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영화와 인생 그리고 인문학
인생 그리고 인문학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인문학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라고 정의한다. 인문학은 일반적으로 키케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의 저술 ‘시인 아르키아스를 위한 변론중에서’를 보면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역사적인 인물들은 탁월함(Virtus, Arete)을 습득하고 훈련하기 위해 인문학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공부는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르게 지켜주고 나이든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이런 공부는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역경속에 처해 있을 때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줍니다(키케로, 시인 아르키아스를 위한 변론중에서, BC 62).
키케로는 ‘인간다움(Humanitas)’의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Virtus, Arete를 습득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Virtus는 인간이 가져야 할 여러가지 덕목(용기, 덕, 탁월함, 성품) 등을 말하며, Arete는 말 그대로 ‘탁월함’, ‘최선의 상태’를 가리킨다. 모든 사물들은 각기 그들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기능을 가장 잘 수행 하는 상태를 ‘Arete’라고 한다.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상태가 무엇일까?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문학은 ‘자기성찰’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실제 우리 삶에서 인간다운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문학의 목표라 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유사이래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인류가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질문하고, 사유하고, 연구해도, 인간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도 신비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문명화 되어 있는 동시에 야만적이며,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동시에 적개심 넘치는 위험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곧 신을 발견하는 길이다.’라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길을 걷고 있다.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일어나고, 씻고, 노동하고, 공부하고, 작업하고, 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안고, 싸우고, 수고하고, 하루에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부대끼며 많은 결정을 하고 살아간다. 이러한 우리네 인생의 길에서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편견과 판단이 판을 치고,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 속이고 싸우고, 갖은 수단으로 이중삼중으로 가면을 쓰고,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위선의 페르조나속에서 현대인은 길들여진 인생 속에서 그렇게 피투되어 살아간다(하이데거는 인간을 피투된 존재, 즉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 정의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고 어떻게 살아야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것은 계속 인문학교실에서 질문하고 성찰하고 고민해야 할 내용일 것이다.
인생 그리고 영화
인생은 영화와 같다고 누가 그랬던가?(닐 게이블러[Neal Gabler]는 ‘인생은 영화다[Life the Movie]’라는 도발적인 책을 저작했다. 로버트 존 스톤, 영화와 영성, 전의우 옮김[서울: IVP, 2011], 26). 우리네 인생은 정말 영화와 같다. 삼류소설같은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질 뿐 아니라 실제 우리네 인생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래서 영화의 주요 장치는 내러티브, 즉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인물과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즉 영화는 인간의 갈등과 인과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인간의 심연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건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조명하기도 한다. 영화는 물론 동물이나 SF가 소재가 될 때도 있지만 98% 이상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삶을 채색하고 그리며 영화를 통해 인간을 규명하고 인생에 대해 조명한다. 즉 영화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에 대한 스토리이다.
우리 삶 주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이고 인간의 본질적인 체험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motive)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 즉 인생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향연 슬픔과 기쁨, 인간의 희노애락은 인간 삶에서 매일 마주치는 일상이고 이 일상속에서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최선의 상태’에 대해 질문한다.
그래서 영화는 늘 인간을 소재로 한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인간은 치유도 되고 통찰력을 얻기도 하며 상상력의 세례를 받기도 한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유대교 랍비이기도 한 폴 울프(Paul Woolf)는 열 네살 때 영화 ‘스파르타커스: Spartacus, 1960’를 보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검투사 스파르타커스로 열연한 커크더글라스(Kirk Douglas)가 아내역으로 연기한 진 시몬스(Jean Simmons)에게 말하는 장면을 보며 그는 인생의 중대한 통찰력을 얻는다.
“누구든 살인할 수 있고, 싸우는 법이라면 누구라도 배울 수 있소. 난 이런데 관심없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람이 어디에서 오며, … 왜 우리가 여기 있느냐는 것이요?”
울프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다름 아닌 영화에서, 삶에 대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울프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리고 결심한다. “나는 브룩클린으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는 예배당에서는 이런 경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할리우드로 가서 영화를 만들거야’”
제랄드 싯처(Gerald L. Sittser)의 이야기는 더 감동적이다. 제랄드는 워싱턴 소재의 휘트워스대학(Whitworth college)의 종교학 교수이다. 그는 1991년 자동차 사고로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딸 하나를 잃었다. 술취한 운전사가 몰고 온 트럭이 그의 밴을 들이 받아서 제랄드와 세 아이만 살아남았다. 5년 후 그는 한 인간이 상실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회상하면서 책을 썼다. 그 책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울다’이다(제랄드 싯처, 하나님 앞에서 울다, 이현우 옮김 [서울: 좋은씨앗, 2005]).
싯처는 자신과 아이들이 이 끔찍한 사고의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이야기로 적었다. 물론 친구들과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실제 그의 아이들인 캐서린(당시 8세), 데이비드(7세), 존(겨우 2세)에게 의미 있었던 것은 영화였다. 그 이야기를 소개한다.
“사고 후 존은 내게 ‘밤비’ 이야기를 수십 번도 더 읽어 달라고 졸랐다. 존은 밤비의 엄마가 죽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멈추라고 했다. 때로 존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며, 우리 둘은 슬픈 침묵을 지켰다. 존은 가끔 울기도 했다. 존은 밤비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가 비슷하다고 말했다. ‘밤비도 엄마를 잃었어’ 그는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밤비는 숲속의 왕자가 됐어’ … 누나 캐서린은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라는 영화에서 위로를 얻었다. 왜냐하면 영화의 주인공 벨은 엄마없이 자랐지만 캐서린이 본 것처럼 독립심이 강하고 지적이며,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영화와 관련된 많은 인생의 스토리가 있지만 필자는 본인이 최근에 겪은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2017년은 필자에게는 폭풍이 몰아치고 간 것처럼 많은 일이 벌어진 해였다. 그 중에서도 딸들과 겪은 이야기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 개인사이기 때문에 소소히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들과 겪은 갈등과 아픔은 내 개인 인생에서 가장 참혹한 시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절했다. 그래도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여서 그런지, 그들을 안본다고 맘 편한게 아닐 듯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만 끓여야 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을 만나 답답한 가슴을 호소하던 중 오래전에 보았던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파며 들어왔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은 미국 몬타나주의 장로교 목사와 그 두 아들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는 인생이야기이다. 첫째 아들 노먼은 아버지의 교육과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여 아버지처럼 문학과 시를 사랑하며 모범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반면 동생 폴은 어려서부터 열정적이며 과감했고 때론 무모하게 행동했다. 그러다가 위험한 도박에 빠져 들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빚을 지게 되고 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필자는 여러 차례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를 보았다. 미국 몬타나주의 아름다운 자연광경이며 맑은 계곡 물사이로 반사되는 아름다운 물빛이며 그 자연에서 플라잉 낚시로 맺어지는 가족애를 인상깊게 보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아름다운 장면가운데서 필자의 가슴에 메아리쳐 오는 장면은 둘째 아들이 죽은 후 아버지 맥클린의 마지막 설교내용이었다.
“사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그들에게 좀처럼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엇으로 그들을 도와야 할지 모를 뿐 아니라, 대개 그들이 원치 않은 것을 주고 맙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하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할까? 자식을 앞서 보낸 아비의 심정은 그 무엇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식은 늘 아버지의 규범을 깨고, 아버지의 권위에 반항하고 아버지를 벗어나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다가 결국 위험한 도박에 빠져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고 죽게된다.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맥클린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폴이 죽고 난 한참 후에야 아들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교회 강단에 선 아버지는 비로소 회한에 잠겨 이렇게 말을 잇는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거의 돕지 못합니다. 무엇을 도와야 할 지 모를 뿐 아니라 대개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순 있습니다.”
이 말을 되내이며 필자도 내 딸을 이해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가져 보았다.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그의 사고구조와 행동을 보면서 실망하지만, 사랑해야겠구나 하는 의지를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영화는 이처럼 우리에게 치유와 통찰력을 제공한다.
‘쉰들러리스트’를 보았을 때 전 세계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그 영화 한편이 가져다주었던 메시지는 수천 수백 개의 교회에서 울려 퍼졌던 설교보다도 훨씬 더 힘있게 사람들의 가슴에 메아리를 치게했고, 심금을 울렸다. 영화는 인생을 보여주고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 질문을 던져온다.
인생과 영화 그리고 인문학
영화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스트레스를 풀거나 여가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한가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또는 여가를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처음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오래전에는 영화의 중요한 기능이 여가의 선용이나 재미가 영화의 주요 목적이기도 했다. 물론 영화의 역사 초기를 보면 영화의 대부분이 종교적인 주제로 사용될 때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초기의 영화는 전도자들에 의해 제작되기도 했다(CCC에서는 지금도 미전도 종족 지역 전도시 지금도 나사렛 예수 등의 영화를 보여주고 전도한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와 캐서린 부부의 아들 허버트 부스가 호주 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 허버트 부스는 조셉페리(Joseph Perry)의 도움으로 단편 영화와 슬라이드, 찬송, 설교, 기도가 결합된 “십자군 군병들”이라는 일종의 멀티미디어 쇼를 제작했다. 그 후 허버트 부스는 뤼미에르 영사기로 구세군 신자중에서 뽑은 아마추어 배우들이 만든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대는 이러한 요소와 함께 영화는 교육적으로 효과적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 한편을 보는 것은 그 어떤 교육내용을 받은 것 보다 훨씬 인생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실제적인 교육효과가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화가 사람들을 한 쪽 방향으로 세뇌시키는 역할로 이용되어온 역사도 있다. 그래서 전체주의 시대에는 영화가 백성을 계몽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산주의사회가 영화를 통해 주민들을 세뇌하는 경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군대에서 보았던 반공 영화들이나 다큐멘터리류의 영화들을 통해 반공교육에 길들여졌던 경험들을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공감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영화는 곧 그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문화적 콘텐츠이자 거울이다. 영화를 통해 현 시대를 비판하기도 하고 특정한 사건이나 사실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말을 걸기도 한다. 미국의 올리버스톤 감독은 영화 ‘JFK’나 ‘플래툰’ 그리고 ‘닉슨’ 등의 영화를 통해 역사를 재해석하고 현 정부의 부당함에 대해 꼬집는다.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창동 감독도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을 통하여 이 시대의 주요한 이슈들에 딴지를 걸기도 하고 대중들의 시선을 성숙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심지어 영화는 사회의 정책을 바꾸기도 하고 정부를 대신해 정의를 행하기도 한다. 영화 ‘도가니’는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게 함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옹호한 법체계를 뒤집고 정의를 행하게 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영화는 현대를 대변하는 문화콘텐츠이자 인간들의 인생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서 중요한 인문학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찰스 쿨리(Charles H. Cooley)는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동시에 ‘거울에 비춰진 자아’(looking-glass self)라고 강조한다. 찰스 쿨리는 우리 인간이 매일 거울을 보고 자신을 인식하듯이, 참다운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 의해 비춰지는 의미를 통해 자신을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반사해 주는 것이며,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거울에 비춰진 자아를 통해서 자아 인식과 자아 성찰 그리고 자아 성장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인간 삶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에는 인간 삶의 모습과 여러 양태를 담겨져 있다. 그래서 영화는 인간에게 인간의 삶을 반영해 주는 거울의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 렌즈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와 삶과 인생들을 바라보고 추적한다. 그리고 렌즈를 통하여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게 한다.
인문학의 중요한 목표는 바로 ‘자아성찰’이다. 이 자아성찰을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기능이다. 그래서 인문학하면 흔히 ‘문사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문학, 역사, 철학’의 준말인 것이다. 서두에서도 보았지만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인문학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았다. 영화는 ‘문사철’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사실 ‘문학, 역사, 철학’을 종합하고 있는 종합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영화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희곡이라고 해서 바로 ‘문학’의 주요한 장르이다. 또한 영화는 역사를 다루기도 하고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역사관을 반영한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에는 영화라는 렌즈를 통하여 인간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들을 관람자들에게 조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영화 한편을 잘 관람하는 것은 영화라는 인문학을 통하여 자신을 반추이고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인문학적 세례의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로버트 존스톤은 ‘베켓’이라는 영화를 보고 자신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야 할지 결심 하는 계기가 된다. 존스톤은 영화에 나오는 토머스 베켓을 보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역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일소하고 개신교 지도자가 된 것이다(베켓[Becket, 1964]은 아카데미 12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리차드 버튼과 피터 오툴이 주연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 헨리2세와 그의 술친구 토머스 아베켓에 대한 스토리이다).
헨리2세는 여자들과 즐기고 전쟁을 일으키고 세금을 올리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를 원했다. 그러나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 영국 국교회의 대주교가 늘 눈에 가시였다. 대주교는 늘 헨리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헨리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술, 여자, 춤’ 친구인 토머스를 대주교에 앉히는 기발한 결정을 했다. 한가지 문제만 제외하면 기막힌 결정이었다. 그런데 토머스가 자신의 새로운 소명(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헨리는 토머스가 대주교직을 적당히 수행하면서 옛친구이자 왕인 자신의 바람을 들어주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토머스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함으로 결국 죽임을 당한다. 로버트 존스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였다고 한다. 그리고 용기를 얻었다. “내가 거룩할 필요는 없다. 토머스도 거룩하지 않았다. 다만 내 부름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의 인생과 삶을 통하여 사람들은 성찰을 하기도 하고 치유도 받고, 통찰력을 얻기도 한다. 극중 인물을 자기의 삶에 대입해 보기도 하고 비교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살펴보거나, 용기를 얻는 것이다. 때로는 극중 인물이 ‘반면교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평소 살피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극중 인물의 삶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삶을 ’타산지석’으로 성찰하는 경우다. 이처럼 영화는 자기를 성찰하고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계들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안목들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생과 삶에 대한 여섯가지 주제들에 대 하여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삶과 죽음이다. 이 주제야 말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사랑과 미움이다. 이 주제 역시 인간역사와 실제 삶에서 얼마나 자주 부딪히는 문제인가?
셋째는 생존과 발전 혹은 변화이다. 영화를 새로운 삶에 대해 용기를 가지고 변화를 추구했다는 말들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넷째는 권위와 불복종이다. 이것은 현실과 역사라는 대하 주제와 맞물려 있는 거대 담론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들이 결국 인류의 물살을 바꾸는 중요한 테마가 되기도 한다.
다섯째는 현사회 질서에 적응 혹은 순응함인가? 아니면 그것에 역행할 것인가? 이러한 주제는 여섯 번째 주제와 맞물려 영화가 실제 우리 삶에서 인간의 정의를 이끌어내는 주요 원동력이 되어 왔다.
여섯 번째는 악의 편에 서는 것과 정의와 희생, 선의 편에 서는 것인가? 이다.
이처럼 우리는 영화라는 ‘세례’를 통하여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인식할 뿐 아니라 반성하고 자숙하고 성찰하며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를 ‘세례’라고 표현한 데에는 필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세례’라는 종교적 어휘를 일부러 가지고 와서 표현하는 이유는 영화를 통해 ‘새로와지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세례’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기독교인과 그렇지 않은 비기독교인과 구별하는 표지는 ‘세례’의 유무이다. 이처럼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기독교적 표지인 것이다). C.S 루이스(C.S Lewis)는 그의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자신이 ‘다른 세계의 그 무엇’에 끌렸던 어린시절의 경험을 소개한다. 이것을 그는 ‘예기치 못한 기쁨’으로 표현하며 이러한 일상속에서 발견되었던 만남과 발견 그리고 깨달음이 바로 종교적 경험이었다고까지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C.S 루이스, 예기치 못한 기쁨, 강유나 역 [서울: 홍성사, 2005]).
루이스는 꽃이 피어있는 까치밥 나무덤불의 냄새를 맡았을 때 베아트릭스 포터의 ‘다람쥐 넛킨’에서 가을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바그너의 낭만주의 음악을 들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술회한다. 루이스는 이것을 ‘기쁨’이라고 부르는 데 처음에는 이것이 내면의 ‘갈망’인줄 알았다. 후에 루이스는 이렇게 회고한다.
“마치 세계 끝에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이제 바로 내 옆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룩함은 방안에서, 또는 내안에서, 또는 내뒤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한 때는 너무 멀어서 잡을 수 없었다면, 이제는 너무 가까워서 잡을 수 없었다.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었고 너무 평이해서 지식을 동원하여 이해 할 수 없었다. 그 날 밤 나의 상상력은 어떤 의미에서 세례를 받았다”
루이스는 이러한 일상의 영역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이것을 종교적 용어인 ‘세례’로 표현하며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귀의한다.
일상에서 얻게 되는 신비는, 영화의 모든 소재가 일상의 삶을 초월의 삶으로까지 잇대게 하는 혜안을 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준다. 인생은 한 편의 영화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 기대어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으로서 최선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늘 고민할 때 “예기치 못한 기쁨”의 ‘세례’를 맛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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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ks.joo@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