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나의 북한 방문기 (8, 9)

나의 북한 방문기 (8)
<1997년 10월 19일 (주일) 평양과 강동군 – 약간 흐렸다>
어제 토요일엔 너무 지쳐서 저녁도 먹지않고 9시간이나 푹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도 마음도 많이 가벼워졌다. 예레미야서를 계속 읽는다. 이 눈물의 선지자는 내가 여기 북조선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아침 10시 봉수교회에서 드리는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주일이다. KCF는 우리 UCA 대표단에게 특별한 배려를 했다. 우리 4명에게는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Henderson목사와 나는 단상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미국과 독일과 남한에서 오신 손님들 10여명과 우리 일행들은 예배당 제일 앞 좌석으로 안내했다. 지난 월요일 베이징에서 만났던 오재식선생도 어제 평양으로 들어와 오늘 예배에 함께했다. 출석한 교인들은 한 백 이삼십여명 쯤 되어 보인다. 후에 이곳 봉수교회의 담임인 리봉성목사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봉수교회는 조직교회로써 장로, 권사, 집사를 포함하여 교인들이 모두 150명 쯤 된다고 한다. 성가대석에는 약 15명 쯤 되는 대원들이 앉아서 전주와 기도송과 후주를 했다. 보통 우리가 드리는 주일예배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북조선에는 남조선 보다 훨씬 많은 교회와 신도들이 있었으나 <조국해방전쟁>이후 미제들이 대부분의 교회당들을 폭격하여 거의 다 파괴되었고 신도들도 대량으로 죽임을 당한데다가 또 일부는 남쪽으로 끌려가서 교회나 신도들이 별로 없었는데 그런 중에서도 수령님의 배려로 봉수교회당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했다. 1988년 평양 만경대구역에 건축된 이 최초의 개신교회당 옆에는 조선기독교도련맹 본부와 평양신학원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후기: 이날 우리가 방문했던 봉수교회당은 2008년에 남한의 예장 통합측이 재정 지원을 하여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현재 북에는 1992년에 신축된 칠골교회와 이곳 봉수교회, 이렇게 두 개의 개신교 예배당이 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는 종교학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를 만나는 이들마다 하는 말은 비슷하다. <이 모든 것은 다 어버이 수령님의 은덕이지요>

시간이 되자 리목사의 인도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반주에 따라 묵도한 다음, 다같이 찬송가 <날 구원하신 예수>를 불렀다. 이름을 똑똑히 듣지는 못했지만 장로님 한 분이 대표기도를 하고 리목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고 성가대가 찬양을 부른 후 설교를 했다. 성경 본문에 따른 단순하고 복음주의적 설교(?)였다. 설교 후엔 기도를 드린 후 헌금을 했다. 헌금하는 동안엔 남성 3중창과 여성 독창이 있었다. 어찌나 잘하는지 참으로 은혜스러웠다. 하지만 이 분들은 마치 음악을 전공한 성악가들 처럼 보여져서 이 교회 교인들이 아니라 어디서 불려온 사람들이 아니가 싶었다. 헌금 후에는 다같이 일어나 3장 찬송을 부른 다음 강영섭목사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가 끝난 후 리목사는 잠간 별도의 시간을 갖겠다고 하면서 우리 일행을 소개하고 Gregor Henderson목사에게 인사를 시켰다. 짧지만 공식적이고 예의 바른 인사말씀을 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인사 말씀을 부탁했다. 시간에 매이지 말라고 해서 한 15분 정도 긴 인사를 했다. 감사와 축복의 말씀을 드리고 이어 호주연합교회와 호주에 있는 한인교회와 한인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들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서 나는 이번 방문의 목적과 의의를 설명하고 특별히 큰물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나는 인사를 마무리 하면서 이번 우리들의 북조선 방문이 KCF와 UCA의 친선과 사회선교가 증진되고 더 나아가 조국의 평화통일에도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인사를 마치자 리목사가 다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르자고 해서 이날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예배당을 빙둘러 서서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 / 이 정성 다하여 통일 / 통일을 이루자 / 이 겨레 살리는 통일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오라 / 통일이여 오라> 두 번 연속해서 부른 후 나는 세 번째는 가사를 바꾸어 <주님의 소원은 통일>로 부르자고 해서 한번 더 불렀다. <주님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수원은 통일… 통일이여 오라>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며 부등켜 안고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감격스런 주일 아침이었다. 우리는 예배당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후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들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었다.

오후가 되어 그들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평양 교외에 자리하고 있는 <단군릉>이었다. 시내에서 한 30 키로 쯤 되는 강동군에 위치한 단군릉은 1990년대에 들어 재계발한 단군의 사직지라고 한다. 안내하는 여성 역사해설가는 조선정부와 조선 고고학계에서는 최근 고고학자들이 고려사와 조선시대의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여러 역사자료를 연구하고 검토한 결과에 따라 이곳 강동군에서 단군왕의 유골과 뼈를 발굴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이곳을 단군왕의 무덤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북한이 그들 정권의 역사성을 높이고 나아가 평양을 조선반도의 수도로 삼은 것에 대한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단군릉>은 아주 높은 언덕 위에 넓은 터를 잡고 피라미드식 돌무덤으로 지어진 대리석 무덤이었다. 릉은 높이만 해도 20미터는 더 되게 보였으며 북에서는 이를 당연히 국보로 정하고 있었다. 나는 안내하는 분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지고 고고학적 문젯점들을 이야기했으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오고 가는 차 안에서 황목사에게도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료는 하나도 보여 주지 않으면서 그냥 믿으라고만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요, 만들어진 사료 처럼 보인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다툼만 될 뿐 하나도 바른 토론이 되질 못했다. 나는 과학과 합리성을 주장하는 북에서 가장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과 몇일 동안 피곤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손을 잡을 때 마다 느끼는 그 거칠고 앙상한 손 마디 만이 아니라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접하게 되는 그들의 학습된 지식과 판단력 역시 뼈만 남은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참 많이 서글퍼진다.
한 시간 이상 되는 쾌 긴 거리를 오고 가면서도 우리는 행인들은 물론, 달리는 자동차도 별로 보질 못했다. 고요한 사회, 한적한 거리, 인적이 드문 풍경 속에서 나는 통제된 사회가 지닌 그림자를 본다. 우리는 곳곳에 세워진 감시초소를 지나면서 첵크엎을 받고 평양시내로 돌아왔다. Joy와 Gregor는 영어 가이드와 같이 호텔에서 식사 하기로 하고 황목사와 이종로선생은 장목사와 나를 평양 최고의 단고기 전문식당이라는 곳으로 데려갔다. 지금까지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여러가지 개고기 음식들이 나왔다. 개고기로 만든 불고기와 회, 무침과 조림, 튀김과 개장국 등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북조선에서 제조된 반주도 함께 나왔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베풀어 준 환대와 친절과 우정에 깊이 감사하면서 여러가지 개인적이며 가정적인 이야기 까지 속내를 털어놓고 대화를 이어갔다. (계속) *홍길복 (2026. 5.18)
나의 북한 방문기(9)
<1997년 10월 20일 (월요일) 평양 – 맑고 아름다운 가을이다>
북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일정도 바빳고 마음도 분주했고 충격도 깊은 하루였다.
아침 9시, 우리는 시간에 맞추어 KCF련맹 사무실에 도착했다. 봉수교회 옆에 있는 3층 짜리 건물이다. 오늘 오전에 우리 양 교회는 회의를 갖기로 했었다. 련맹 본부의 일부는 평양 신학원으로 쓰이고 있었다. 강의실과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우리는 강의실 한 곳을 둘러 보었다. 정면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이 나란히 붙어있고 예수님 사진은 벽 옆면에 걸려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북한교회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적 모습이 아니가 싶었다. 북조선은 교회든 사찰이던 그 어디를 가든 수령과 주체사상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신앙의 대상이다. 어떻게 기독교와 당이, 신앙과 사상이, 하느님과 수령님이 일치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나로써는 도져히 이해 할 수 없는 세계다. 도서관이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책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는데 전에 내가 서울에서 출판한 나의 설교집 중에서 <이민자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동양인 예수>의 초판본들을 들고 와서 보여주면서 “우리 도서관에는 목사님의 설교집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지난 1991년 WCC 켄버라 총회 때 시드니에 와서 고기준목사가 싸인을 한 <성경전서>를 나에게 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장기수목사에게 주었다. 이 성경은 1990년에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발행된 것으로 그후 평양출판사가 발행한 <세기의 력사>와 더불어 내가 갖고 있는 북조선의 성경으로는 매우 아끼는 자료들이다.

드디어 KCF와 UCA 사이에 첫 공식회의를 시작되었다. 리천민서기장이 개회를 선언하고 기도를 드렸다. 이어서 강영섭목사가 조선기독교도련맹에 대해서 준비한 설명을 퍽 시간에 걸쳐 소개했다. 다른 때도 그렇지만 오늘 나는 더 열심히 받아적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기본적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련맹의 목적은 조국을 위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드높이는 데 둔다. 2) 련맹은 기독교정신인 평등과 박애의 이념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힘을 기울인다. 3) 련맹은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보호한다. 련맹은 이런 3가지 기본목표를 가지고 1946년 11월에 정식으로 결성되어 오늘까지 50년 동안 조선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해 왔다. 현재 련맹에 가입된 회원수는 18세 이상 성인으로 약 6000명 정도이다. 그러나 련맹에 가입하지 않은 신자들도 있어서 그들까지 모두 합하면 약 1만명에서 1만 2천명 정도가 된다. KCF 총회는 4년에 한번씩 열리며 여기에서는 중앙위원을 선출한다. 중앙위원회는 모두 25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서는 위원장과 서기장과 기타 임원들을 선출한다. 중앙위원회는 그 활동을 효율화 하기 위해서 산하에 9명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를 두고 이 상무위원회가 련맹의 실질적 업무를 추진하고 실행한다. 상무위원회는 조직부, 선전부, 국제부, 경리부로 업무를 분장하며 실무직원은 모두 30여명으로 되어있다. 련맹은 중앙위원회 이외에 지방부서도 조직되어 있는데 현재 조선 12개 도 가운데 10개의 도에 <련맹 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도위원회 아래에는 240개의 시.군이 있는데 그 중 50개의 시와 군에 KCF의 지방 조직이 만들어져 있다. 재정은 연간 약 50만원 (US$ 25만) 정도이다. 이 돈은 1) 련맹회원들이 회비로 자기 수입의 2%를 내고 2) 특별헌금 3) KCF의 활동 수입금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해로 인한 회비의 감소로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다.
이어서 강목사는 북조선 교회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1950년 전쟁 이전, 북에는 역 1400개 정도의 교회당과 12만명 정도의 교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3년 동안이나 계속된 전쟁으로 대부분의 교회당들은 거의 다 파괴되었고 신도들도 수없이 죽임을 당했고 또 일부는 월남함으로 북조선에선 교회와 교인들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후 수령님과 당의 적극적 도움으로 점차 회복되어 지금은 신자들이 약 12,000명 정도나 되었다. 현재 가정교회는 약 500여 곳이 되며 모이는 숫자는 10명에서 20명 사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직분자들은 전국적으로 약 300명 쯤 된다. 봉수교회당은 1988년에, 칠골교회당은 1992년에 각각 건축 봉헌 되었다. 이 역시 어버이 수령님의 도움으로 지어진 것이다. 평양신학원은 1972년 부터 운영되어 왔다. 10명 정도를 모집하여 3년간 교육 시킨 후 졸업하게 된다. 그들이 모두 졸업하면 다시 10여명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킨다. 지금까지 7회에 걸쳐 50여명을 배출하였다. 문제는 교육의 자료나 도서가 많이 부족한 것이다. 아직 KCF자체로는 책을 출판할 능력이 없다. 주로 남쪽에서 발행된 도서들을 선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카세트나 비데오, 방송통신대학교재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KCF는 1983년에 신구약 성경을 발행했고, 1984년엔 무곡찬송가를, 그다음 1990년엔 곡조찬송가를 발행했다. 현재 성경과 찬송가는 넉넉하다. 남쪽에서는 성경과 찬송가 발행에 대해 재정적 지원의사를 밝혔으나 필요하지 않다. KCF에게 현재 주어진 당면 과제는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국의 통일사업이다. 자주적, 평화적, 민족대단결이라는 7.4공동성명에 기초하여 통일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정부든 교회든 개인이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 최대의 사명과 과제는 조국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지금의 정전협정은 어서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특별히 UCA가 이 조국의 통일 사업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 주시고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부탁한다. 둘째 과제는 최근에 발생한 수재를 극복하고 복구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사회선교활동이다. 과거엔 우리 교회가 이런 일엔 별로 개입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 역시 선교사업이란 것을 알게 되어 WCC를 비롯하여 미국과 캐나다 등 여러 교회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잘 도와 주고 있다. 이번에 호주연합교회와 한인연합교회가 우리를 찾아와 도움을 주시는 것도 이런 사회선교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한번 더 깊이 감시를 드린다. 이렇게 교회와 각종 기독교단체들이 앞장서서 식량과 의류와 의약품들을 보내 주시고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어서 조선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점점 더 넓혀지고 있다. 정말 깊이 감사드린다. 물품만이 아니라 현금으로 지원해 주시는 것도 대단히 요긴하다. 오해하는 사람들은 현금으로 지원하면 당이 이를 거두어가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금이 있으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수재민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들을 우리가 직접 구입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UCA가 많은 현금을 지원해 주신 것에 대해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겠고 상세한 사용처에 대해서는 훗날 자세히 보고드리겠다. 지금 조선에는 <큰물대책 중앙위원회>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당에서 관리하는 위원회이고 다른 하나는 KCF가 주도한다. 우리 KCF는 대부분의 해외 지원을 총괄한다. 이로 인하여 선교활동도 많이 활발해지고 KCF의 위상도 아주 높아지고 있다. 강목사의 긴 설명이 끝난 후 우리는 호주연합교회와 조선기독교도련맹 사이의 상호친선 방문과 교류 및 계속적 지원에 대한 토의와 함께 이에 대한 장단기 협의를 계속 하기로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감사장을 주고 우리는 KCF측에 TV와 비데오를 기증했다. 우리는 호주에서 가져온 포도주와 북한산 포도주를 섞어 성찬식을 거행했다. 봉수교회 이목사가 사식하고 내가 기도한 후 Joy와 북측의 여자 전도사가 분배하는 성찬을 나누고 Henderson목사가 축도했다. 모든 순서를 마친 후 밖에 나와 사진을 찍고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회의 후 우리는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만수대창작사>에 들렸다. 이곳은 북에서 미술, 조각, 글씨, 영화, 수예, 사진, 벽화, 출판을 비롯한 각종 창작 및 공연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는 곳이다.
여기엔 약 60여 개의 창작실과 1000여 명의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몇 개의 관람실을 돌아보았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창작품들이 참 많이 눈에 띠었으나 이것 역시 <가부장적 사회와 봉건주의적 충성심>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북에서는 음악이든 미술이든 기예이든 교육이든 성인예술이든 어린이 놀이든 모든 창작물들은 오직 수령님 한 분에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다음 우리는 보통문 앞에 다시 잠간 멈추었다. 보통문은 서울에 있는 숭례문과 생김도 비슷하고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똑같았다.
이 보통문은 고구려 때 지어진 것을 조선시대에 개축했고 현재 당에서는 국보 3호로 지정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은 이 보통문을 중심으로 구시가와 신시가가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 때 평양시내는 거의 다 미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 보통문 만은 습격을 피했다고 하면서 이는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한다.
보통문 앞에서 사진을 찍은 후 안내인은 우리를 한 백여미터 쯤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평양주재 주러시아대사관이었다. 안내인은 말했다. <이 자리는 본래 숭실학교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옆에는 옛날 평양신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학교는 모두 전쟁 때 미군들의 폭격으로 사라졌고 그 후 러시아가 이곳에 대사관을 건축했습니다> 역사 깊은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역시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 흔적 조차도 볼 수가 없었다. 평양에 오면 꼭 보고 와야지 마음먹었던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자리에서 우리는 러시아대사관을 바라 보아야했다.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다음 우리는 칠골교회를 방문했다. 주일이 아닌데도 몇몇 성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찬양으로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박춘근 담임목사는 전에 봉수교회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얼마전에 이곳 칠골교회로 부임했다고 한다. 요즘은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와서 칠골교회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본래 칠골교회는 1889년 미국선교사들이 <하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운 초창기 교회 중 하나이다. 이하의 글은 박목사가 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슴프레 하지만 예전 어떤 글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초창기 장로 중에는 강돈욱이라는 분이 아주 열심히 하리교회를 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강돈욱장로의 딸 중 하나가 강반석여사였고 훗날 김일성수상은 이 강반석여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니 김일성수령은 그 외할아버지가 하리교회 강돈욱장로요 어머니가 강반석집사가 되는 것이다. 김일성수상은 이렇듯 신앙적 뿌리가 든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였다. 물론 훗날 북조선에서 부수상의 자리 까지 올라갔던 강양욱목사는 강돈욱장로와 돌림이 같아서 혹시 형제간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두 사람 사이는 전혀 인척관계가 없다고 한다. 강양욱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KCF를 만든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계속해서 박목사의 설명이다. 하리교회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온갖 핍박을 받다가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는 칠골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크게 부흥이 되어 한때는 교인이 300여 명 까지 늘어났다. 그런데 그 후 6.25 전쟁 때 교회는 미군들의 폭격으로 인해 불타고 성도들은 죽임을 당하여 결국 교회는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휴전 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2개의 가정교회가 생겨났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1989년 이 근처에 광복거리가 완공되어 새로운 주민들이 옮겨오면서 교회도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칠골교회는 수령님의 지원과 도움으로 새예배당도 건축했고 지금은 주일예배에 약 80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며 부목사와 장로도 4명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 분들을 위해서 합심하여 기도를 드리고 약간의 헌금도 드리고 아쉬운 마음을 지닌채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 들렸다. 이 궁전은 조선의 어린이들을 위해 제 13차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에 둔 1989년에 문을 연 종합학습 및 공연관이다. 건물만 해도 여러 개가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가 본 본관은 8층 짜리 건물에 도서관, 극장, 체육관, 수영장, 각종 활동과 행사장 등이 7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정말 어린이궁전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안내인은 전국에서 1년에 약 130만명 정도의 소학교 및 중학교 학생들이 이 궁전에 와서 배우고 익히며 여러가지 행사에 참여한다고 했다. 또한 이 궁정에는 약 300여 개의 소조와 70여 개의 재능계발교실들이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 궁정은 위대한 장군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만들어 졌고 이를 위해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 부터 단단히 훈련되어야하고 정신적으로 강하게 무장되어야 합니다> 궁정을 나서며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되었다. 북녘땅엔 또 하나의 하느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 종교>와 <김일성 하느님> !

날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평양에서의 마지막 송별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양각도국제호텔로 이동했다. 이 호텔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가장 크고 화려한 호텔이라고 한다. 객실만 해도 1천개가 넘는 이 거대한 고급호텔의 47층 회전식 전망대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서지도 않고 직행했다. 최고의 대접이다.
음식은 한식과 중식을 여러가지로 섞어서 내놓았다. 맛도 맛이지만 마지막 날 밤, 이렇게 호사스럽게 대해주는 그들의 정성이 참 극진했다. 평양의 화려한 밤을 내려다 보면서 일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마음은 많이 무거웠다. 황시천목사와 이종로선생이 숙소까지 동행해 주었다. 나는 수많은 생각들에 복잡하게 얽히고 섥킨채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일기장을 펼쳤다. (계속) *홍길복 (2025. 5.18)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