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21)
제17강 르네상스(Renaissance)이야기
인간, 이성, 자유, 그리고 과학의 시대가 오다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는 그 동안 공부해 온 유럽에서의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르네상스를 출발점으로 삼아 근세 유럽의 정신세계를 포함한 사회변동에 대한 인문학적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역사란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겉으로 보기에는 변하고 달라지는 것 같지만 실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아침이 지나면 저녁이 오고, 겨울이 가고 나면 봄이 오고, 인심은 아침과 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또 달리 보면 아침이나 저녁은 늘 있는 것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천년 전이나 천년 후에도 똑같이 순환하고, 인간의 마음이 변덕스럽다고 하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도 그 변화의 원리만큼은 또한 불변합니다. 세상만사 보는 눈에 따라 다르고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해 우리는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의 생각을 살펴보던중 대립되는 쌍둥이 철학자로 불리우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우주 만물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변화란 인간의 감각이 만들어낸 착각이요 환상일 뿐이다’ 실체의 불변성, 진리의 불변성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이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헤라클레이토스는 파르메니데스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지닌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 Panta rei’를 주장했습니다. 생성과 변화의 철학자였던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만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쉬임없이 변화하며 유전한다’ ‘어제 뜬 태양과 오늘 뜬 태양은 같은 것이 아니다. 20대의 홍길복과 70대의 홍길복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본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만물은 날마다 변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 역시 통일된 하나의 의견만 갖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저녁이 오면 아침은 올 것이고 이 겨울이 가면 또 다시 봄은 올 것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고 역사는 반전을 거듭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모든 것이 변하고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 변화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그 변화의 법칙 자체는 영원히 변치아니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하는 ‘실체 불변의 원칙’과 헤라클레이토스를 대표로 하는 ‘실체 변화의 원칙’은 지금도 끝나지 아니한 논쟁 중 하나입니다.
한편 헤겔의 말대로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의 자유에서 인간들의 자유로, 왕들의 자유에서 시민들의 자유로, 한 사람의 자유에서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 소수의 자유에서 다수의 자유로 역사는 끊임없이 자유의 폭을 넓혀 왔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 저변을 확장해 나갈 것이라는 신념입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어떤 경우에는 역류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나 결국 모든 물줄기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다 함께 바다로 흘러가듯이 역사 또한 正反合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앞으로 지향한다(Aufheben)는 믿음입니다.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는 근대 철학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이런 바탕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어 가고자 합니다.
르네상스 개념의 의미
이 운동이 처음 출발한 이탈리아어로는 Rinascimento라고 씁니다만 그러나 1855년 프랑스의 역사학자였던 미슐레가 그의 ‘프랑스사’ 제 7권에서 이 시대의 역사를 총칭하여 프랑스어로 Renaissance라고 표기함으로 학문적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영어에서도 불어 발음을 그대로 채용합니다. 이 단어의 접두어 re는 ‘다시’ ‘거듭하여’라는 뜻이고 nascere는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란 ‘다시 태어남’(reborn) ‘재생’(rebirth) ‘부활’(resurrection) 혹은 ‘부흥’(revival)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넓게는 14세기 초부터 16세기말 사이 유럽에서 시작되어 넓게 퍼져나간 문예부흥, 혹은 문화 변화 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르네상스 개념은 14세기의 특정운동으로만 이해되거나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의미에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르네상스를 말하기도하고 미국적, 영국적, 한국적 르네상스 같은 지역적 부흥이나 재생운동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14세기 이탈리아를 중심한 서유럽에서 태동되기 시작한 르네상스운동은 도대체 무엇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또 무엇을 죽은 데서 다시 살려내게 하는 운동이었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르네상스는 중세 천년동안 잊혀졌고 죽었다고 여겼던 고전을 다시 살려내고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적 교리에 가리워져서 무시하고 소홀히 여겼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고전들을 되찾아내서 다시 읽고 그 의미를 되살려내는 ‘문예를 부흥시키는 운동’이 르네상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14세기의 르네상스운동을 ‘문예부흥’이라고 번역합니다. 보다 구제적으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들을 비롯하여 에피큐리안과 스토익학파의 글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읽고, 그것을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와 아람어로 번역하고, 가르치고, 그 의미를 찿아내는 ‘고전 되살리기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는 ‘책’이라고 하면 바로 ‘그 책’ The Biblia(Bible) 하나만을 의미했을 정도였으며 설혹 다른 책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들은 오직 그 책, 성서 하나만을 위한 해설서로써의 성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14세기 이후 사람들은 그 동안 잊어버렸던 다른 책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모든 책들은 제각기 다른 사상과 역사와 교훈을 지닌 책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동서문화가 교차되고 이슬람과 같은 새로운 종교가 지식의 저변을 넓힌 데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지금도 우리는 동양의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시경, 서경, 역경 등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서양의 호머, 소포클레스, 헤로도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루타르코스, 성서, 쿠란, 등등 고전 회복운동이 절실한 시대에 쳐해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는 오늘을 비쳐주고 내일을 가르쳐줍니다. 고전 속에는 오늘이 있고 내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회복, 재생이란 중세 천년을 이어온 권위주의적 교권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스러운 생각, 자유스러운 활동을 되살려내는 ‘인간 회복 운동’이 핵심입니다. 르네상스란 그 동안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교회가 억압해온 인간의 자유스러운 생각과 성품과 삶의 태도를 되살려내어 보다 넓은 세계관과 인간관을 지니도록 하는 인간 해방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중세 천년을 지배해 온 세계관과 인간관은 모두가 ‘기독교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이었습니다. 신, 하느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종교적 세계관과 종교적 인간관이란 다양한 여러가지 관점들 중 하나일 뿐이지 그것만이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운동은 인간화운동(Humanization)운동입니다. 셋째로 르네상스는 지난 날 인간들의 눈과 이성을 어둡게 하고 가리웠던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비신화(Dymytholoy)하는 운동이었습니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고 곰이 사람이 되고 하느님이 사람과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뱀이 사람에게 말을 거는 등 신화적 스토리들로 그려진 것들을 진짜 사실인양 믿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신화요, 상징이고 따라서 이제는 그 상징적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신화가 의도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 르네상스가 추구한 회복운동입니다. 이야기가 아니라 의미다! 스토리가 아니라 미닝(meaning)이다! 의미를 찾아라!
요약해 봅니다. 16세기 르네상스는 고전의 발견을 통한 역사의 회복이요, 자유의 선포를 통한 인간성의 회복이며, 신화적 스토리에서 그것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 가는 철학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르네상스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전’은 神 중심의 시대요, 信仰 중심의 시대였습니다. 魔術과 神秘의 시대요, 占星術이 판을 치던 시대였습니다. 주어진 현실 보다는 죽은 다음에 갈 死後 세상인 天國만을 강조하던 시대였습니다. 상식과 자연과학의 법칙까지도 신의 이름으로 억누르던 非合理的, 非科學的 시대였고 일체의 모든 의심과 질문들은 거부된 시대가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였습니다.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야합하여 민중을 우민화하고 억압과 폭력으로 다스리던 시대요, 백성들은 가난과 질병과 무지를 운명과 팔자로 받아드린 시대였습니다. 문맹률은 거의 98%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과 살륙을 정당화하고 피로 얼룩진 시대였습니다. 한마디로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시대란 정치적 종교적 횡포로 인간이성이 철저하게 유린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일체 모든 것의 중심을 神에서 人間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信仰에서 理性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科學과 常識과 合理性을 중시하고 죽은 다음에 간다고 하는 천국보다는 지금 여기에 주어진 현세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대로 변했습니다. 이론과 논리, 분석과 체계의 시대가 왔습니다. 따지고 묻고 질문하고 논쟁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궁금한 것은 묻고 의심이 되는 것은 의심하라고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서히 민중과 시민의 시대가 조금씩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멀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자유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하고 인간해방에 눈이 떠지기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르네상스 이후 세상은 이성과 과학과 상식과 합리성의 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그럼 도대체 어떤 요인들이 있어서 이런 혁명적 변화의 시대가 오게 되었을까요? 용암이 분출되기 전 지층 아래에서는 오랜동안 꿈틀거리는 잠복기가 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사회적 분노와 시대적 공감대가 형성되게 마련입니다. 자연 현상의 변화이던,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사회변혁이던, 아니면 문화와 예술, 사상과 종교의 새로운 태동이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변혁에는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모든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준비된 시간이 되어야지 드디어 불빛을 비칩니다. 14세기 이후 북부 이탈리아에서 부터 시작된 르네상스운동의 직접적이며 결정적인 원인, 즉 르네상스의 Background로는 흔히 다음 3가지를 거론합니다.
르네상스운동이 가능했던 첫 번째 원인은 경제적 요인입니다(Economic Background). 5세기말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지만 비잔틴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는 이후에도 천년 이상을 지탱해 왔습니다. 게르만민족이 침투해 온 이후 알프스 북쪽에 자리한 서유럽은 여러 개의 국가들로 나누어서 세워졌지만 중북부 이탈리아는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채 독립된 자치도시(Comune)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자치도시들은 차츰 주변의 농촌지역들 까지도 흡수해 가면서 그 저변을 넓혀 나감으로 하나의 도시국가처럼 변모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기존의 봉건 영주들도 차츰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면서 도시경제가 농촌경제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반도이기도 하지만 동서양의 중간 교차 지대로써의 이탈리아는 그 지리적 잇점으로 일찍이 비잔틴 제국과 여러가지 형태의 교류를 이어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 가운데 또 하나는 당시 이슬람교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과 폴투갈)의 경제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는 상업에다 큰 도덕적 무게를 두지 않았는데 이슬람은 처음부터 그렇질 않았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자신이 상인 가문의 출신이기도 했지만 이슬람교는 그 바탕에서부터 대상 무역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종 비단, 도자기, 금, 은, 유리, 의복, 가죽제품들을 비롯한 향신료와 밀 등을 이곳 저곳으로 유통, 교환하면서 부를 창출해 나갔습니다. 8세기 이후 서부 지중해의 여러 섬들이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가고 북부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은 점차 이슬람이 제공해 주는 경제적 울타리 안에 편입이 되어갔습니다. 한편 11세기 이후 계속된 십자군전쟁은 이들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또 다른 상업적 이익을 안겨주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표면상으로는 예루살렘의 탈환이라는 종교적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긴 했지만 내면적으로 볼 때는 당시 영주들과 상인들의 경제적 이해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군전쟁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서 사람을 죽고 죽이는 무자비한 전쟁이었지만 다른 한편 이 전쟁을 통하여 동서의 간에는 각종상품의 교류와 무역이 증대 되었고 문화가 교환 되었으며 교통의 통로가 넓혀졌을 뿐만 아니라 동방과 서방 사이에는 여러가지 인적, 물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가 증대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곳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북부 이탈리아였습니다. 피렌체를 중심한 북부 이탈리아는 전쟁 때문에, 전쟁을 이용하여 크게 돈을 벌었습니다(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지음, 행성잎새, 2014. / 모든 전쟁의 이면에는 전쟁 당사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의 경제적 이익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컨데 한국전쟁은 일본의 경제 부흥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고 베트남 전쟁에서 일본은 단 한명의 군인도 파병하지 않았지만 한국보다 훨씬 큰 경제적 이득을 얻었습니다). 하여튼 이 시대 피렌체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되었으며 이에 따라 최초의 은행이 생기게 되어 각종 예금과 대출업무는 물론 무역에서의 재정 결제까지도 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무역물품들은 당연히 수요에 따른 여러가지 제조업들을 유도했고 사회는 전반적으로 커다란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사회적 부의 증대는 아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 되었습니다. 즉 개인과 사회 전반에 걸친 경제적 발전과 부의 축적은 자연스럽게 중세의 장원제도와 봉건체제에 위협을 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중세의 농업사회에서 서서히 제조업을 포함한 공업과 상업사회로 이전하는 전조가 되었고 나아가 봉건시대에서나 통하던 각종 사회적 신분제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부유한 상인계급의 출현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향유하고 싶어하는 인간 해방과 자유의 이상을 추구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질적 여유는 정신적 자유를 찾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그럼 그 시대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상인들은 그들이 획득한 부를 어디에다 투자했을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관심하는 질문입니다. 이들 신흥 부호들은 르네상스운동을 지원하고 문예를 다시 살려내는 일에다 집중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잊혀졌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고전들을 다시 읽고 번역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전, 문학, 예술, 음악, 미술, 건축 같은 분야를 되살려내는 데는 모두 큰 돈이 듭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여유가 주어졌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메디치가문을 비롯한 사회적 신흥 부유계층이 이런 일을 위한 기초 제공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면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부호는 메디치 가문(The House of Medici)입니다. 메디치가는 13세기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근 350여년, 13대에 걸쳐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서유럽 전체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패밀리입니다. ‘Medici’라는 말이 의미하는 대로 처음에는 단순히 의사나 약사로부터 출발하였지만 그 후 모직물을 제조, 판매하는 것으로부터 각종 무역업을 통하여 부를 쌓고, 그 후에는 유럽 최초로 메디치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업을 발전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이 가문을 통하여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세속의 정치권력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엄청나게 큰 귀족 명문대가를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획득한 부와 권력과 명예를 단순히 자신들의 호의호식으로만 쓰지 않고 그 시대 문예를 부흥시키는 일에 막대하게 기여했다는데 있습니다. 15세기 이후 피렌체가 배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마키아벨리 같은 거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배출 되었을까요? 이런 르네상스의 거물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한결같이 메디치 가문과 같은 든든한 물질적 후원자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조바니 메디치, 로렌초 메디치를 비롯하여 메디치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대를 이어서 각종 대학을 세웠고 피사대학과 피렌체 대학을 비롯한 각종 대학 마다 막대한 재정적 후원금을 냈습니다.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설립하고 유명한 우피치 미술관을 세우고 수많은 미술품들과 장서를 수집하고 각종 학문과 예술, 미술, 건축, 음악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오늘날의 피렌체를 예술의 도시로 만든 것은 그 옛날 메디치 가문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메디치는 비잔틴을 비롯하여 동방으로 수많은 학자들을 보내어 각종 고전들을 사오게 하고 산 마르코 광장의 정원에는 고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을 발굴하여 어렸을 때부터 양성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도 자주 단테나 보카치오를 읽고 파티 때는 학자들을 초빙하여 담론을 했습니다(한국의 재벌들은 돈을 어디다 쓰고 있습니까?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과 비교해 봅시다). 한 마디로 정리해 봅니다. 르네상스의 발흥에 영향을 끼친 첫 번째 그룹은 경제와 돈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지닌 사람들이 나타났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이 가능했던 두 번째 배경은 자연과학의 발전입니다(Development of Natural Science). 중세시대와 그 시대의 중심이었던 기독교 신학과 교회에 대한 르네상스의 결정타는 자연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종교와 사상, 문화와 예술 등 모든 분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지난 날 불의 발견, 농기구의 사용, 석탄의 발견, 증기기관의 발명 등이 산업혁명과 분업체제를 비롯한 경제 체제에 미친 영향이나, 물리학에서의 ‘불확정설’[The Theory of Uncertainty]이 인문학을 비롯한 각종 사회과학에 미친 영향이나, 세탁기의 제조와 피임약의 개발이 여성해방과 사회참여에 미친 영향이나, 냉장고의 대량생산이 가져온 인간의 무한한 탐심의 고취나, 각종 컴퓨터와 스마트 폰과 SNS의 이용이 인간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등에 대해서 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튼 14세기 이후,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유럽 각지에서는 그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자연과학적 발견과 발명들이 개인 삶은 물론 사회 전체의 틀과 인간의 생각과 의식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첫째가 인쇄술의 발견입니다. 1445년경 독일의 한 금속 세공업자요 과학자였던 Guttenberg가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금속활자로 된 인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이 최초의 인쇄기를 이용하여 ‘구텐베르크 성서’를 찍어냈습니다. 이는 그 이전까지의 성서는 오직 필사본으로만 만들어졌으므로 소량에다가 오직 신부들과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었섰습니다만 인쇄술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성서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쇄술의 발견, 그리고 이어진 성서의 대중화는 천년이나 계속되어 온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뒤집어 놓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한 작은 시골 수도원에서 출발한 루터의 신학적 문제제기였던 ‘95개조 논박문’도 이 인쇄술의 발견이라는 거대한 바람을 타고 불과 몇 주 만에 전 유럽으로 확장되고 퍼져나갔습니다. 실로 인쇄술의 발견은 오늘날 컴퓨터나 각종 전자정보의 발견 보다 훨씬 큰 파급효과를 가져왔던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인쇄술의 발견과 그 확대효과는 인간 지식의 대중화를 급속하게 앞당겼던 것입니다(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보다 약 70여년 전인 1377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直指心體要節’[흔히 ‘直指心經’이라고도 합니다]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습니다. 직지심경은 상하 두권으로 된 불교서적으로 상권은 없고 하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자연과학의 두 번째 영향은 신대륙의 발견입니다. 1492년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 Christopher Columbus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신대륙인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항해에 성공했습니다. 그 후 그는 4차례에 걸쳐 오늘날의 북미와 중미를 점령해 나갔습니다. 물론 금을 찾아 서진을 감행했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가 발견한 신대륙을 인도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아메리카대륙의 발견과 그 점령에 대해서는 항해술과 유럽을 넘어서는 세계사의 지평을 넓혔다고 하는 긍정적인 면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홀로코스트적 살해와 노예화 등에 따른 부정적인 평가가 함께 있습니다만 당시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었던 유럽인들에게 이 사건은 세계를 새롭게 보고 넓게 이해하게 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오스만 터키에 의한 콘스탄티노풀의 함락과 이를 가능하게 했던 신형 무기의 개발과 대량 생산이 르네상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세 시대 이전의 전쟁 무기는 대부분 돌과 활, 창과 칼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전쟁 무기는 차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오스만 제국은 새로운 전쟁 무기들을 개발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총과 대포는 물론이고 여러가지 화학 무기들이 출현되었습니다. 대량 살상이 가능한 이런 무기들의 개발은 전쟁 자체만이 아니라 전후의 여러가지 생활물품들을 선진화 시키는데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드디어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 Nicolaus Copernicus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논문을 통하여 우주와 모든 천체들은 하나의 공 처럼 생긴 구형이며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드디어 地動說을 주창한 것입니다.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 자연과학자들이 가져다 준 이런 생각의 전환이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은 물론 교회까지도 천동설(지구중심설)을 마치 성서적 진리처럼 굳게 믿고 있던 시대에 태양 중심설인 지동설을 주장함으로 근대 자연 과학에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어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Galileo Galilei는 교회와 대립하여 이단이라고 지목되어 종교재판을 받으면서 까지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하면서 자연과학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고전 물리학의 기초를 놓은 Isaac Newton은 ‘Principia’를 통하여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만유인력의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y)을 통하여 전통과 보수를 넘어서고 그것을 깨트리는 진보적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놓게 됩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마디로 정리해 봅니다. 문예부흥 운동이 출현하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우주와 세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고 해석을 시도한 뛰어난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세 번째 요인은 14세기 이후 사람들의 의식(사물에 대한 이해)이 점점 각성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문학과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창의적 자유정신이 고양되었기 때문입니다(Creativeness and Freedom in Arts). 사람은 알아야지 생각이 달라지고, 알려면 무엇인가 읽고 쓸 줄을 아는 것이 기초가 됩니다. 중세 말기에 이르도록 당시 사람들의 문맹률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정도였습니다. 정확한 통계 자체가 알려진 것은 없지만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당시 유럽 전체 인구의 약 98%가 문맹이었다고 합니다(1945년 해방 당시 우리나라도 문맹률이 작게는 78%, 많게는 90%로 봅니다). 농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귀족들과 기사들과 왕족들까지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라고 불리웠던 프랑크의 샤를 마뉴도 글자를 몰라서 싸인을 할 때도 성직자가 써준 것을 보면서 싸인을 그렸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동로마제국의 이레네 여제에게 청혼을 했을 때 거절당한 이유도 ‘글자 하나도 읽고 쓸줄 모르는 야만인과는 결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당시엔 책이 거의 없기도 했으려니와 너무 비싸서 아무나 가까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쇄술이 나타나기 전에는 책이란 금 보다 더 비싼 것으로 특수층의 전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당시에는 누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을까요? 아주 소수의 일부 성직자들만이 문맹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수도원에 있던 일부 성직자들만이 글을 읽고 쓰면서 성서를 필사하는 일을 했으므로 다행히 문맹을 면했습니다만 이들 성직자들 중에서도 일반 수도사들은 노동과 기도 등을 포함하여 허드렛일이나 했을 뿐이고 아주 특수한 수도사들에게만 이런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한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세 말기에 이르면서 교회와 각종 수도원에서는 여러가지 형태의 부설 학교들을 세워 운영함으로(어린이들을 위한 초등학교,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인문학교, 궁정학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그리고 마침내는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 살레르노대학, 옥스포드와 켐브릿지대학 등이 이어졌습니다) 성직자들로부터 귀족들과 왕족들은 물론 그들의 자제들을 포함하여 보통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글을 익힐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는 한 시대의 지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글을 읽을 뿐만이 아니라 쓰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을 비롯하여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같은 문학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이는 중세의 종교적 및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출입니다. 글을 읽고 쓸줄 알게 됨으로 표현의 자유와 전통에 대한 비판정신이 움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교회와 성직자들과 귀족과 왕족들이 첫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성이 살아나기 시작함으로 지금 까지는 교회와 일부 귀족이이나 왕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들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누구든지 한번 시도해 볼 수 있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조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컨데 이제까지는 음악이란 남자들만이 불러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음악을 하는 것은 음란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음악의 대중화 하나만 해도 결코 쉬운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의 회중 음악이 시작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성악을 비롯한 음악의 기법들이 발전된 것도 모두 문맹의 퇴치와 인간 지성의 발달과 맞물려있는 것입니다. 미술 역시도 자연주의적 성격과 사실주의가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이 종교적 상징과 거룩성으로 가리워졌던 가면을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나체화가 등장하고 명암법과 원근법이 개발되었습니다. 통시적으로 볼 때 이런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인간성 속에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자유정신과 비판정신이 표출된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가능하게 된 세 번째 요인은 바로 이 자유와 비판을 향하여 도전한 인문학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 3가지 요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경제적 요인 입니다.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게 된 새로운 계층이 생겨남으로 르네상스는 가능해졌습니다. 둘째는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자각된 과학 기술자들의 뒷받침이 없었더라면 르네상스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자유정신이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민의식은 지식의 확장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견인한 그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 있었기에 르네상스는 발아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이하에서 저는 르네상스를 꽃피운 몇몇 인문주의자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음악가들과 미술가들과 건축가, 조각가들을 포함하여 작가, 정치인, 사상가들이 모두 거론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제 힘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들은 생략하고 다음 몇 사람의 인문주의자들과 그들의 작품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보카치오(Giovanni Bocaccio, 1313–1375)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며 시인으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주로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영향을 받았기에 그의 소설 ‘데카메론’은 단테의 ‘神曲’(Divine Comedy)에 비교하여 ‘人曲’ 즉 ‘Human Comedy’라고 부릅니다. 시, 산문,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앞에서 말씀드린 ‘데카메론’(Decameron, 1353년 작품)을 꼽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유럽에 퍼진 흑사병(Pest)이 피렌체에 옮겨오는 스토리로 시작이 됩니다. 이미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피렌체에서만도 10만명이나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가운데 7명의 젊은 여자들과 3명의 단정한 남자들이 이 죽음의 병을 피하여 피에솔레라고 하는 한 작은 마을의 별장으로 도망하여 거기에 머물면서 열흘 동안 열 사람이 돌아가면서 매일 한가지씩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으로 꼭 100개의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데카’란 10을 의미하고 ‘메론’이란 날자를 뜻합니다. ‘10일간의 이야기’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별장에 모인 이들 청춘남녀들은 밖에서는 온 세상이 흑사병으로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희희낙낙하면서 삶의 또 다른 기쁨을 노래합니다. 물론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운명의 힘, 비극적인 사랑, 연약한 인간의 의지력, 속고 속이는 인간들, 영리한 남자들 보다 항상 더 영리한 여자들,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의 주제는 인간과 인간 세상의 온갖 모순과 허위의식과 위선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특히 수도사와 수녀들, 신부와 주교들, 수도원장과 수녀원장 등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성적 욕망과 온갖 명예욕과 탐욕을 비롯하여 귀족들과 왕족들,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신흥 부호들인 상인들의 속고 속이는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파헤칩니다. 종래의 모든 거룩하다고 여겨온 것들의 이면을 들추어내면서 ‘거룩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더러워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썩으면 제일 악취가 난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그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거나 쓸 수가 없었던 이런 글을 통하여 보카치오는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일까요? ‘인간을 억압하지 말아라! 모든 인간을 정치와 종교의 폭력으로 부터 해방 시켜라!’ 실로 보카치오는 중세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해방 시키려고 노력한 인문주의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이런 소설을 라틴어가 아닌 자신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씀으로 언어의 포로가 된 그 시대의 사람들을 언어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만드는데 일익을 감당해 냈습니다.
2)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 사상가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1512년에 메디치 가문에다 헌정한 ‘군주론’(Il Principe)으로 이는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고전 중 하나로 불리웁니다. ‘마키아벨리즘’ 혹은 ‘마키아벨리주의’(Machiavellianism)라고 부르는 그의 정치사상은 국가지상주의적 정치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는 현실정치를 윤리적 규범으로부터 해방 시키자는 입장입니다. ‘정치란 추구하려고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모술수를 다한다’는 것이 정치의 속성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해석입니다. ‘정치의 본질은 권모술수다’ ‘정치가란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나빠도 된다’ ‘군주는 선천적으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어야 한다’ ‘군주는 양면성을 지녀야 한다. 권위와 자비, 폭력과 사랑을 동시에 행사 할 수 있어야한다’ ‘군주와 백성은 영원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갈등과 대립관계일 수밖에 없다’ ‘갈등과 대결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하다’ ‘정치란 갈등과 대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일견 보기에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중세의 정치적 권위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래도 그는 ‘백성의 정부’가 ‘군주의 정부’ 보다는 선한 체제임을 인정하면서 그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 대립, 대결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그의 정치사상은 중세를 넘어서려는 저항정신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고 봅니다.
3)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
르네상스 인문주의자(renaissance Humanist)중 대표자로 추앙받는 그에 대해서는 다음 달 강좌에서 좀 자세하게 언급하겠습니다.
4)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영국의 정치가이며, 합리적 인식론자였던 데카르트와는 쌍벽을 이루는 경험주의자로써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1620년에 출간한 ‘신기관’(Novum Organum)을 통하여 관찰과 경험과 실험을 통한 지식과 인식을 주장하는 경험주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귀납적 방법론’(Inductive Methodology)를 체계화했습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근세철학의 방법론 중 가장 획기적인 업적입니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던 논리학 책인 ‘오르가논’(Organum)을 넘어서겠다는 생각으로 ‘신오르가논’을 썼습니다. 흔히 그가 한 말 중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는 말은 사실 단순히 머리로 생각해서 얻어내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과 실험을 통해서 얻어내는 지식을 말합니다. 베이컨은 이런 경험적 지식만이 행동을 동반하는 실천적인 산 지식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르네상스의 개척자로써 그는 지난 날 중세시대의 인간과 사회는 우상에 물든 우상숭배적 인식 속에 갇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베이컨이 중세시대 인간성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편견의 우상들’로써 이제는 극복해 내야 할 과제로써 지적한 네 가지 우상(Four Idols)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The idols of the tribe)입니다. 이는 객관성이 결여된 자기 중심적 판단과 해석의 우상입니다. 사람이란 어떤 것을 한번 믿기 시작하면 자신의 그 믿음에 맞는 것만 받아드리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일체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종의 확증편향성 같은 것입니다. ‘지구는 평평하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 같은 생각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꽃이 나를 보고 웃는다’ ‘꾀꼬리가 봄을 노래한다’와 같은 시적 표현은 대상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한 것으로써 객관성을 결여한 주관적 해석입니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The idols of the cave)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선입견과 편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사실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고 해석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마치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와 같아서 어두운 동굴 안에서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중세의 이런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idola fori, The idols of the market place)입니다. 인간은 습관적으로 잘못된 언어와 모순된 언어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용, 여의주, 귀신같은 단어나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한 운명, 재수, 팔자 같은 말에 매여 있기도 합니다.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평화를 위한 전쟁’이니 ‘대동아 공영’이니 ‘선한 정치’니 ‘정직한 부자’ 같은 말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언어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중세시대 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비일비재한 현상입니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c, The idols of the theatre)입니다. 인간은 보통 자기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난 후 그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어떤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이컨이 살던 시대, 극장이란 이런 소문과 권위를 만들어내는 산실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이 칫솔은 참 좋은 것이다. 그것은 치과의사협회가 추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처럼 위대한 철학자가 한 말이니 믿을만하지 않은가!’ ‘그의 경제이론은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옥스포드대학의 교수이고 그가 쓴 책은 베스트 셀러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의 종이니까요!’ 중세시대나 오늘 우리 시대나 베이컨이 지적했던 이런 우상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르네상스라는 새시대를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5)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정치 철학자로써 근대 서양 정치철학의 토대를 놓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중세는 왕권신수설 위에서 ‘왕의 권세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 왕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그 누가 왕이 되던 왕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인간들은 일체 관여할 수 없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홉스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최초로 민주적 사회계약론을 주창했습니다. 1651년에 쓴 ‘리바이어던’(Leviathan)은, 제1장은 ‘인간에 관하여’ 제2장은 ‘국가에 관하여’ 제3장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하여’ 제4장은 ‘어둠의 왕국에 관하여’라는 4개의 chapter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짐승으로 잔인하고 무질서하며 무서운 동물로써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왕권을 상징합니다. 전에 우리말 성경은 용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홉스는 ‘인간이란 선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본선상 악하다’ ‘모든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이다’(Homo homni lupus) ‘인류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사이다’(The war of all against all)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인간 사회에서는 ‘법과 규칙’을 통한 ‘의무와 권리와 책임’을 확실하게 정하고 쌍방이 이 계약의 준수와 의무를 확실하게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권력자들에게는 막연하게 잘해 주겠지라는 생각이나 신뢰를 가져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본성상 악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홉스는 ‘왕권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왕권은 하느님이 하늘에서 떨어뜨려서 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합의를 통해서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권은 왕과 시민이 상호 체결한 계약’이라는 ‘사회계약론’은 바로 여기에 기초한 이론입니다.
6)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철학자요, 사상가입니다. 1580년에 쓴 그의 ‘수상록’(Les Essais)은 오늘날 우리가 ‘엣세이’(Essay)라고 하는 문학의 장르를 처음으로 개척한 것입니다. 3권 107장으로 엮어진 이 수상록은 여러 개의 길고 짧은 글로 구성된 산문집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절대로 자신의 주장을 굽힐 줄 모른다’ ‘혼자 있을 때에도 결코 부끄럽지 않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선한 태도이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다워 지는 것이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기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인생이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제일 잘 믿는다’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절대로 기쁨도 주지 않는다’ ‘수도사가 입는 의복이 순결을 가져다 주거나 수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서도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현명한 사람한테서도 배우질 않는다’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다’ ‘대부분의 불행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서 나온다’ ‘허용된 일에는 매력이 없고 금지된 일에는 욕망이 생긴다’ 이렇듯 격언, 시, 일화, 유머, 위트, 역설 등 다양한 문체를 지니고 있는 그의 글 속에서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몇 가지 가치관들을 발견해 내게 됩니다. 첫째,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포용하라는 교훈입니다. 둘째, 세상에는 내가 미처 모르는 수많은 생각, 주장, 가치관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 다양한 생각, 다양한 주장, 다양한 삶은 이 세상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화가요, 발명가요, 건축가요, 해부학자요, 천문학자로써 다양한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근대적 인간의 정형으로 평가 받습니다. 마키아벨리와 비슷한 시대, 토스카나 지방의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는 주로 밀라노와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현존하는 대표적 작품만 해도 ‘최후의 만찬’(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성당의 수도원 식당) ‘모나리자’ ‘세례자 요한’ ‘성 안나와 모자’ ‘동굴의 성모’(이상은 파리 루부르 박물관) ‘그리스도의 세례’ ‘수태고지’(이 두 작품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암굴의 성모’(런던 국립 미술관) ‘리타의 성모’(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지 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원근법이나 명암법 등 여러가지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레오나르도의 작품 세계와 그의 업적에 대한 공부와 평가는 다른 시간에 미술을 전공하신 선생님들로부터 배울 시간이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그가 르네상스에서 이룩해 낸 가장 큰 공로 가운데 하나는 그의 작품 세계는 철저하게 과학적 분석과 조명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철저하게 인체 해부학을 통하여 연구된 다음에 화폭에 담겨졌으며 건축학과 천문학 등 여러가지 과학적 연구와 함께 진행되었다는 점이 중세의 미술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지난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첫째, 오늘의 우리 자신과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우리 자신의 현재와 마주하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죽은 사람들은 아닌가? 우리에게는 지금 어떤 면에서 재생과 신생이 요구되는가? 둘째,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리라고 예측하는가? 도대체 미래가 보이는가? 백년 후, 오백년 후 우리 인류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양심과 지성, 종교와 사상,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 르네상스적 상상력이 요구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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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