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19)
제15강 ‘알아야 믿는다’와 ‘믿으면 알게된다’ 사이에서
중세 – 종교철학의 시대(1)
들어가는 말
중세기는 암흑시대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중·고등학교에서 서양사를 공부할 때 중세를 ‘암흑시대’(Dark Age)라고 배웠습니다. 중세기의 사람들은 (1) 종교적으로 기독교 광신주의에 함몰되었고, (2) 일체의 타종교를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않았으며, (3) 교권이 세속의 정치권까지도 통치하거나 지배하였으며, (4) 교회와 성직자 계급은 타락하여 절대권력을 휘둘러 교회와 성직자들의 배만 불리웠고, (5) 성직은 돈으로 사고파는 일이 일반화 되었으며, (6) 일반 서민들은 가난과 질병, 착취와 억압 속에서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길들여진 농노들 처럼 살았고, (7) 교회는 종교적 권위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성과 판단을 억눌러 지성적 불모시대를 가져왔고, (8) 천동설을 중심한 원시적 미신사상으로 근대 과학의 발전을 저해한 시기가 바로 중세기라는 것이었습니다. (9)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이슬람과 유대교를 대적하여 살인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했고, (10) 마녀사냥으로 숫한 사람들을 죽이는 등 인권을 유린한 것 등이 중세의 적나라한 모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중세기를 암흑시대라고 보는 것은 역사를 한 면에서만 보는 좁은 시각이고 한 시대를 통시적, 혹은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치우친 시각에서 바라보는 편견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장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철학자요,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4권으로 이루어진 ‘중세 대백과’를 통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다. 중세란 100년 혹은 200년 정도 계속되어 온 짧은 역사가 아니다. 중세는 천년 이상을 이어온 긴 역사다. 그 긴 중세기는 화형의 불꽃만 타오르게 한 시대가 아니다. 고전을 일으켜 세우고 맹목적 신앙에 대해 이성적 도전을 하고 이름다운 예술과 건축물들을 꽃피운 시대이기도 하다. 중세는 결코 어두운 시대가 아니다.’ 물론 중세기를 벗어나면서 15, 16세기 근세 초기부터 발전된 인간 이성의 신장과 자연과학의 발전과 신대륙의 발견 등을 중세와 비교해 보면 중세는 분명히 어두운 측면이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규정하면서 중세 전체를 암흑시대로 매도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중세시대를 그렇게도 가혹하게 ‘어두움의 시대’라고 규정지었던 근세 르네상스와 칸트와 헤겔에 이르러 최고도로 높였던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주의가 그후 중세보다 얼마나 더 큰 암흑시대를 우리 앞에 펼쳐 놓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부분적으로 이성적이고 상황에 따라 이성적인 척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은 감성과 의지를 함께 지닌 통합적 존재입니다. 또한 독립적이고 개인적이며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의 산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이란 더 이상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듭되는 환경파괴 행위를 보면서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최고로 미련한 짐승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핵무기를 포함한 살인가스 등 가공할 무기를 만들고 총기 소유를 제한하지 않고 남녀와 빈부를 포함하여 제 1세계와 3세계 사이의 간격을 넓혀가는 자유와 평등의 파괴자들이 바로 우리들 인간들입니다. 인간성 속에는 극복해 낼 수 없는 이기적 유전자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지금이 바로 중세 보다 훨씬 더 어두운 시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암흑시대의 연속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 우리 인간이 대단히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성적이지 못한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그 어떤 ‘확증편향성’(Confirmation bias)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에 따라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편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일의 ‘사실’이 밝혀져도 자신이 지닌 편향성 때문에 우리가 본래 가졌던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이성의 진화’ 위고 메르시에 지음, 최영호 옮김, 생각연구소, 2018 참조). 우리 인문학 친구들이 함께 추구해 나가려는 것은 가능한 편견이나 단견을 이겨내면서, 한 인간이나 공동체를 통시적 및 전체적으로 보려는 노력에 있습니다. ‘중세는 암흑시대인가?’ 여기에는 ‘그렇다’는 의견과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공존할 수도 있습니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규정한 것은 독일을 중심한 근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고 그런 독일에게서 영향을 받은 일본 역사가들의 생각으로 일제시대부터 우리들은 은근히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교육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중세(中世 Middle Ages, Medieval Era, 혹은 Medieval Time) 개념 다시 생각해 보기
(1) 중세(기)라는 개념은 흔히 유럽의 역사를 구분 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들은 역사를 선사시대(석기시대, 동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당대 및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시대로 세분화 했습니다. 그들은 고대와 근대 사이의 중간에 놓인 시기를 중세기라고 불렀습니다. 18세기 유럽인들은 그리스–로마 시대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주 먼 ‘고대시대’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살고 있던 르네상스와 17세기이후 시대는 ’현대시대’(자기들의 말로는 그 때를 Modern Age, 즉 ‘현대’라고 했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근대’라고 번역합니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대와 현대 사이에 낀 시대는 자연히 중세시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엄격하게 말하자면 ‘중세’란 ‘유럽의 중세’를 말하는 것이지 세계사의 중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역사학자들 중에는 서구의 이런 역사구분은 유럽인들이 비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종속화해 나가던 서구 중심의 역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3) 뿐만 아니라 역사를 ‘세계사’의 시각에서 보지 못하던 때, 좁은 안목에서 만들어 놓은 비합리적 사관이요, 극복해 내야 할 종속사관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4) 중국을 비롯한 한국이나 동양에서는 역사를 서구식으로 구분하지 않고 주로 왕조에 따라 구별합니다. 중국에서는 중세를 멀리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시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거나 가깝게는 당나라 말기나 송나라 초기(唐末宋初)로 보기도 합니다.
(5) 한국 중세사학회는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초기까지를 ‘한국의 중세시대’로 보거나 좁게는 고려시대를 중세시대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시기적으로 직접 대비하면 유럽의 중세 초기는 백제와 신라가 나라를 세울 때와 비슷하게 일치되고 중세말기는 여말선초(麗末鮮初)시대와 겹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모든 것은 어디서 누가 어떤 시각으로 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습니다. 기둥을 어디에다 세우느냐에 따라 동과 서, 좌와 우가 달라지고, 축구공 같은 지구본도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남과 북이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1979년 호주 Victoria주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스튜어트 맥아더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지구의 북반구에 두고 러시아와 미국을 남반구에 둔 거꾸로 된 세계 지도, Under Down Map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본래 우주에 떠 있는 지구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남극이 북극이 되고 북극이 남극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우리들이 인위적으로 혹은 편의상 그렇게 명명하고 습관상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고착화 된 것 입니다).
(7) 우리 인문학 교실은 계속해서 ‘하나의 대상에는 절대로 하나의 해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유럽인들의 시각이냐, 비유럽인들의 안목이냐에 따라 역사를 보고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남자와 여자, 종교인과 비종교인,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 따라 보는 세계와 이해하는 폭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모든 역사에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동, Middle East이라는 지명도 엄밀하게 말하면 그곳이 어찌 중동이 될 수 있습니까? 아시아 전체를 놓고 보면 거기는 당연히 아시아의 서쪽 West Asia지 중부 아시아 Middle Asia는 아닙니다. 중동이란 19세기 중엽 미해군 전략가 알프레드 마한(Alfred Mahan)이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주장한 논문 ‘페르시아만과 국제 관계’에서 스에즈 운하와 페르시아만 사이를 ‘중동’(Middle East)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8) 지금까지 ‘편의상’ 그렇게 불렀던 모든 것들과 ‘습관상’ 무심코 지나쳤던 지난 일들을 재검토하고 다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역사를 새롭게 발견해 낼 수 있고 미래를 보다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를 구분해서 보는 방식
역사적 년도를 나타내는 방법에는 단기(檀紀)도 있고 서력 기원도 있지만 그 외에도 과거 군주국가에서 흔히 쓰던 여러 가지 연호(年號)를 비롯하여 종교력에 따른 교회력(敎會曆)이나 불기(佛紀)나 도기(道紀) 등이 있습니다. 한무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연호는 주로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골 등 한자 문화권에서 넓게 쓰이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1912년 김일성이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주체력(主體曆)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서역기원(西曆紀元), 약자로는 서기(西紀)를 통용하고 있습니다. 서기는 서양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용해 온 역사 셈법입니다. 이는 그레고리력의 1년을 기원(紀元), 곧 ‘역사가 시작되는 해’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로마자로는 ‘기원 전’을 BC, 즉 Before Christ, 예수 이전으로 표시하고 ‘기원 후’는 AD, 라틴어로 Anno Domini, 즉 ‘주님의 해’로 표기합니다. 한때 영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국가에서는 ‘in the year of our Lord Jesus Christ’ 같이 긴 문장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특정 종교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CE, 즉 Common Era-‘공통시대’와 BCE, 즉 Before Common Era-‘공통시대 이전’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점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서양 역사를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보고 해석하게 한다는 편향성을 없애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 중 하나입니다. 최근 중국에서도 ‘서기’(西紀)를 ‘공력기원’(公曆紀元) 혹은 ‘공력’(公曆)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중세기란?
언제부터 중세가 시작되었고 또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습니다만 보통 서양사에서 중세기라고 할 때는 (1) 예수의 탄생과 그리스도교의 태동 전후로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가 준비되던 12세기 말까지로 보는 견해와 (2)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 제국이 망한 1453년까지 이르는 약 천년을 중세라고 말합니다. (3) 그러나 중세를 기독교의 전성기라는 시각에서 보는 이들은 기독교가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쳤던 교부철학의 시대인 기원 후 약 2세기부터 시작하여 1517년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약 1300여년을 중세기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대부분의 시대 구분이란 퍽 자의적이라고 여기는 현대 역사학자들은 도식적 시대 구분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고정적 시대 구분을 넘어서서 역사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웠던 로마는 게르만 민족에게 침략을 당하면서 여러 개의 민족국가들로 분활이 되었습니다. 처음 게르만 민족과 북방의 훈족들의 이동과 그 후 슬라브 민족의 이동을 통하여 이탈리아, 에스파니아,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세워졌습니다. 벨기에의 역사학자 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1935)이나 네덜란드의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는 중세기를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했습니다. 우리는 이 교실에서 중세 천 여년 동안 진행되고 변화해 온 역사적 흐름과 내용들을 다 섭렵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사회구조, 법률, 도시, 의료, 교회, 농업, 상업, 문화, 예술, 건축, 교육, 학문, 음악, 미술 등 살펴보아야 할 파트는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교황제도와 교황권의 문제, 이슬람의 발흥과 확장, 수도원, 십자군 전쟁 등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들이라고 봅니다.
유럽에서 중세의 특징들
(1) 전반적으로 봉건체제가 확립된 시대였습니다. 봉건제(封建制, Feudalism)란 고대 중국과 중세 유럽에서의 정치-경제체제 중 하나입니다. 국왕을 중심하는 중앙정부는 수도권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들은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세습을 시키면서 다스리게 하는 통치제도를 말합니다. 중국에서의 영주는 주로 혈연에 기초하여서 형성이 되었습니다만 유럽에서는 법률로 만들어서 쌍무적 계약관계로 만들었습니다. 제일 위에는 왕이 있고 그 왕과 쌍무적으로 체결한 땅 주인인 영주가 그의 지역 안에 있는 땅과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농노로 다스리게 하는 형태입니다. 세상을 왕(땅 주인), 영주(영토의 관리인), 그리고 농노(아무런 소유권이 없는 인간 노예)로 나누어 놓은 것이 중세의 봉건체제였습니다. 그 때 주어지는 농토를 흔히 장원(莊園)이라고 부릅니다. 국왕은 그 나라의 모든 국토 중에서 일정한 장원을 영주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간접통치를 통하여 정치, 군사, 및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는 겁니다. 그리고 왕은 자기 아래에 있는 영주들에게는 여러가지 작위를 나누어 줍니다. 지금도 에딘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랭커스터 공작,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말은 그런 역사를 이어가는 개념들 입니다(총독이란 개념은 이에 대한 변화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초기에는 로마를 중심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였지만 로마의 멸망 이후 유럽은 전반적으로 고트족, 프랑크족, 게르만족, 앵글로 색슨족, 켈트족, 비잔틴족, 바이킹족 등에 의해서 분활 통치를 하게 되면서 유럽 전체를 영구적인 영주(기사)-농노 체제로 양분하는 포악한 정치-경제 구조로 만들었습니다(참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려시대부터 왕은 자신의 통치권이 미치는 국가 안에 호족–일종의 Noble Family-같은 귀족 집단을 두어 일정한 지역을 하사해 주고 그들에게서 세금을 받아드리고 이들 호족들은 자기들의 지역 안에 있는 평민들을 농노로 부리도록 했습니다. 왕은 이들 호족들에게는 성씨(姓氏)를 부여하고 또 일정한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하사해 주었는데 그 성씨가 모두 백개 정도가 되어서 ‘백성(百姓)’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습니다. 왕은 이 백명 정도의 姓을 가진 ‘백성’의 호족들에게는 예컨데, 안동이면 안동 지역을, 전주면 전주 지역을, 경주면 경주 지역을 통치하고 그 지역 안에 살고 있는 평민들을 농노로 부리면서 중앙정부인 왕궁에는 세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여기에서 생긴 것이 소위 본관이라는 것으로 안동지역을 하사 받은 안동 권(權)씨, 경주 지역을 하사 받은 경주 김(金)씨, 전주 지역을 하사받은 전주 이(李)씨 등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서 다산 정약용은 최초로 전토제(井田制)를 주창하여 ‘모든 토지는 직접 농사를 짖는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이상적 토지제도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사상식 바로잡기’ 박은봉 지음, 2007, 책과함께 참조).
(2) 기독교의 전성기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 박해시기가 있었습니다만 4세기 이후 기독교와 로마는 피차의 이해관계에 맞물려서 교권과 세속권을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합니다. 기독교는 각종 도덕적 타락은 물론 동서교회의 분열을 통하여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가장 거룩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하게 됩니다.
(3) 한편 7세기 중엽에는 아라비아를 중심하여 이슬람 제국이 태동했습니다. 이슬람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물론 중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 세력을 넓혔고 ‘코란이냐? 칼이냐?’를 선택하도록 하면서 세상을 극단적 원리주의로 몰아넣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문화와 철학에 있어서 긍정적인 면도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신앙으로 포장된 종교권력이 세속권력을 장악하고 종교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4) 중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이성이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기였습니다. 오직 믿음과 순종만 강요되었고 자유로운 이성과 이성적 비판은 억압되었습니다. 질문과 의심은 죄가 되었고 침묵과 순종만이 미덕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우민정책을 통하여 성서를 민중들의 손에서 빼앗고 성직자들의 전유물로 만들었습니다. 교황과 성직자들은 절대무오하고 비판할 수 없는 신부(神父, 신의 아버지로써 교부-敎父, 즉 교회의 아버지가 아니라)가 되었습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로 제정일치 체제를 확립하고 종교적 계율이 세속적 삶을 규제하고 심판하는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종교법이 최고의 법이 된 것은 물론이고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을 정당화하고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신의 이름으로 살해했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칼로 사람을 죽이고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서 그것을 선교라고 했으며 십자군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통하여 인간의 무지와 잔인성의 극치를 드러냈고 인간이성을 말살했습니다.
이하에서 우리는 두 시간에 걸쳐서 중세시대를 개관적으로만 조망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중세 초기 기독교의 역사와 기독교 교리가 형성된 과정 및 교부들의 신학사상을 살펴보고 다음에는 중세 수도원운동과 스콜라철학에 대하여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출발과 확장
(1) 예수의 출현 및 활동과 그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기독교는 그 이전의 고대철학과 새로운 시대를 구분해 주는 분기점이 됩니다. 같은 지중해 지역을 중심하여 태동이 되었지만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스토아철학과 에피큐로스에 이르러 막을 내린 후기 헬레니즘은 고대철학의 시대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제 역사는 유대교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새롭게 태어난 예수와 그 예수의 사상을 중심한 기독교라는 종교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구의 정신사는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이어받는 헬레니즘과 유대-기독교의 전통을 지켜가는 헤브라이즘이라는 두개의 사상이 대립과 타협, 갈등과 절충을 거듭하면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2) 예수는 유대교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교는 ‘야훼’(Yahweh)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인들의 ‘민족종교’였습니다. 유대교뿐만이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고대 종교들은 어떤 부족이나 그들의 지역적 경계에 따른 ‘부족종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이런 유대교적 민족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우주적 하느님’(Cosmic God)을 선포하는 세계 종교를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메시아’(Messiah)에 대한 사상만 해도 유대교에서는 장차 유대인들을 로마나 기타 강대국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어 다윗시대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 민족의 구세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예수는 남녀노소, 빈부, 유무식을 떠나 모든 인류를 가난과 폭력, 억압과 부자유, 죄와 죽음에서 건져줄 구원자로 선포했으며 그가 바로 예수라고 했습니다.
(3)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런 인류의 보편적 구원은 유대교가 가르쳐 온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서 사는 삶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신약성서 중에서 복음서들은 이런 예수의 사랑으로 산 삶과 희생과 죽음과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으며 그 후에 이어지는 교회의 역사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기록 역시 예수가 친히 자신의 몸으로 살고 가르친 ‘사랑의 복음’ ‘사랑의 종교’를 선포하고 설명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입니다.
(4) 그러나 초기 예수의 이런 삶과 교훈들은 파격적이어서 전통종교인 유대교와 충돌을 했으며 특히 바리새파를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대립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당시 로마의 정치권력과 하나가 되어 처단을 받고 예수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5) 하지만 이후 이 예수의 삶과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의 종교집단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 그들은 전통적 유대교의 한 분파로 출발하였으나 얼마 후엔 독립된 ‘기독교’로써 틀을 갖추게 되었고 그들의 모임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6)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회는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사람을 중심한 개인적 종교체험과 그에 따른 확신을 공유한 사람들에 의해서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에 넓게 퍼져나갔으며 마침내는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바울이라는 사람이 중심 인물로 등장합니다. 물론 예수가 없었더라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나 남았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 종교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7)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로 상징되는 사랑과 희생, 부활로 상징되는 불의와 악과 죽음을 극복해 내는 구원에 촛점이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넓혀졌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교회 공동체는 그 이론적 바탕이나 신학적 입장이 확실하게 다듬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초대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 때까지 꾸준히 교리적 논쟁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확립시켜 나갔습니다.
기독교가 출현하고 퍼져나가게 된 데는 어떤 시대적 배경들이 있었을까요? 정치나 사회, 역사나 문화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이념, 철학이나 종교까지도 어느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 어떤 일정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기까지에는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철학적 배경이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이 신흥종교가 출발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시대적 배경 – 역사란 돌고 도는 순환사 처럼 보이지만 그런 중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조금씩이지만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고 봅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을 포함한 의식주뿐만이 아니라 집단을 형성하고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정치를 하는 행위와 더 나아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삶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적 삶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쉬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갑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신적이고 신화적인 저등종교에서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고등종교로 진보합니다. 동물제사와 인신제사를 드리던 시대에서 예배와 기도를 포함하는 제의의 형태는 물론 그에 따른 신학도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저등종교의 시대를 마감하고 고등종교의 시대를 여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2) 개혁적 종교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이 새 종교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고 봅니다. 물론 유대교가 저등종교는 아니었지만 어쨋든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지닌 종교로써 그 수명이 약해지면서 ‘유대교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3) 정치 및 군사적 배경도 있습니다. 알렉산더 이후 분열된 그리스 제국은 로마에 의해서 통일국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정치적 판도는 북부 아프리카로부터 스페인을 포함한 지중해 전역은 물론, 유럽과 영국, 그리고 북부 스칸디나 반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종교 역시 한때의 부족종교나 특정지역의 제한된 종교형태를 벗어나야만 했고 벗어 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드넓은 제국의 출현은 신흥종교인 기독교로 하여금 그 시대적 요구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출현하고 또 확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게 되었고 로마의 아피아 가도를 이용한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 힘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4) 철학적 영향도 있었습니다. 특히 후기 헬레니즘에서 스토아학파가 주창했던 사해동포주의 사상은 모든 인류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기독교는 이런 면에서 스토아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물론 그 이전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별설이나 플라톤의 이원론이나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 사상등도 철학적 유산으로 기독교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플로티노스-Plotinos[AD 201-270]는 신플라톤주의자로써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데아론을 ‘일자’[一者, The One]로 대치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일자’란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불변하고 영원하고 완전하고 유일하며 실재하는 신이었습니다. 모든 현상계는 이 일자로부터 유출되어 나옵니다. 그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며 신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써 초기 기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하여튼 기독교를 포함하여 인간 삶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어느 날 자기 혼자서 생겨나는 것들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며 피차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겨납니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직면했던 몇 가지 문제점들
(1) 예수와 바울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 교회를 이루었던 멤버들 대부분은 유대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유대교와의 결별 문제였습니다. 전통 속에 남아있으면서 기존의 전통을 고쳐나갈 것인가, 아니면 낡은 전통을 떠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 것이냐? 타협? 공존? 투쟁? 결별? 새로운 창조? 모든 창조적 도전에는 대결, 핍박, 싸움, 아픔, 그리고 새로운 창조에 따른 고난이 요구됩니다.
(2) 로마의 정치권력에 의한 핍박이었습니다. 네로와 도미티안을 비롯한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도들을 무참하게 죽였으며, 기독교를 없애버려야 할 사교 집단으로 여겼습니다. 사실 정치와 종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파워입니다. 제정일치 시대에는 정치와 종교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습니다만 그후 이 둘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주도권 싸움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 둘은 좀처럼 공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AD 313년이 되기까지 로마의 정치권력과 기독교는 서로 상충하고 대결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원수였습니다. 물리적 힘을 지닌 로마는 교회를 힘으로 눌렀고, 이에 대해 교회는 죽음으로 맞섰습니다. 숫한 죽음이 있은 후 AD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드디어 교회를 승인하고 그 후 380년,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이 심한 병을 앓고 난 후 세례를 받으면서 모든 로마의 시민들은 니케아신경을 의무적으로 고백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이제 기독교를 인정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제기 되었고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마침내 종교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이는 정치와 종교가 피차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낸 전형적 타협의 산물이 되었습니다.
(3) 이성적 논리로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하는 숙제가 대두 되었습니다. 물론 박해의 기간에도 정치적 억압이나 이단의 대두나 세례식을 비롯한 예전의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교리화가 필요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단순한 생존의 문제를 떠나 보다 튼튼하게 교회의 기반을 다지고 항구적인 선교와 교세의 확장과 본격적으로 체계 확립을 위해서는 신조와 교리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중요한 숙제로 주어졌습니다. 이를 우리는 흔히 ‘신앙의 제도화’ 혹은 ‘신앙의 규칙화’(regula fidei)라고 이름하며 초창기에 이를 위해서 일한 사람들을 가르쳐서는 ‘기독교 호교론자’(Christian Apologetics)라고 하고, 그후 이어진 인물들은 ‘교부철학자’(Patristic Philosopher)들이라고 부릅니다. 초창기 기독교 호교론자들은 로마의 정치적 박해자들이 기독교를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것에 대하여 수세적 입장에 서서 기독교는 초이성적이지 반이성적인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는 합리적 근거를 지닌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했습니다. 그후 이어진 교부철학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또 체계화하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우리 인문학교실에서는 두 번에 나누어서 중세시대의 철학사상과 기독교 신학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AD 2세기경부터 시작하어 8세기 즈음까지 이어진 교부들의 철학을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는 9세기 이후 14세기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스콜라철학에 대해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교부철학자들의 위치와 역활
(1) 원시그리스도교는 처음 요한이나 바울 같은 제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기독교를 변호하거나 교리를 조금씩 체계화하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가장 어려운 도전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의 정치권력으로 부터의 억압과 핍박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 후 이어진 속사도시대는 순교자의 시대였습니다. 죽음이 아니고는 신앙과 교회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의 말대로 ‘교회는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졌고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라났습니다.’ 그 다음 둘째는 유대교를 비롯한 기성 종교와 그리스-로마의 철학 사상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변호, 변명, 설득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신앙을 체계화하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이론과 바탕 위에 서 있으며 누구든지 상식선에서 받아드릴 수 있는 신학체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러가지 변증론과 호교론을 비롯하여 신조와 교리를 다듬는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리스도교회의 세 번째 난관은 교회 내부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데 약속되었던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체되었고 여러가지 이단 사상들이 교인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으면서 그리스도교는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이다. 예수는 없다. 예수는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다니는 거짓교사들에 대하여 교회는 예수의 지연된 재림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고, 또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들과도 싸워야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새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육과 확신의 필요성이 제기됨으로 ‘신앙고백’과 세례식을 위한 기초적 지식을 제공해야 하는 과제가 생겨났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입교나 세례식이 바로 순교를 서약하는 의식과 동일한 것이었기에 이에 대해 흔들림이 없는 신앙교육이 필요했습니다.
(2) 교부들이란 바로 이런 시대 속에서 순교로 교회를 지키고 영성과 지성으로 교리를 체계화하는 일에 온 몸을 받쳐서 일했던 사람들로서 이는 교회로 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호칭입니다. 교부란 문자적으로는 ‘교회의 아버지’(patres ecclesiae, Fathers of Church, 敎父)를 의미합니다. 이는 다분히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책임성을 지닌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가장 큰 임무와 업적은 무엇보다도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정치적 압제 가운데서 목숨을 바쳐 교회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3세기 이전의 교부들은 예루살렘의 유명한 순교자 저스틴(Justin, The Martyr)과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하여 로마의 클레멘트와 히폴리투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헤르마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카르타고의 테르테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 등 313년 그리스도교가 승인을 받기 이전의 교부들은 거의가 다 죽음으로 교회를 지켰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교부들은 신앙과 교리의 수호를 위하여 로마의 황제들에게 여러가지 호교적인 ‘변호의 글’(Apologia, 護敎書)들을 써서 교회와 신앙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교부철학은 여기에서 첫 출발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단순히 ‘계시’로만 이해하거나 받아드려야 한다고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도 설명해야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교부들에게는 갓 태어난 젖먹이 같은 그리스도교를 튼튼하게 양육하여 신앙과 신학을 굳세게 만들어가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보존과 함께 교리의 수호와 그 체계화를 책임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교부들
일반적으로 그리스 말을 사용하면서 희랍어로 저술을 한 교부들은 ‘그리스 정교회’ 출신들로써 ‘동방교회의 교부들’라고 부르며 반면에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라틴어로 글을 쓴 교부들은 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의 출신들이기에 ‘라틴 교부들’이라고 구분합니다. 동방교회의 교부들 중에는 처음으로 ‘로고스’(Logos) 개념을 기독교 신학과 접목시키려고 시도한 유스티노스(Justinos)와 ‘그노시스’(gnosis)의 이원론을 배격하고 선과 악의 근원을 모두 창조주 하느님에게로 귀결시킨 이레니우스(Irenaeus)와 처음으로 교부철학을 체계화하려고 노력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 ho Alexandria)를 비롯하여 동방교회의 4대 교부라고 불리우는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ho Nyssa)와 바실리오스(Basilios)와 요한 크리소스톰과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를 이겨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등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틴 교부들 중에는 유명한 호교가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 아르노비우스(Arnobius), 라크탄티우스(Lactantius)를 비롯하여 초기 뛰어난 교회 행정가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처음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고(불가타 성경, Vulgata), 라틴어를 로마교회의 공식적 교회언어로 만들고 신학교육을 체계화 한 히에로니무스(Hieronimus, 제롬-Jerome의 다른 이름)와 최대의 교부철학자로 불리우는 히포(Hippo)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기타 보에티우스(Boetius) 등이 있습니다.
동방교회와 마찬가지로 서방교회에서는 암브로시우스와 교황으로서 그레고리안 챤트를 만들어내고 처음으로 교황의 공식 칭호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명명한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와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라고 불리웁니다. 동·서방교회를 막론하여 모든 교부철학자들 마다 나름대로 뛰어난 사상과 위대한 역할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들 중에서 테르툴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두 사람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 영어로는 거북이란 뜻의 Tertulian, 155-240 AD)
북부 아프리카 카르타고(Calthago) 출신의 평신도로 2세기에 활동한 교부이며 아프리카 제 1의 신학자요 기독교 변증가이며, 호교론자로 불리웁니다. 제롬은 그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195년경 기독인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그들이 무죄하다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해를 받는 것은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마르키온이 ‘예수의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했을 때에도 그는 ‘십자가의 수치는 그리스도인들의 필수품’이라고 하면서 ‘교회란 사실 죄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거룩한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리석기 때문에 믿는다’(I believe it that is absurd)-이 말은 테르툴리아누스의 대표적인 말로 인용되곤 합니다. 도킨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그를 반지성주의적(anti-intellectualism) 기독교인의 대표자로 내모는 논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가 쓴 ‘그리스도의 육신론’을 보면 이는 일반론적 이야기라기보다는 마르키온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마르키온주의자들은 이원론과 가현설을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몰아 붙혔습니다. 이 때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맞받아쳤습니다. ‘그래! 좋다!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신앙과 이성의 대결’이 핵심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과 참된 신앙의 대결’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오늘날 기독교 신학도 계시와 이성, 종교와 철학의 대결이 문제의 초점이 아니라 실은 기독교 내부에 있는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며 상식과 교양을 무시하는 종교적 타락상과 이에 대결하여 참된 신앙을 수호하려는 세력 사이의 대결이 문제의 초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문학이나 철학과 싸우려고 하지 말고 기독교 내부에 있는 비기독교적인 것들과 싸워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런 연장선에서 그는 ‘십자가는 수치스럽기에 믿을 수 있고 부활은 불가능하기에 믿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과 단성론자들, 특히 마르키온파와 대결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는 몬타누스주의(Montanism)에 기울어졌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금욕주의적 성향으로 인한 것이리라고 봅니다. 하여튼 오늘날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서는 대표적인 ‘호교론’(Apologeticum)을 비롯하여 31개나 남아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라틴어로 쓰여 졌는데 이는 당시 신약성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책들이 헬라어로 쓰여 진 것과 비교해 볼 때 아주 파격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기독교 라틴어의 창시자요, 라틴어를 서방 기독교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이며 표준적인 언어가 되게 했으며 모두 982개의 표준 신학 및 성서 용어들을 다듬어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라틴신학의 대부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예배와 의전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테르텔리아누스는 초기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기초를 놓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성경을 구약과 신약(vetus testamentum과 novum testamentum)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trinitas)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 하면서 하느님은 ‘하나의 본질’(una substania)에 ‘세 개의 인격’(tres personae)을 지닌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재, 하나의 능력이면서 우리에게는 제 1격으로써의 성부와 제 2격으로써의 성자와 제 3격으로써의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기독론에 있어서도 그는 예수의 신인 양성론을 주장했습니다. 즉 한 사람 예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이 양성이 예수 안에서 ‘혼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non confusum) ‘결합되어 있다’(sed coniunctum in una persona)고 보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의 삶과 철학적 사색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신앙, 신학을 비롯하여 모든 나타난 현상의 문제점들과 풀어가야 할 숙제는 언제나 외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학과 신앙은 이성, 철학, 인문학, 과학 같은 외부에 있는 것들과 싸우려고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우리 인류 모두 앞에 놓여진 공동의 문제들을 풀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물리학자 스티픈 호킹은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국성공회는 그의 시신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다 모시기로 결정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회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협력해서 생명과 우주의 신비를 향한 커다란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하여 그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를 점검해 가면서 인류 앞에 던져진 여러가지 문제들을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호교가로써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의 박해와도 잘 싸웠지만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내적 문제와도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교리를 다듬어가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of Hippo, 354-430 AD)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of Hippo, 라틴어로는 Aurelius Augustinus Hipponesis, 한국에서는 주로 영어식 발음에 따라 ‘어거스틴’ 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라틴식 이름은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서 지어진 것입니다)에 대해서는 우리 인문학교실 제 7강에서 인문학의 주제 중 하나인 ‘사람’(3)을 다룰 때, 데이비드 부룩스의 ‘인간의 품격’을 강의하면서 한번 취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원고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그는 4세기의 기독교 철학자이며 초대교부 중 대표적으로 존경받는 성인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느님의 은총을 최고로 강조한 신학자로써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불리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교요,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아주 독특하게 개신교에서도 그를 존경하고 그의 신학 사상을 추종하며 가르치는 모든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타가스테(Thagaste, 현재의 알제리)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책 중 하나인 ‘고백록’(The Confession)에는 젊은 시절의 방황과 방탕한 모습들이 잘 나타납니다(세계 3대 고백록은 흔히 아우구스티누스, 룻소, 톨스토이의 고백록이라고 합니다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참회하는 내용보다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적 방황과 육체적 욕망에 붙잡혀 고뇌하던 어느 날 정원을 거닐던 중에 아이들이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라고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집에 들어와서 펴들고 읽은 성경 귀절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라고 합니다. 회심의 순간을 경험한 후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교육과 지도를 받은 후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을 합니다. 그 때의 나이가 32세였습니다. 36세에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그 후 보좌 주교를 거쳐 41세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반달족이 쳐들어와 로마제국이 무너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76세에 선종 할 때까지 그는 사목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면서 한때는 자신이 몸 담았던 마니교를 비롯하여 그노시스와 도나투스, 펠라기우스, 아리우스 등 이단 사상들로부터 교회와 신앙과 신학을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는 모두 백 여권이나 됩니다만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은 ‘고백록’(Confessiones), ‘신국’(De Civitate Dei)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비롯하여 인내론, 행복론, 교사론, 재고록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업적은 여러 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행위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의 구원의 은총을 인간의 행위와 자유의지에 앞세웠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선행으로 얻는 구원론에 쐐기를 박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런 신학사상은 바울로부터 이어지는 기독교 교리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 창조론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은 본질상 선하시기 때문에 인간들을 기계적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체로 만드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성서적 및 신학적 기틀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인식의 관계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주장했습니다. 신앙의 문제를 언제나 초월, 신비, 계시의 영역에만 가두어두지 않고 이들과 더불어 함께 씨름하며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알아야만 믿는 것이 아니다. 믿으면 알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어라’(crede ut intelligas) 오늘의 강의안을 준비하면서 참 멋진 화두라고 생각이 되어 강의안의 제목을 “‘알아야 믿는다’와 ‘믿으면 알게 된다’ 사이에서”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하던 중 배운 것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은 신앙과 이성을 대립, 대결시키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 믿음과 이해 사이의 협력과 자기 발전을 향한 치열한 논쟁적 필요성을 강조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함께 공존할 수 있을까요? 얼굴 붉히고 싸우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아가 서로 만나지도 말고 상대하지도 않는 것이 옳은 태도일까? 종교인들과 과학자들, 서로 다른 종교나 종파에 속한 사람들, 생각이 다르고, 이성과 감정에 대한 강조점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우리는 넉넉히 함께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찾아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계시와 이성의 협력을 추구하는 입장은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 이 둘을 서로 협력하게 만들어 줌으로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이론적 및 합리적으로 체계화한 교부들의 신학 사상에 중심에 서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이후 스콜라철학을 형성함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 가장 주목 받는 것은 그의 시간관과 역사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들은 그의 주저인 ‘신국’(De Civitate Dei)에서 주로 다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개념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핵심 교훈중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서 부터 가져왔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서의 편자들과는 달리 ‘왕국’(Kingdom)이 아닌 ‘도시”(City)라는 단어를 씀으로 발전된 사상을 보여 줍니다. 첫째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기독교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물리적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3분이 됩니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를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과거는 기억으로 현재화 되고 미래는 기다림으로 현재 속에서 활동하며 현재는 지금의 삶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간은 현재다’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이해의 핵심입니다. Present of the Past, Present of the Present, Present of the Future!라고 말함으로 현재 중심적 시간관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여기에 와있고 미래도 지금 속에 임재하며 모든 것이 현재화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 다음은 그의 역사관입니다. 그에 의하면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틀이 있는데 하나는 윤회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직선사관입니다. 윤회사관은 가인과 바로와 헤롯과 로마로 이어지는 인간 세상의 악과 불의와 폭력의 역사이고 직선사관은 아벨과 모세와 예수와 기독교로 이어지는 선과 정의와 사랑의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윤회사관은 모든 역사란 반복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세상의 사관(지상사관)입니다. 가인을 출발점으로 하는 악의 반복사입니다. 그는 이런 사관은 시간을 물리적으로만 보는 것이며 그리스적 역사를 이어받는 세속적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직선사관은 창조로 부터 시작이 되어 종말과 심판을 향하여 가는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입니다. 직선사관은 반복 불가능한 유일회적 시간의 흐름으로 아벨로 부터 시작된 선의 역사요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관을 그는 히브리적 전통에서 출발한 기독교 종교사관으로 보고 이는 물리적 역사가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이며 천상의 역사라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모든 세상 역사와 인간의 삶이란 윤회적 성격을 지닌 지상 역사와 직선적으로 흐르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피차 대립, 대결하고 투쟁하는 역사입니다. 역사란 선과 악,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투쟁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 두개의 역사 모두를 주관하고 지배하는 역사의 주관자이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지대로 지상의 역사와 천상의 역사 모두를 움직이고 끌고 가시기 때문에 종국적으로 역사란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승리한다고 보았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다.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간다. 하나님이 역사의 최후 승리자이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확실하게 한 최초의 기독교 역사학자입니다.
나가는 말
중세와 그 시대의 기독교 교부철학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여러가지 단편적 교훈들이 적지 않습니다.
(1) 한 시대와 그 시대의 인물들이 지닌 사상은 그 시대의 산물입니다. 역사를 초월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란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는 않됩니다.
(2) 세상과 인물은 바라보는 시각과 방식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3) 고난과 희생을 잃어버린 종교는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4) 부족이나 국가적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성과 우주적 포용성을 지닌 종교가 바른 종교입니다.
(5) 중세는 이성과 종교가 싸운 시대라기보다는 종교가 내부적으로 갈등을 거듭한 시대입니다.
(6) 이성과 종교는 넉넉히 피차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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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