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요나서개관 – 속 좁은 민족주의자 하나님과 단절하다.
요나서를 읽을 때 무엇이 먼저 생각날까? 요나서는 다른 선지서들에 비해 어렸을 때부터 많이 접해 보았기 때문에 친근한 성경중 하나이다. 성도들은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낄 것이고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조롱한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었던 기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큰 특징이 아니다. 요나서는 다른 선지서와는 달리 선지자의 메시지가 중심을 이루지 않는 유일한 책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앞서 살펴본 아모스서와 호세아서의 경우도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이라는 메시지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요나서는 요나의 메세지가 아니라 “요나에게 일어난 일”이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따라서 요나서는 요나의 선포가 아니라 요나의 상황에 대한 산문체 서술이 주를 이룬다.
이 시간 우리는 요나서를 심층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요나서 속에 간직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요나서의 시대적 배경은 아모스서와 호세아서의 시기인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B.C793~753)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열왕기하14:25).
이때는 우리가 아모스서와 호세아서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로보암 2세의 팽창주의가 성공함으로 인해서 국가적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경제적 번영으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사치와 연락이 있었고(암4:1), 터무니 없는 안전에 대한 확신과(암6:1)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의 승리의 날로 착각하는 상황이 만연해 있었다(암5:18-20). 또한 이때는 앗시리아가 그 지역의 새로운 지배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가 아닌 앗수르의 심판에 대해 선포할 것을 명하신다(1:2,3:4).
요나서의 구조는 특별히 흥미로운 구조로 되어있다. 2막 4장의 무대에서 전개된다.
제1막 1장 (요나서 1장) : 배의 간판 위에서 (도망하는 요나)
2장 (요나서 2장) :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요나)
제2막 1장 (요나서 3장) : 니느웨에서 (사역하는 요나)
2장 (요나서 4장) : 니느웨 동편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요나)
이렇게 흥미로운 구성 때문에 교회학교 시절에 단골 메뉴가 될 법도 했다.
그렇다면 2막 4장의 전체 내용이 어떻게 전개 될까?
먼저 1막 1장(요나서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해 니느웨에서 심판을 외치라고 하신다. 니느웨는 이스라엘 동북쪽 앗시리아의 중심도시로서 이방종교의 핵심이었고, 이스라엘을 위협할 만한 군사대국이었다. 즉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총아였다. 이 명령에 대해 요나는 『하나님을 대항』한다. 그 이유는 두가지 정도로 예측되는데, 한 가지는 이방적국이 회개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까봐 시샘 해서이고, 또 한가지 가능성은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선지자의 위신이 추락하고 창피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일것이다. 어쨌든 요나는 동북쪽의 니느웨가 아니라 서남쪽의 다시스로 도망을 하게 된다. 이때 하나님은 소명을 팽개친 요나가 탄 배에 험한 풍랑을 내리신다. 이런 상황에서 사공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자신들의 신(神)들을 부름으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나름대로 감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요나는 배 밑에 내려가 잠을 잔다. 자신이 그 환경의 원인임을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행동이었다. 하나님과 대립의 각을 세운다. 결국 제비뽑기에서 자신이 폭풍의 원인임이 밝혀지자 마지 못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이때 사공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즉시로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힘써 노를 저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풍랑을 견뎌내지 못하자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여기까지가 1막 1장이다.
1막 2장(요나서2장)은 하나님은 물고기를 준비하심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물고기 뱃속은 징벌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그곳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다. 믿음이 상승하고 충만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다! 아직도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1막 2장의 물고기 뱃속의 기도는 “순종이 그의 삶의 방식”임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직면할 때 “문제를 해결하는 도피처”로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번째로 임하면서(3:1), 제 2막이 열린다. 2막 1장(요나서3장)에서 요나가 니느웨에 갔고 그곳에서 요나는 마지못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그들의 회개를 기대하지 않는다(3:4,4:1). 그러나 요나의 기대와는 반대로 온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재앙을 돌이키시는 것이 아닌가?(3:10)
요나서4장은 2막 2장에 해당한다. 무대는 니느웨성 동쪽 언덕인듯하다(4:5). 요나는 이방인 적국인 앗시리아의 큰성 니느웨가 구원받게 되자 큰 혼란과 충격에 빠져 하나님께 분노한다(4:1).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다니!”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무엇인가? 요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스라엘사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동기에서 부여된 명령을 순종하지 않기 위해 별의 별 시도를 다한다.심지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되자 깊은 절망과 하나님께 대한 분노로 하나님과 실질적으로 단절한다. “속 좁은 민족주의에 의한 하나님과의 단절!” 이것이 당대의 요나의 모습이다.
이에 반해 요나서의 등장하는 언약밖에 있다는 이방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먼저 1장에서 그 배의 사공들은 원인모를 폭풍이 휘몰아쳤을 때 자신들의 신을 찾고 기도한다(이때 요나는 배 밑에서 편안히 자고 있었음). 또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지며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더 놀라운 것은 제비뽑기를 통해 환란의 원인이 요나였음이 밝혀지는 마당에 있어서도 의외의 행동을 한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위배하고 도망하여 그 일이 발생했다는 고백(1:10)을 들은 후에도 요나를 희생제물로 삼지 않고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힘써 노를 저어서 위기에서 탈출함으로 요나를 살리려고 무던 애를 쓴다 (1:13).
이것은 요나가 4장에서 니느웨의 어린아이 12만명까지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마음과 비교해서(4:11) 얼마나 경건하고 경이로운 마음인가? 선민이라 자처하던 요나에게 부끄러움을 가져다 주는 마음이었다.
또한 니느웨 사람들은 어떠한가? 요나가 단순히 니느웨의 멸망만을 선포했지만(4:9)(사실 요나는 니느웨성의 회개를 바라고 외치지 않았음) 그들은 왕으로부터 낮은 자까지, 심지어 짐승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요나는 속 좁은 민족주의와 닫힌 선민사상으로 인해, 또한 형식적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는 모습이 깊어만 갈 때,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증폭되어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요나서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좁은 의미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이 땅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구원과 진정한 복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소명자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통해 구원의 참된 복, 즉 하나님 안에서의 진실된 삶이 어떻게 확장되어 가는지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지켜보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꿈이 실현되어지기 위해 요나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사공들이나 니느웨 사람들, 그리고 요나)뿐 아니라 심지어 자연까지도 사용하신다.요나서에는 자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광풍을 일으키시고(1:4), 큰 물고기를 준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1:17), 고기에게 명령까지도 하시고(2:10), 식물과(4:6), 벌레와(4:7),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신다. 왜 그런 행동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주권으로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진보됨을 보이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적용되는 도구가 되게 하신다.
또한 더욱 놀라운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착한 마음의 발현)을 실행하시기 위해서 소명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요나의 어떤 핑계와 오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환란의 폭풍속에서도 안일한 잠을 자고 있는 요나이지만 그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기필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사용하신다. 택한 자를 통해 하나님의 착하신 마음이 온누리를 품도록 이끌어 가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그 소명자로 세우신 사람은 끝까지 그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사역의 본질에 동참하도록 주권적으로 이끄신다.이것이 하나님과 소명자와의 관계이다.그래서 선지서중의 하나인 요나서는 다른 선지서들과는 구별되어 메시지 선포가 아니라 소명자의 길에서 일탈하려는 선지자 요나와 그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아름다운 소명에 동참케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최대의 교훈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세계만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원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전율하게 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나』라는 존재를 이 시대의 소명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음성에 깊이 반응하도록 하는 책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기대, 즉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번복될 수 없음을 발견한다. 물론 소명자도 시대 분위기에 반응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쪽으로 기울일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추적 레이더 망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신 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착하신 마음이 담긴 소명』에 결국은 우리가 순종하며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요나는 이 소명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상실하게 되는 옛이스라엘을 대표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 2,800년 전에 요나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주는 사명을 망각했음.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요나 시대뿐 아니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복음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됨이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임을 믿고 있을까? 우리 시대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은혜아래 있는 죄인들이란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기에 요나의 이야기는 2,800년 전의 퀘퀘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요나인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예민하게 읽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길을 가기 보다는, 자신의 꿈과 생각으로 재단 한 길을 고집하는 요나의 모습!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의 메시지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타는 횃불같이 던져 그들의 마음에 십자가복음의 불을 붙이기 보다는 내 구원의 보루만을 사수하려고 웅크리고 있다면 우리야말로 이 시대의 요나일 것이다.
세계를 돌아보자. 아니 우리 주변만이라도 둘러보자. 이 시대의 요나로 살아온 우리를 부르는 곳이 얼마나 많고, 하나님께서 소명지로 삼으신 사역지가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가? 이제 우리는 요나가 가졌던 속 좁은 민족주의, 닫힌 선민주의 무의식적인 답습이 아니라,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의 발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삶으로 지펴 보임으로 시대를 복음으로 밝히는 것이 이 시대에 각성한 요나의 삶일 것이다. 이것이 2,800년 전 요나의 실패와 고민이 이 시대에 던져주는 의미 있는 질문의 잔잔한 파장이 될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