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걷는 기도
걷는 기도 (22)
오늘 한 채의 집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하루를 걷고 있습니다.
방 안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듯한데
창문 밖 계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흘러갑니다.
식탁 위에 놓인 컵 하나,
반쯤 접힌 옷가지 하나,
문득 들려오는 착각 같은 발자국 소리 하나가
마치 저녁바다의 밀물처럼
가슴 가장 낮은 곳까지 밀려와
잠잠히 쌓여 갑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먼 항구를 준비하는 늙은 뱃사공 같습니다.
떠나는 이를 위해 흰 천을 고르고
조용한 꽃을 놓고
마지막 노래를 준비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아직
배가 출항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아들 사진을 정리하는 손끝마다
숨겨 둔 울음이 배어 있고,
발인예배 순서를 준비하는 종이마다
마르지 않은 겨울비가 번져 있습니다.
어찌하여 사람의 생은
이토록 짧은 계절입니까.
푸르게 흔들리던 나무 한 그루가
아직 여름을 다 지나기도 전에
문득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당신의 창조의 신비 앞에
오래 침묵합니다.
우리는 모두
잠시 맡겨진 빛을 들고 걷는 존재였음을
겨울비가 내리는 밤에야 배웁니다.
누군가는 먼저 새벽으로 가고
누군가는 남겨진 어둠 속에서
그 발자국의 온기를 더듬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밤은
기도를 깊게하는 사람이 아니라
비에 젖은 새처럼
겨우 숨을 붙들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입술은 수없이 말씀을 전해 왔으나
정작 제 생명은 부서진 항아리처럼
작은 흔들림에도 금이 갑니다.
그러나 이 무너짐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는 조용히 흐르고
있음을 믿고 싶습니다.
별들이 제 길을 잃지 않듯
겨울이 끝내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낙엽조차 흙으로 돌아가
다시 숲의 일부가 되듯,
오늘의 이 깊은 이별 또한
당신의 큰 숨결 안에 놓여 있음을
눈물 속에서 더듬어 봅니다.
제가 준비하는 이 마지막 장례 예식이
단지 슬픔의 의식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한 생이 지나간 자리 위에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증언하는
조용한 시편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울음이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침묵이 절망이 되지 않게 하시고
흐르는 눈물마다
말로 다 못한 사랑의 문장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떠나는 아들의 이름이
차가운 발자취 속에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남겨진 사람들의 숨결과 기억 속에서
오래 피어나는 저녁별처럼
남게 하여 주십시오.
오늘 밤은
한 송이 국화를 가슴에 꽂아 두고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습니다.
이별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 속에서도
끝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너진 마음 위에도 새벽이 오게 하시고,
닫힌 아들 방문 틈 사이로도
소리없는 바람 하나 스며들게 하시고,
작은 신음 소리 하나에도
맥박이 뛰게 하시며
파라마타 강변 발자국 마다
강물처럼 멈추지 않게 하시며
긴 겨울을 건너는 생명 위에도
당신의 따뜻한 가슴으로
조용히 불러 주십시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20260529 교회 서재에서
匍越의 [걷는 기도] 중에서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