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예수님의 권세
(마 9:6-8)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권세라는 말은 영어로 ‘authority’입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 해석은 power(지휘권, 권한), permission(재가, 인가), organization(당국), knowledge(권위), expert(권위자)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군중들에게 전한 천국에 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산상수훈을 마치시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왜 놀랐는가 하니, 그 동안 가르치던 서기관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한으로 천국에 가는 조건에 대하여, 그리고 천국시민으로 사는 조건에 대하여 권위에 찬 말씀으로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당시 최고의 실정법이었던 율법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말씀으로 천국에 대한 모든 것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산상수훈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전하여야 할 복음을 모두 전하셨던 것이며, 이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권세를 위임받아 이 세상에 전한 하나님의 법으로 영원히 유효한 세상을 다스리는 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세상을 통치하는 법은 예수님께서 단독적으로 제정한 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았다는 사실은 세례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이적들과,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시는 사랑의 법을 반포하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권세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예를 들자면, 호주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영주권비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 비자가 있어야 호주에서 여러 가지 복지혜택을 받으며 합법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 비자를 발급하는 것, 즉 호주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호주 정부이고, 그 호주 정부는 이민성에 그 권한을 위임하여 사람들의 비자 발급을 결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민성의 직원은 정부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호주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결정하고 허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권한을 영어로 ‘authority’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해 살고 있는 지구와 하늘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한 나라로 볼 때, 지구 전체의 일에 대하여 그리고 천국에 대한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위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다음과 같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
Then Jesus came to them and said,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그리고 또한 심판의 권세도 받으셨음을 직접 말씀적도 있으셨습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 5:27)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셨으며, 구체적으로 심판하는 권세도 가지신 분이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실 때에 다시 오실 것을 천명하심으로 심판자로 오실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땅과 하늘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할 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결정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누군가에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할 때, 구원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으신 예수님을 배제하고는 구원에 대하여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비유로 말씀드리자면, 호주 땅에 살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증명하려고 할 때, 호주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이민성에서 발급해 준 비자가 없는 한, 호주 땅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증명해 보일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받으신 권세(authority)는 천국시민권의 발급에 대한 권세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시민권을 받을 것인가 또는 정작 천국시민권을 발행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외면할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비자를 발행하는 이민성에 가서 조건을 갖추어 비자를 받을 것인가 또는 그 밖에 다른 곳, 비자를 위조하는 곳 또는 전혀 비자를 발행해 줄 수 없는 곳에 가서 비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로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우리 인생에는 바로 이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천국시민권을 발급해줄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서 줄을 설 것인가 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선지자 또는 적그리스도에게 가서 접수증을 받고 기다릴 것인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미 들은 우리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천국시민권을 받고 새 하늘 새 땅에서 살게 될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권세에 대한 비유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전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는 권세를 보여주시자, 당시 제사장들이나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의아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십니다.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만들고, 그 곳에 포도를 짤 수 있는 구유와 포도원을 지키기 위한 망대까지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관리를 맡기고 쉽게 와 볼 수 없는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어서, 종들을 그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포도원 관리를 맡았던 농부들은 주인이 올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수확한 포도를 받으러 온 종들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그들에게 주인의 뜻을 깨닫게 할 양으로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은 이 두 번째 보낸 종들에게도 먼저 보낸 종들과 같이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들에게 포도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가르치기로 작정을 하고,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설마 주인의 아들이야 공경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그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이 상속자임을 알고는 포도원을 내어주지 않을 작정으로 그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신 예수님은, “이런 포도원 농부들을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러자 모두들 “그런 악한 농부는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라고 답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선지자와 독생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악한 농부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자 이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위임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반신반의 한 것도 있었지만, 이미 악한 마음이 가득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권세를 누리는 현재의 상황을 계속 누리려는 욕심(악한마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임을 잊었던 것입니다. 마치 주인의 포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던 농부들처럼, 그 당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아 누리는 그들의 권세를 영원히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대부분의 권력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위임한 권한을 누리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이 위임받은 권한을 영원한 자기 것인 양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로부터 땅과 하늘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받으신 예수님의 통치하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일반 대중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고, 영혼 구원에 힘을 쏟아, 영혼구원이라는 수확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일에 열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아직은 그런 징조는 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계에서는 복음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18세기 대각성운동과 같은 일은 벌어지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 결과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같이 이 세상의 권력자,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진멸될 위기에 놓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 세상을 사는 성도로서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지혜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양쪽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한 쪽에 있는 강도는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 있는 강도는 그와는 달리 “네가 죄를 지어 벌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비방한 강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구원을 빕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을 봅니다,
구경꾼과 같은 죄인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줄 모르고, 앞에 놓인 구원의 길을 구경꾼과 같이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받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정죄 받지 않고 있다고 해서 구원에 대하여 아직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현재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사역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방관자의 자세로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않고 먼발치에서 구경꾼처럼 바라보고 조롱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지만 구원을 놓친 강도와 같은 사람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려 자신의 죄로 정죄함에 처해 있으면서도 예수님께 구원을 간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고난이 닥쳤을 때, 믿음이 부족하여 구원의 은혜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을 허락하실 권세가 있으신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믿음이 없어 구원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위에 두 부류의 사람들, 구경꾼과 같은 사람들과 고난 속에 있으면서도 구원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며, 구원에 대한 권세를 위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했었더라면, 또는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심각하게 들었었더라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를 사하여 주는 권세, 즉 구원의 권세를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도, 그 복음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이 죽을 지경이 아니기 때문에 안주하며,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이 닥쳐도 그 고난이 왜 닥쳤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고난 뒤에 숨겨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구하지 않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즉 성경을 멀리하여, 복음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예수님도, 하나님도 잘 알지 못하는 우매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정죄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와 같이 자신이 지은 죄로 정죄 받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 뒤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죽음의 고비에서도 간구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죄에 대하여 정죄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함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의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실제로 그랬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돌아온 둘째 아들도 그런 진리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용서와 구원의 진리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세상의 법으로는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바랄 적에,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극적인 용서와 구원의 사건들은 우리 모두에게 한없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권세를 예수님께 위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분명히 인지하여야 할 것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할 정도의 악인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은 예수님을 믿고 용서를 빌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성도의 결단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에서 깨달은 바와 같이 천국시민권을 발급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소망하여야 하겠습니다. 한없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바랄 때,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가 구원 받은 것과 같이 낙원에 우리 모두를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모두 천국에 이르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손창건 전도자(시드니가정공동체교회 시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