자 (告子)는 말하기를 ‘性은 善함도 없고 不善함도 없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性은 善을 할 수도 있으며 不善을 할 수도 있다. ( )’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性이 善한이도 있고 性이 不善한 이도 있다. ( ) 하니, 지금 선생님께서 性이 善하다고 (性善)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저들은 모두 틀린 것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情으로 말하면 善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말하는 善하다는 것이다. 不善을 하는 것으로 말하면 타고난 재질 (才質)의 죄가 아니다.
측은지심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수오지심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공경지심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시비지심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니,
측은지심은 인이요 수오지심은 의요 공경지심은 예요 시비지심은 지이니 仁, 義, 禮, 智가 밖으로 부터 나를 녹여 들어오는 것이 아니요 내가 본래 소유하고 있건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라고 한 것이니, 혹은 선악의 차이가 서로 배가 되고 다섯 배가 되어서 계산할 수 없는 것은 그 재질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_ 맹자 고자상
<荀 子>
사람의 본성은 惡하다. 善한 것은 인위적이다 (인간의 본성은 惡이고 善함은 작위의 결과이다) (人之性惡 其善者 僞也) _ 순자 성악편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이익을 쫓는다.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기고 사양은 사라진다. 질투와 증오를 품고 태어나 그것을 그대로 따르니 남을 해치는 마음이 생기고 진심과 신의는 사라진다. 눈과 귀 같은 생리적 욕망을 갖고 태어나니 좋은 소리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게 되고 이를 그대로 따르므로 음란이 생기고 예의와 문화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 性과 정 情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분수를 넘거나 도리를 어지럽혀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의 교화나 예의의 도리가 있어야 사양이 생겨나고 도리에 들어맞아 세상이 다스려 진다. 이로써 보면 인간의 성이 악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선해지는 것은 작위의 결과이다.
굽은 나무는 곧은 자를 대고 불로 펴야 곧아지고, 무딘 쇠는 숫돌에 갈아야 비로소 날카로워진다. 인간의 성은 악하므로 스승의 규법을 배워야만 비로소 발라지고 예의가 있어야 그제서 다스려진다. 스승의 법이 없다면 치우치고 부정하게 되며, 예의가 없다면 도리에 어긋나고 어지러워져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옛 성인은 인간이 성이 악하고 또 치우치고 부정하고 도리에 어긋나고 어지럽다고 보아, 예의를 창조하고 법도를 제정해 인간의 성정을 바로잡아 바르게 하고, 인간의 성정을 교화시켜 인도하셨다. 이로써 세상 사람 모두가 다스려져 도리에 합당해진다. 스승의 법에 교화되고 문과 학을 쌓으며 예의를 따르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성정을 그대로 쫓아 거리낌 없이 행동하면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이 악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선해지는 것은 작위의 결과이다.
인간의 성은 배고프면 배불리 먹으려 하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려 들고 힘들면 쉬고 싶어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성정이다. 사람이 굶주리더라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보면 먼저 먹지 않는 것은 사양해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쉬지 않는 것은 다른 이를 대신해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양보하고 동생은 형에게 양보하고, 자신이 아버지의 수고를 대신하고, 동생이 형의 노고를 대신한다. 이 두 가지 행동 양상은 모두 성에 반하고 정과 어긋나지만, 효자의 도리이고 예의 문화이다. 그러므로 성정을 따르면 사양할 수 없고, 사양한다면 성정에 어긋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이 악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선해지는 것은 작위의 결과이다. _ 순자 성악편
맹자가 “사람이 배우는 것은 그 본성이 선해서다”라고 했는데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을 아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여 사람의 본성과 인위적인 것의 구분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하늘이 이뤄준 것이니 배울 수도 없고 힘쓸 수도 없다. 예의라는 것은 성인이 마련한 바니 사람들이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고 따르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배울 수도 없고 힘쓸 수도 없는데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본성’이라고 말하며 배워서 할 수 있고 힘써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하니 이것이 본성과 인위적인 것의 구분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은 눈에서 벗어나지 않고 밝게 들을 수 있는 능력은 귀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눈이 분명하게 보고 귀가 밝게 듣는 능력은 배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맹자가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선한데 장차 모두 그 본성을 잃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태어나면서 그 순박함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자질로부터 멀어져서 끝내 잃어서 없어진다. 이것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_ 순자 성악편
맹자가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라고 했는데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무릇 예나 지금이나 하늘 아래 ‘善’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고 태펑한 상태이고‘惡’이라고 하는 것은 치우치고 혼란한 상태이니 이것이 善과 惡의 구분일 뿐이다.
지금 진정 사람의 본성을 따른다면 분명 도리에 맞고 태평한 상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성왕이 필요할 것이며 어디에 예의가 쓰이겠는가? 비록 성왕과 예의가 있더라도 도리에 맞고 태평한 세상에 보탤 수 있겠는가?
지금 그렇지 않으니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사람의 본성이 악하고치우쳐서 바르지 못하고 혼란해져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을 위해 권위를 가진 군왕을 세워 다스렸고 예의를 밝혀 교화하였으며 법도를 바르게 세워 다스렸으며 형벌을 중하게 하여 범죄를 막아서 천하가 모두 다스려지고 선 (善)에 적합하도록 했다. 이것이 성왕의 정치이고 예의의 교화이다.
지금 가정해보자. 권위를 가진 군왕을 제하고 교화하는 예의를 없애고 바른 법도에 의한다스림을 제하고 형벌로 금한 금기를 없애고 이것으로 의거해 천하 백성이 함께 사는 것을 살펴보자. 이와 같은 경우 강한 자는 약자를 해치고 빼앗을 것이고 큰 집단이 작은 집단을 모질게 대하며 어지럽게 할 것이니 천하가 혼란스럽고 서로 패망하는 것은 경각도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은 명백하고 그 선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_ 순자 성악편
사람은 나면서부터 본디 소인이다. 스승과 법도가 없다면 오직 이익만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나면서 부터 본디 소인이다. 난세에 난잡한 풍속을 접하니 이는 적은 것에 적은 것을 겹치는 것이고 어지러움에 어지러움을 더하는 것이다. 군자가 지위를 얻어 다스리지 않으면 마음을 열어 덕을 가르칠 길이 없다. _ 순자 영욕편
性 (本性)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情은 性의 성질이며, 欲은 情의 반응이다. _ 순자 정명편
예의 (禮儀)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욕망을 지닌다. 욕망하지만 얻지 못하면 구하게 되고, 구하면서 한계를 헤아리지 않으면 다투지 않을 수 없고, 다투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하면 공궁하게 된다. 선왕은 그 혼란을 미워하기 때문에 예의를 제정하여 나누었고, 사람들의 욕망을 다스리며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욕망은 반드시 물자로 인해 곤궁하지 않았으며, 물자는 반드시 욕망에 의해 움츠러들지 않았으니, 두 가지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성장하게 했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_ 순자 예론편
<告 子>
고자가 말하였다. ‘생의 본능을 성이라 한다 (태어난 그대로의 것이 성이다) (生之謂性)’ _ 맹자 고자상
고자가 말하였다. “식 (食) 색 (色)이 본성이니 仁은 내편에 있고 義는 외편에 있다. _ 맹자 고자상
고자가 말하였다. “본성은 여울물과 같다 (性猶湍水也). 이것을 동방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방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니, 사람의 본성이 善과 不善에 구분이 없음은 물이 동서에 분별이 없는 것과 같다. _ 맹자 고자상
공도자가 말하였다. “고자는 성은 선함도 없고 불선함도 없다”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성은 선을 할 수도 있으며 불선을 할 수도 있다. ( …..… )”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성이 선한 이도 있고 성이 불선한 이도 있다. (……. )” 하니…, _ 맹자 고자상
<揚 子>
사람의 성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으니 선을 닦으며 선한 사람이 되고 악을 하면 악한 사람이 됟다. _ 법언 수신편

김춘택 (시드니 동양고전읽기 주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