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목회자인문학교실, 2026년 5월 모임에 “종교적 테러리즘” (1) 나눠
손호현 저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제12장 나눔 … 다음모임은 중간방학 후 8월 3일 (화) 오전 10:30,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에서 [발제전문 포함]
매월 첫째 화요일 “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목회자인문학’ 교실”은 5월 모임을 지난 5월 5일 (화) 오전 10시 30분,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 (L1 / 239 Church St, Parramatta NSW 2150)에서 실시했다. 이날 임운규 목사는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손호현 저) 제12장 “종교적 테러리즘” (1)을 발제했다.

발제자 임운규 목사는 서두에 “12장은 ‘종교적 테러리즘’을 다룬다. 세계관은 마음의 원근법이다.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성을 지닌다. 미술에서 원근법으로 드러나듯 아무도 내가 서 있는 눈의 위치에서 똑같이 세상을 볼 순 없다. 문화와 시대는 자신의 독특한 의미 체계, 곧 세계를 보는 그들만의 마음의 원근법을 지닌다.”라고 밝히고 ‘중국인의 동물 분류법’ ‘문명의 충돌’ ‘폭력 없는 미래, 폭력 없는 종교’ 순으로 발제했다.
발제 후 토론회가 이어졌다. “다름은 환원될 수 없는 가치이다. 차이는 그것 자체로 아름답다. 문명과 종교 그리고 관용의 미래는 바로 이 다름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데 있다. 타인, 타문화, 타종교의 다름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성의 관점을 고수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인류의 유아기적 모습이다. 이를 벗어나지 못할 때 타자의 세계를 자기중심성이라는 침대에 올려놓고 칼로 제단하는 오류 (프로크로스테스의 침대)를 범한다” “헌팅턴은 과거 탈종교적 세속화의 과정과는 반대로 오늘날 문명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해가는 현상을 케펠의 “신이 설욕”이라는 표현을 차용해 설명한다. 신은 문명의 세속화 과정을 거꾸로 뒤집어 오늘날 문명의 종교화 과정으로 전환시킴으로 자신의 설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의 설욕은 특히 이슬람권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종교의 충돌로 몸살이다.” 등 저자의 문제제기에 대한 생각들을 나눴다.
한편 홍길복 목사의 ‘목회자 인문학’ 다음모임은 중간방학 후 2026년 8월 3일 (화) 오전 10시 30분,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 캠퍼스 (L1 / 239 Church St, Parramatta NSW 2150)에서 모인다.

홍길복 목사의 ‘목회자 인문학’ 2026년 8월 모임 안내
– 일시: 2026년 8월 3일(화) 오전 10:30
– 장소: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 캠퍼스
– 주소: L1 / 239 Church St, Parramatta NSW 2150
– 대상: 목회자, 신학공부 하신 분, 신학생
– 문의: 임운규 목사
.전화: 0425 050 013 (문자 문의 환영)
.이메일: holyhillau@gmail.com
[5월 5일자 발제 전문]
제12장 종교적 테러리즘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 손호현 저 / 동연출판사 / 2015년)

중국인의 동물 분류법
세계관은 마음의 원근법이다.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성을 지닌다. 미술에서 원근법으로 드러나듯 아무도 내가 서 있는 눈의 위치에서 똑같이 세상을 볼 순 없다. 문화와 시대는 자신의 독특한 의미 체계, 곧 세계를 보는 그들만의 마음의 원근법을 지닌다.
저자는 미셸 푸코의 저서 ‘말과 사물’에서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서 동물분류기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예) 황제에 속한 동물 / 향로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 사육동물 / 젖을 빠는 돼지 / 인어 / 전설상의 동물 / 주인없는 개 /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 광폭한 동물 / 셀 수 없는 동물 / 낙타털 같이 미세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동물 / 그 밖의 동물 / 물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 멀리서 볼 때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
여기서 어떤 일관성이 있는 분류체계를 발견하기 어렵다. 통상적으로 서양문명이 17세기 이후 과학혁명에 기초하여 만든 분류법인 종-속-과-목-강-문-계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하지만 중국인의 생활환경에서 오히려 전자의 구분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이유에서더 체계적이고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반문하며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자신과 타자의 다름이 폭력적으로 붕괴되어서는 안됨을 푸코는 여기서 호소하는 것이라 한다. 다름은 환원될 수 없는 가치이다. 차이는 그것 자체로 아름답다. 문명과 종교 그리고관용의 미래는 바로 이 다름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데 있다.
타인, 타문화, 타종교의 다름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성의 관점을 고수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인류의 유아기적 모습이다. 이를 벗어나지 못할 때 타자의 세계를 자기중심성이라는 침대에 올려놓고 칼로 제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예: 프로크로스테스의 침대 / 투탕카멘 1세가 유프라테스강의 흐름이 나일강과 반대로 흐르자 ‘이 강은 뻔뻔스럽게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잖은가!’ 비석에 새겨넣음).
하류에서 상류로 흐르는 강이 없듯이 모든 문화와 종교의 강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환원될 수 없는 다름의 가치를 지닌 체 각자에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간다.

문명의 충돌
냉전이라는 소련과 미국의 체제대립이 20세기 말에 마침내 종언을 고하게 된다.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글에서 냉전 종식으로 더욱 평화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고 예언한다.
하지만 후쿠야마의 예언은 십 년이 조금 지나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2001년 9.11테러를 시작으로 미국이 주도한 수차례의 전쟁을 목도해야 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사라졌는지 몰라도, 국지적, 국제적 갈등은 여전히 심각하고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거의 몰락한 지금 인류는 왜 아직도 싸우고 있는가? 새뮤얼 헌팅턴은 갈등의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과거가 이념의 충돌이었다면 다가오는 미래는 문명의 충돌이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세계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 계급갈등이 아니라 이제 문명의 낯선 이질성이 폭력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한 문명권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가 종교적 정체성이라고 헌팅턴은 꼽는다. 상이한 종교가 상이한 문명권의 단층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문명은 종교라는 토대 위에 놓여 있다.
헌팅턴은 과거 탈종교적 세속화의 과정과는 반대로 오늘날 문명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해가는 현상을 케펠의 “신이 설욕”이라는 표현을 차용해 설명한다. 신은 문명의 세속화 과정을 거꾸로 뒤집어 오늘날 문명의 종교화 과정으로 전환시킴으로 자신의 설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의 설욕은 특히 이슬람권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종교의 충돌로 몸살이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지배적 대립은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가장 격렬한 대립은 이슬람 사회와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할 것이다.”
헌팅턴은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은 둘 다 자신들의 신앙만 절대시하며 공격적 개종을 추구하는 배타성을 지닌 선교적 종교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명과 종교의 충돌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을 기준으로 세계 종교 인구에서 기독교인 29.9%, 이슬람인 19.2%를 각각 차지하여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에 비해 가장 큰 규모의 신도들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이 정면충돌한다면 지구는 대참사를 맞이할 것이다.

폭력 없는 미래, 폭력 없는 종교
영화 ‘킬링필드’ (1984)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음악은 존 레넌의 ‘이매진’이다. 가사가 주는 메시지가 크다.
과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존 레넌의 노랫말처럼 ‘상상해 보라. 종교없는 세상을’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가군도, 마녀사냥도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 명예살인도..”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종교적 테러리즘으로 촉발되는 문명의 대충돌이다. 헌팅턴의 진단처럼 “종교적 민족주의는 세속적 민족주의를 밀어내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가 테러리즘의 이유가 되는 것은 그 얼마나 역설적인가? 과연 그것은 신의 설욕인가?
본서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없는 종교, 폭력없는 기독교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저자는 저자 능력의 한계 내에서 앞으로의 논의를 폭력없는 기독교의 가능성에만 제한하도록 한다. 다른 종교인들도 같은 시도를 하고 있으리라 희망하며…

배타주의 기독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신은 기독교인만 사랑하는가? 예수는 기독교인만 구원하는가? 등의 질문을 두고 기독교는 오랫동안 씨름해왔다. 그 결과 비기독교인에 대해 크게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라는 세가지 종교적 태도가 제시되었다.
첫째로 ‘배타주의’는 오직 기독교인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저자는 그 배경에 주목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신학자 키프리아누스였다. 그의 진술은 구체적인 정황이 있다. 3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로마 황제의 박해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는데, 배교자 문제로 한편은 참회하면 다시 받아들이자는 온건한 입장과 다른 쪽에서는 결코 배교자를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교회를 쪼개어 분파주의적 집단을 따로 형성했다. 키프리아누스의 진술은 이러한 기독교 분파주의자들에게 대한 일종의 경고였으며, 하나의 교회라는 기독교의 통일성을 지키려는 시도였다. 비록 그들이 개인적으로 높은 도덕성을 가지며 기독교의 이름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할지라도 하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떠난 분파주의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의 기독교인들 스스로에 대한 경고는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구체적 정황은 망각된 채 비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정죄하는 일종의 보편적인 교리로 고착되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종교다원주의의 존 힉은 배타주의에 대해 평가하기를 “배타주의는 … 기독교의 복음을 한번도 접할 수 없었거나 혹은 수용하지 않은 대다수의 인류의 하나님이 영원한 형벌로 저주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이 있는 견해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한 하나님은 사실 악마와 같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종교가 발생하기 이전에 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비판적 논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본서의 저자는 “개인적으로 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진술이 지니는 역사적 우연성과 신앙의 필연성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포용주의 기독교: 익명의 기독교인들
단테의 ‘신곡’에 첫 번째 지옥에는 예수 이전에 태어난 덕이 높은 이들 (호머, 소트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발견된다.
포용주의는 비기독교인들과 타종교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에서 비기독교인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이들을 가리켜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칼 라너의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포용주의는 네 가지 논지로 요악할 수 있다.
1) 예수 전에 살았던 사람들 혹은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조화될 수 없다.
2) 이런 이유에서 다른 종교들은 그 나름의 실수와 결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전달하는 불완전한 형태이다.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 복음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따라서 타당성을 지닌다. 하지만 복음이 선포된 이후에는,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적 견해에서 볼 때 타당성을 지니지 않은 것이다.
3) 따라서 타종교를 믿는 다른 종교인들도 일종의 ‘익명의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있다.
4) 또한 다른 세계 종교들이 기독교의 선교에 의해 현실적으로 대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인류의 삶의 한 필연적 모습이며, 기독교는 다른 죵교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개발해야 한다. (예: 사도행전 17:23 바울의 ‘알지 못하는 신에게’)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포용주의는 아직 폭력없는 기독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것은 기독교 안에 여전히 잔존하는 일종의 종교적 제국주의의 표현이 아닐까?
다원주의 기독교: 모이는 다원주의와 흩어지는 다원주의
다원주의 기독교는 크게 두 입장으로 저자는 ‘모이는 다원주의’와 ‘흩어지는 다원주의’라 부른다.
‘모이는 다원주의’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절대자를 향한 다양하고 평등한 길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대표적인 형태가 존 힉에서 발견된다. 그는 세계 종교인들이 지향하는 대상은 사실 동일한 하나라고 보며 단지 이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한다.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는 세 가지 중요한 논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태도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태도로 변해야 한다.
2) 기독교는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버려야 한다.
3) 모든 종교의 궁극적 추구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중심을 찾는 것이다.
반면에 ‘흩어지는 다원주의’는 하나의 보편적인 종교 혹은 종교적 실재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 종교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종의 가족 유사성을 지닌 각각의 고유한 문화-언어적 체계라고 보는 입장이다. 힉이 모이는 다원주의가 주장하듯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단일한 핵심요소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가 각각 조금씩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족 유사성 때문이라는 논지이다. 이처럼 흩어지는 다원주의는 환원될 수 없는 개별 종교의 특수성과 그 다양한 얼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정상에서 만나지 않고 달라도 충분히 좋다. 그래서 서로에게 진정한 관용과 존중의 태도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개인적으로 포용주의, 모이는 다원주의, 흩어지는 다원주의 모두가 폭력없는 기독교를 가능케 하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전 이론
이제 종교적 신앙에 기초한 실제적인 전쟁관을 살펴보자. 성전이론, 정전이론, 평화주의가 대표적인 태도이다.
‘성전’ 이론이란 기독교의 십자군이나 이슬람의 지하드의 경우처럼 어떤 종교적 적대자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싸우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보는 전통을 가리킨다 (예: 교황 우르반 2세의 십자군 전쟁, 베르나르의 성전 설교).
정전 이론
정당한 전쟁을 의미하는 ‘정전’ 이론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시작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의 ‘만물의 아버지이자 만물의 왕’이라 부르면서 “모든 존재들은 투쟁을 통해서만 존재하였다가 사라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전쟁은 인류 역사의 영원한 요소이며 인간의 두 측면, 곧 보다 나은 측면과 보다 끔찍한 측면 둘 다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플라톤에게 전쟁은 오직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국가’는 일종의 군사적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적 국가는 철학자 왕과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들 그리고 일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시기 키케로는 전쟁은 오직 국가의 안전과 명예를 위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플라톤을 계승하며 “전쟁에 나가는 유일한 변명은 우리가 피해를 입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이다”라고 한다.
신약성서에는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전쟁에 대한 명확한 성서적 지침의 부재와 더불어 신학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들을 제시한 것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신학자들은 철저한 평화주의를 주장한 반면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주후 173년을 기점으로 로마 군대에 기독교인들이 점증적으로 취직을 하였다 (3가지 이유로 직업주의, 이교도의 위협, 재림의 지인).
5세기 들어 로마제국의 기독교적 정전이론 창시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자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최초의 기독교 황제들의 시기에 활동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황제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적들을 살해할 수 있도록 이론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것이다. 플라톤과 키케로를 따르면서 “우리는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아간다” 즉 전쟁이 항상 ‘목적’으로서는 잘못된 것이지만, ‘수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서 기독교인이 군사적 행동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전쟁 수행의 잘못된 동기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위해서 싸운다는 태도를 지녀야 하며 분노나 탐욕의 이유에서 전쟁을 수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키테로와 유사하게, 아우그스티누스는 전쟁이 정의로우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전쟁은 오직 ‘올바른 의도’에 기초하여 시작될 때 정당하다. 둘째, 전쟁은 ‘합법적인 정부’에 의해 시작될 때 정당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전의 두 조건을 발전시켜,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쟁이 정의롭게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전쟁의 선포를 명령할 수 있는 합법적인 주권적 군주의 권위이다. 개인이 전쟁을 선포할 어떠한 권리도 없다. 둘째는 정당한 이유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격당한 자들은 앞서 그들이 행한 잘못 때문에 공격받아 마땅한 경우라야 한다. 셋째는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의 올바른 의도이다. 그들을 악을 피하고 선을 향상시킬 것을 목표해야 한다.”
오늘날 정전 이론은 국제적 분쟁을 해결하는 실제적인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예: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창설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국제기구는 오직 세계 평화와 국제적 이익을 위해서만 전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정전 이론은 다수 사람들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설득력을 가진 논리로 받아들여지지만, 모호성과 난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예: 과연 누가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할 수 있는 합법적인 주체인가하는 문제, 합법적인 정부뿐만 아니라 혁명가들, 분리독립하는 국가의 일부지역 단체들, 국가내 인종적으로 다른 부족들, 다른 종교적 집단들, 테러리스트 그룹 등).
평화주의
평화주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입장인 예수에게서 유래한다고 믿는다 (마 5:38-40; 유스티누스의 순교, 오리게네스의 가르침, 기독교로 개종한 군인 막스밀리안).
이러한 평화주의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군복무를 거부함으로 로마 제국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모두가 기독교인같이 행동한다면 제국은 망할 것이라는 논리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자신의 군대 문장으로 십자가를 사용하여 승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나중에 로마제국의 국교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크게 네 가지 이유에서 기독교인들이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을 피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1) 종말론, 2) 군대 내 우상숭배, 3) 교회와 로마제국의 갈등, 4) 기독교 지도자들의 평화주의다.
예수의 평화주의는 거의 2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신약성서를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읽으며,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톨스토이의 저작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인도인에게 보내는 편지’). 간디는 톨스토이의 ‘인도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비폭력 저항을 선택하게 된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번역 허락 요청도 했다). 간디는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이 비폭력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보지 못하는 이가 어쩌면 기독교인들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비폭력의 가르침을 본 몇몇 기독교인이 존재하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의 기독교적 원칙을 간디를 통해서 재발견하게 되고 간디에 대한 학위 논문을 집필하기도 한다. 그는 “나는 ‘다른 빰도 돌려라’는 철학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철학이 오직 개인들 간의 갈등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인종들과 국가들 간의 갈등이 발생할 때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간디를 읽은 후에, 내가 얼마나 틀렸는지 깨닫게 되었다”라고 회고한다.
※돋보기
종교적 테러리즘의 미래에 대한 5가지 시나리오
정치학자 위르겐스마이어의 다섯 가지 가능한 미래 시나리오 분석을 보자.
1) 폭력을 파괴하기 : 첫 번째 시나리오는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
2) 폭력을 겁주기 : 두 번째 시나리오는 폭력을 통한 위협을 통해 종교적 테러리스트들이 행동하기를 주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입장).
3) 폭력의 승리 : 세 번째 시나리오는 종교적 테러리즘이 승리하는 경우이다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간의 갈등이 정치적 협정으로 진전된 것).
4) 정치와 종교의 분리 : 네 번째 시나리오는 갈등의 종교적 측면이 배제되면서, 종교는 단지 도덕적 혹은 형이상학적 영역에 제한되는 것을 통해, 평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5) 정치를 종교로 치유하기 : 위르겐스마이어가 제시하는 마지막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흥미롭게도 종교적 폭력을 치유하는 힘이 바로 종교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참된 종교적 가르침이 정치적 영역에서도 포용되어야 하며, 정치적 영역은 종교적, 도덕적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지의 우화 : 똘레랑스와 문명의 대화
레싱은 ‘현자 나탄’에서 모든 인류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종교적 똘레랑스를 촉구한다. 살라딘이 어느 종교가 참종교인지 묻자 현자 나탄은 ‘반지의 우화’를 소개한다.
레싱은 반지의 우화를 통해 종교 간에 누가 옳고 틀렸는지, 누가 낫고 못한지, 누가 좋고 나쁜지 등의 진위, 우열, 선악 따위를 가지고 시비하는 것을 벗어나자고 조언한다. 이란의 전 대통령 하타미도 9/11 테러 이후 인류를 이제 ‘문명의 충독’에서 ‘문명의 대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호소한다.
신 앞에서 자신만이 진리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은 종교적 태도라기보다는 오만이다. 아무도 자신의 신앙이나 신학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마치 자신이 신의 진리를 지키지 않으면 선이 무너질 것 같은 오만함과 불안에서 벗어나야 한다. 종교가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종교를 지켜야 한다. 거기에 폭력과 오만과 종교적 테러리즘에서 벗어난 자유와 평화를 향한 지혜가 있는 것이다. 폭력없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같이 폭력없는 종교는 스스로의 신앙으로 자신을 구원해서는 안 된다. 오직 신만이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폭력 없는 종교와 폭력의 종교,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종교와 전쟁의 관계는 미래에 어떻게 될까? 종교가 없다면 더욱 평화로울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더 끔찍할 수도 있다. 오만과 욕망의 테러에 대항하여 싸울 인류의 한줄기 양심의 빛마저 꺼져버릴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미래가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발제자 : 임운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