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제18강 르네상스가 없었어도 종교개혁이 가능했을까?
(인문학적시각에서 보는 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의 과제)
들어가는 말
기독교에서는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10월입니다. 지난 해 우리 인문학 교실에서는 ‘종교개혁 5백주년’을 기념하여 특강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생략하려고 했으나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다시 한번 더 다루려고 합니다.
첫째는 교회개혁을 보는 시각을 달리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화두를 기독교 내부의 시각에서 보지 않고 교회 밖, 즉 인문학적 안목에서 보고 재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기독교가 자기들 내부적으로 신학과 교리 등 교회 내적 요인들을 주로 언급하는 것으로 부터 떠나 인문학적 안목에서 교회개혁을 재평가하고 해석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숲도 보고 나무도 보아야’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보아야 합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운동이라는 보다 넓고 큰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종교개혁의 본질적인 성격을 보다 더 잘 이해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주 거론하는 루터나, 깔뱅이나 요한 웨슬리 같은 종교개혁의 주역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려고 합니다.
둘째는 작금의 세계교회,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교회 개혁이 더더욱 강력하게 요청된다는 생각이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인문학에 관심하는 지성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은 16세기의 교회개혁 이야기와 함께 21세기의 새로운 교회개혁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인문학적 시각에서 볼 때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실패한 개혁입니다. 하나도 개혁된 것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는 무슨 새로운 교리나 신학을 만들어내고 교직자들과 신도들의 삶을 새롭게 한 것 처럼처럼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교회 밖에서 보면 그 때의 그 개혁 이후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난친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종교개혁 이야기는 금년에도 계속 되어야 할 화두이고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으리라고 봅니다.
먼저 우리는 그동안 습관적으로 사용해 왔던 개념에서 몇 가지는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를 느낍니다.
첫째로 16세기에 있었던 ‘종교개혁’이라는 단어는 ‘교회개혁’이라는 개념으로 바꿔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이란 엄밀하게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개혁’을 의미했던 것이지 다른 종교들 까지 싸잡아서 개혁을 시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유럽 사람들은 건방지고 교만하기가 끝이 없어서 ‘종교’라고 하면 무슨 꼭 ‘기독교’ 밖에는 없고 또 다른 종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종교로 치지 않는다는 좁은 심성 때문에 이렇게 엄청난 용어인 ‘종교개혁’ 운운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이후로 우리에게 습관화 되어있고 세뇌되어 있는 ‘종교개혁’이라는 개념 대신에 ‘교회개혁’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제안합니다.
그 다음은 ‘그 개혁’이라는 영어단어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정관사 ‘The’를 붙여서 ‘The Reformation’라고 쓰고 더 나아가 대문자 R을 사용함으로 세상에는 오직 ‘그 개혁’만이 개혁이고 다른 개혁들은 마치 개혁에 끼지도 못하는 것인 양 언어를 조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6세기 그 때 거기에서 있었던 ‘Reformation’에다 ‘The’라는 정관사를 붙이고 대문자 R을 씀으로 역사에서 수도 없이 계속되고 이어져야 할 수 많은 다른 교회 개혁들을 차단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성도 생겨날 수 있다고 봅니다. 16세기의 ‘그 종교개혁’을 그 때, 그 것, 한번으로 마치 완전하게 완성된 양 정관사로 묶어두고 대문자로 지칭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써온 16세기의 ‘The Reformation’은 ‘A reformation’이라고 고쳐서 사용하기를 제안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란 종교 일반의 개혁이 아니고 기독교회라는 한 특수한 종교의 개혁이 주제이며 그것도 유일회적으로 완성된 The가 아니라 이 후에도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수많은 개혁 중에 ‘하나’이기에 reformation도 소문자로 쓰고 정관사 The도 부정관사 A로 바꿔야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16세기 교회개혁에는 복수(複數)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바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A reformation이 아니라 Some reformations라고 쓰기를 제안 합니다. 좀 긴 표현이기는 하지만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제반 교회개혁 운동들’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입니다. 최윤배교수는 그의 ‘개혁신학입문’에서 실제로 16세기 교회개혁에는 루터가 주장했던 이신칭의 같은 교리적 접근도 있었지만 츠빙글리식의 ‘훌륭한 시민 만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고 말하는 시민사회적 접근도 있었으며 마르틴 부쳐나 요한 칼빈처럼 목회적 및 교회론적 접근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른 강조점을 지닌 다양한 형태의 개혁운동들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 성격에서는 유사한 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러 지역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가지 다른 동기나 방법으로 이 운동을 추진해 나간 것이 분명하다면 이는 각자, 혹은 각국, 혹은 각기 다른 교파의 개성을 존중해야한다는 의미에서라도 복수를 사용하여 ‘종교개혁들’ reformations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개념들에 대해 이렇듯 재고를 요청하는 이유는 그 동안 기독교만을 절대적 우월성을 지닌 유일한 종교라는 믿음 속에서 지내온 서구 기독교와 그 신자들과 교직자들과 그들의 신학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에는 꼭 ‘당신들 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종교만 있고 당신들의 종교만 참되고 당신들의 사상이나 신념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않됩니다. 지구란 평평하고 배를 타고 한참 나가다 보면 낭떠러지가 있으며, 지구는 가만히 있는데 해가 지구의 둘레를 돈다고만 생각했던 그런 우주관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오늘날 21세기에도 그런 사고방식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제안을 드리면서도 오늘 강연에서는 저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사용해온 개념인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단어를 그냥 섞어서 사용하겠습니다. 아이디어는 어느 정도 새롭게 보이지만 저 자신도 아직은 이 새로운 개념들을 익숙하게 사용할 만큼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자칫 혼란을 더해드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화두
‘르네상스가 없었어도 16세기 유럽에서는 교회개혁운동이 가능했을까?’ 오늘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서 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개인적으로는 기독교라는 한 종교에 소속된 사람이고 또 그 안에서 목사로 일해 온 사람이기에 종교개혁 운동을 좀 더 크게 부각시키고 거기에 주도권을 주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보고 역사는 역사적 안목에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르네상스운동이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면 뒤이어온 종교개혁운동은 아예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 천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와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했던 르네상스라고 불리운 커다란 운동의 한 물줄기이며 한 가닥이며 하나의 부분입니다. 종교개혁이 르네상스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르네상스라는 바로 ‘그 배’를 탄 것이지 또 하나의 ‘다른 배’가 아니었습니다. 르네상스라는 숲 속에는 종교개혁이라는 나무 한 그루가 서있습니다.
이미 지난달에 살펴 본 대로 르네상스운동은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인문주의, 합리주의, 이성주의, 인간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민주주의 사상 등을 포함하여 과학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대단히 넓은 시대적 혁명 사상으로 그야말로 중세와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단절을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 he Wende/ Copernican Change, 혹은 Copernican Revolution)이었습니다. 르네상스는 미신과 신화에서 벗어나 과학과 상식으로, 불합리한 사고와 체제에서 합리적인 방향으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권위주의에서 평등주의로, 지난 시대와는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에게는 ‘희망’을 주는 사상적 혁명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중세의 봉건체제에 대한 항거였고, 농업경제에서 상업경제로,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교회에서 국가와 사회로, 거룩함에서 세속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가치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음악과 미술, 건축과 조각, 문학과 예술을 포함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이 모두 아우러졌습니다.
이 후 르네상스의 여파는 17, 18세기를 거쳐 계몽주의와 이성주의를 불러왔으며 불란서와 영국에서의 시민혁명과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까지 이어졌습니다.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물줄기 속에는 왕권신수설을 포함한 신정체제와 왕정체제, 교권주의, 금권주의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고 더 나아가 농노제도의 몰락은 물론이고 남성우월주의와 일체 비인간화를 주도해온 제도적, 사상적 변혁이 모두 포함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란 바로 이런 거대한 변화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물줄기입니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의 교리문제 때문에 생겨난 운동이었는가? 교회 안에 만연되어있던 성직자들의 부정이나 부패 같은 윤리문제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그들의 교리문제인 ‘행위로는 구원을 못 얻는다. 오직 구원은 믿음과 은총으로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得義)의 교리 싸움이나 성직자들의 부도덕한 삶과 타락에서부터 촉발된 것으로만 본다면 이는 큰 흐름에는 눈을 감고 부분을 전체로 보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구원론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논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타협과 조화, 균형과 조절로 변화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교리 논쟁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생명을 걸어야 할 진리 싸움처럼 생각되었겠지만 교회 밖에서 보면 별로 큰 의미가 못되는 싸움일 뿐입니다. 그런가하면 교회와 그 교회의 권력을 쥐고 있던 교직자들의 타락과 부패의 문제는 종교개혁을 천 번을 해도 극복해 내기 어려운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탐욕과 교만의 문제는 우리가 인간인한 풀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과제로 역사의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중세시대의 교황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독점재벌 체제로 갈아입은 종교재벌로 불리우는 초대형교회의 담임목사들과 그들의 하수인들과 각종 종교의 탈을 쓴 이단들에게서 재확인 될 뿐입니다. 더하면 더했지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은 기독교 내부의 교리 문제나 기독교회의 내부적 부패와 타락 등 그들의 윤리적 차원의 한계 속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틀과 구도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한 시대의 역사적이며 시대적인 추세요, 대세요, 커다란 물줄기에서 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루터냐, 츠빙글리냐, 깔뱅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리고, 화체설이 맞느냐, 기념설이 맞느냐, 공재설이 옳냐하는 말싸움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지만 인문학적 시각에서 보면 정말 그런 싸움질은 ‘너희 집에 거서 너희들 끼리나 싸워라’라고 하면서 돌려보내야 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수히 많은 처첩들을 두고 사생아를 낳으면서도 교황의 자리를 잘 유지해 왔던 중세 말기의 교황청 이야기나 그 시대 수도원, 수녀원, 고아원의 부끄럽고 아픈 이야기들이나, 면죄부(Indulgence)를 팔아 바티칸을 지은 이야기나, 오늘날 수십, 수백명의 천주교 사제들이 저지른 child sexual abuse 사건들이나, 초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수천억도 더되는 교회 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고도 증경 총회장 대접을 받는 것이나, 남태평양에 있는 어느 섬나라에다 땅을 사서 조성해 놓고는 주님이 거기로 재림할 것이라면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여 몸도 마음도 재물도 갈취하는 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난 날 16세기의 종교개혁이 무엇을 했던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그것입니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직업적 종교인들이나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벌리는 신학 논쟁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자기들 끼리의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이 성직자이지 그들이 무슨 ‘거룩한 ‘사람들입니까? 사실 지난날 종교개혁이란 절대로 피하여 지나갈 수 없었던 한 시대의 거대한 물줄기로써의 르네상스가 안겨준 축복이었으며, 가만히 있었다가는 더 큰 엄청난 불행을 입을 수도 있었던 역사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패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이후 입니다. 개혁되어야 할 리스트의 제일 첫 줄에 이름을 올려놓아야 할 대상들이 제일 큰 소리로 개혁을 부르짖으며 입에 거품을 물고 종교개혁 5백 주년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이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인 코메디 같은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찌해야 할까요?
르네상스운동의 핵심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르네상스운동의 핵심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르네상스란 말은 ‘재생’ ‘회복’ ‘부활’ ‘다시 살림’이라는 뜻을 지닌 불란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운동을 줄여서 말하면 이는 ‘회복 운동’이요, ‘죽은 것을 다시 살리는 운동’이요,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되찾아내는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다시 살려내고 재생시키고 회복해 내겠다는 운동이었을까요?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문예를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잊혀진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의 고전들을 다시 찾아 읽고 그 의미를 밝혀내어 신화와 미신에 가려있던 인간의 참 모습, 자연스런 본성을 되살려 내려는 것이 르네상스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체화 될 때는 고전을 읽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재생은 ‘인간 회복 운동’이라고 하겠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은 자유스런 존재’라는 명제에서 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자유스런 생각, 자유스런 삶의 태도, 자유스런 관계, 자유스런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를 이상적 인간과 인간 사회가 지녀야 할 본래의 모습이라고 보았습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사람이 사람의 모양은 지니고 있었지만 인간으로써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보고 이제 드디어 ‘인간 회복’ ‘인간성 회복’ ‘Humanization’을 해 나가자는 것이 이 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인간회복이란 구체적으로는 인간 이성의 회복이라는 것이 르네상스의 철학입니다. 고전을 회복하고 인간의 자유를 되찾아 내려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다시 살려내는 과정에 들어가야 됩니다. 신화의 껍데기들을 걷어내고 비신화하여 스토리가 아닌 스토리의 의미를 찾아내자는 것이 르네상스의 이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성을 지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비판적 시각에서 보고 다른 가능성에 대하여 상상해보며 이제 까지 주어졌던 것들에 대해 반항하고 항거하고 도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입니다.
1517년 이전의 종교개혁자들
마틴 루터라는 종교개혁자는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그에 앞서서 자신들의 생명을 개혁의 불꽃으로 지폈던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보름스에 있는 루터의 동상 앞에 서게되면 바로 그 밑에 있는 발도와 위클리프, 후쓰와 사보나롤라의 좌상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 외에도 루터보다 앞서 개혁의 씨앗을 뿌렸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euse, 1295-1366), 요한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개혁자들로써 루터의 동상 아래 함께 앉아 있는 네 사람에 대해서 만이라도 잠간 언급해 보겠습니다.
1) 페트루스 발도(Petrus Waldus, ?-1218)
프랑스 리용의 대단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발도는 수도사가 된 후 성경 말씀에 따라서 살자는 생각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빈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섬기며 또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마땅히 가난하게 살아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발도의 이 청빈한 삶의 운동이 점차 확산되어가자 교회는 그에게 설교와 가르침을 금지 시켰습니다. 발도의 주장은 아주 간단하고 분명했습니다. ‘오직 말씀대로 살자’ 그런데 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가 교회와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종교재판(Inquisition)에 회부되었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성경에 충실한 것이 그가 죽임을 당한 이유였습니다.
2)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4–1384)
영국의 리치몬드에서 태어난 그는 옥스포드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로써 라틴어로만 읽혀지던 불가타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기독교가 영국에 들어간 지 천년이나 지난 1382년 역사상 처음으로 번역된 이 영어성경은 루터의 독일어 번역(1522년)보다 무려 14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아직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번역한 위클리프 성경은 필사본으로 넓게 퍼져나갔습니다. 성경은 오직 성직자들만 소유 할 수 있었고 오직 그들만 해석 할 수 있었던 시절에 그는 모든 사람은 다 직접 자기의 성경을 가질 수 있고 또 말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이런 신학 사상은 결국 교황청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은 금서가 되었으며 모두 수거되어 불에 태워졌고 교황청은 이미 죽은 위클리프의 무덤 까지 다시 파헤쳐 그의 유해를 화형에 쳐했습니다.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오늘날 ‘종교개혁의 서광’이요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리우는 위클리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진리의 표준이라는 확신을 지녔던 사람으로써 ‘허가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처형을 받았습니다.
3) 얀 후쓰(Jan Huss, 1371–1415)
남부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 대학의 교수요 총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하고 회중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국어인 체코어로 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점차 도를 높여간 후쓰는 교황정치의 부패상을 공격하고 ‘부패한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 다음 위클리프의 사상에는 오류나 잘못이 없다면서 그를 옹호했습니다. 교황청은 그를 여러 차례 소환했지만 그는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파문이 되고 체포된 후쓰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성당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프라하 광장에서 쇠사슬에 묶여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프라하 광장에서 마지막까지 회유를 거부하다가 죽은 얀 후쓰를 만날 수 있습니다.
4)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lola, 1452-1498)
이탈리아 페라라에서 출생한 그는 도미니크 수도원을 거쳐 성 마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그 시대 가장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분명한 예언자적 설교가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주로 플로렌스에서 설교 활동을 한 그는 성직자들과 교회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교황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으며 성직을 매매하는 장사꾼이라 비난하면서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와 충돌했습니다. ‘그는 성직을 매매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가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로마의 사제들은 모두 창기와 하인과 개를 가지고 삽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아모스, 미가, 학개, 호세아, 에스겔 같은 예언서들과 요한 계시록을 가지고 설교했던 그는 마침내 이단자로 파문을 당하고 화형에 처해져 아르논 강물에 뿌려졌습니다. 당시 추기경 회의 결정문에는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또 다른 세례 요한이라고 할지라도 사형에 처한다’
종교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자들
저는 지난 달 ‘르네상스 이야기’의 말미에서 7명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을 추려서 그들의 사상과 역할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인간과 인간성을 억압해 왔던 폭력적 정치와 종교로 부터 인간의 본성을 찾아 인간을 회복시켜 보려고 노력했던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 ‘군주론’을 통하여 중세를 극복해 내려는 저항정신과 정치사상을 펼친 마키아벨리, 자신의 생명 까지도 버리면서 정치와 종교의 유착관계를 끊어버리려고 노력했던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하면서 ‘신기관’을 통하여 지난날 인간들이 지녀왔던 4가지 편견의 우상들을 타파하자고 외친 프랜시스 베이컨, 왕권신수설을 부인하고 민주적 사회계약론을 주창했던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마스 홉스, 관용과 포용, 다양성과 너그러움을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찬양했던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 그리고 과학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가운데 포함해서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루터, 츠빙글리,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인문주의자가 못되는 것도 아니고, 인문주의자라고해서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들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동시에 인문주의자들이었던 사람들을 흔히 Christian Humanist라고 부릅니다.
이 시간은 루터의 95개조 논박문이 나오기 이전에 루터를 비롯한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인문주의자들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토마스 모어는 앞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기에 중복이 됩니다만 다른 두 인물은 처음 소개하는 인문주의자들입니다.
1)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15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아주 짧게 살다간 인문주의자로써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다같이 능통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 철학과 유대교 사상을 하나로 묶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로써는 드물게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흔히 피코는 한 시대의 반항아로써 중세시대와의 단절을 부르짖으면서 자유사상가로서 기독교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불리웁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인간의 존엄’(De hominis dignitate)이 있는데 이 책은 1486년 로마에서 열렸던 ‘세계철학회의’에서 발표했던 주제 강연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Oratio de huminis dignitate)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이 모임은 피코 자신이 자비를 들여 당시 자신이 알고 있는 유럽 지역의 모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이루어진 회의였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피코의 이 연설문을 ‘르네상스 인본주의 선언서’라고 높이 평가하며 동시에 이후에 나온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Discours de la method)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과 더불어 이 연설을 초기 르네상스 사상사의 방향을 결정한 문헌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연설은 16세기 르네상스는 물론이고 그 후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그의 연설문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두 가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철학과 신학 사이를 조화시켜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보수주의적 그리스도교 신학과 진보주의적 철학 사상을 하나로 묶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지닌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자들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열린 마음과 긍정적 자세와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피코는 종교재판으로 학문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대 속에서도 편협된 진리관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진리관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정리한 ‘명제집’(Conclusiones)은 종교와 철학뿐만이 아니라 인류가 지닌 모든 지성들이 균형잡히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어떤 통일성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연설에서 기독교 신학과 다른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신학들 사이에서 평화를 모색하려고 했던 피코의 이런 자세를 ‘신학적 평화’(pax theologica)를 향한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또한 일반 철학과 기독교신학 사이에서의 긴장관계 또한 넘어서 해석의 차이를 극복해 내려는 노력을 ‘철학적 평화’(pax philosophica)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24살 밖에 않되었던 젊은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입니다.
둘째로 그의 연설문에 나타난 기본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입니다. 그는 중세시대의 일반적 인간관에 반대했습니다. 그 시대는 인간을 오직 죄인으로만 보고 인간의 타락, 범죄, 죄성, 무가치성, 상실된 존엄성에 방점을 찍으면서 ‘인간의 비참함’(miseria hominis)에다만 시각을 맞추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코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인간’(ima go Dei)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그리스도의 화육:化肉 Incarnation)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인간 예수의 구속사를 덧붙입니다. 피코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써 죄인이라고 규정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이 만드신 또 하나의 우주적 신비를 지닌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피코는 인간이란 하느님이 만드신 하나의 작은 우주(小宇宙, microcosmos)로 이해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우주 만큼의 신비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인간의 존엄성’(dignitas huminis)을 주장한 근거는 이렇듯 성서를 다시 읽고 달리 해석해 보려는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모두가 다 한 가지만 보고 그 방향으로만 달려 갈 때도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창조적인 안목입니다. 결국 이런 인문학적 사고방식과 접근 태도가 훗날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이 부분은 교황청 한국대사와 서강대학 교수를 지냈던 성염박사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학과 르네상스적 배경’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2)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에서 태어 낳지만 독일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며 저술 활동을 폭넓게 했던 기독교 인문주의자였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로 서품은 받았지만 한 번도 교구신부로는 활동을 한 적이 없었으며 짧은 기간 수도원에서 산 적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걸쳐 교회의 부정과 부패, 수도원의 잘못된 제도와 수도사들의 그릇된 생활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성직자들의 권한남용을 비판하고 교황의 권능을 부정하면서 그들의 무능과 부패를 통렬하게 꾸짖었습니다. 어학에 남다른 천재성을 지녔던 그는 옥스포드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쳤고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다시 중세 그리스어로 번역해 냈습니다. 루터가 95개조 논박문을 내기 전해인 1516년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판 신약성서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성경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성서가 전 세계의 말로 번역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누구든지, 시골의 농부들과 베짜는 아낙네들과 여행객들 까지도, 모두 자기들 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읽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이상규의 역사 이야기 33, 에라스무스2편) 오직 라틴어만이 교회의 성경이라고 여겼던 교황청에 대한 무서운 도전이었습니다.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도 교회와 교황과 성직자들의 성서 독점권에 대해 저항하면서 누구든지 직접 하느님의 말씀에 접근해야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 해석 할 수 있는 권한도 지니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모르고, 모르는 사람은 이해 할 수가 없기에, 그 뜻을 풀 수도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로써 불후의 명작 ‘우신예찬’(Stultitae Laus, 영어로는 In Praise of Folly)을 썼습니다. 당대의 친구 토마스 모어를 찾아 영국을 방문 중에 모어의 집에서 집필한 이 책은 풍자와 위트와 유머의 형식으로 쓰여 진 책입니다. 인간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어리석음, 특별히 교회와 성직자들의 바보 같은 짓거리들을 비꼬면서 ‘바보들은 그들의 바보됨을 행복한 것’이라고 여긴다고 비꼽니다. 그는 여기에서 오히려 공부 많이 한 사람들과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어리석게 보이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분별력이 있고 인생의 예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왕후귀족이나 학자와 성직자들 보다는 훨씬 더 나은 인생을 산다고 하면서 자신이 지닌 물질과 지식과 종교적 권한과 신앙심이 자기를 행복하게 한다고 여기는 그 시대의 현자들이야 말로 ‘진짜 바보들’이라고 조롱합니다. ‘하찮은 일을 가지고 심각한 일인 것 처럼 다루는 자들 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은 없다’(Ut enim nihil nugacius quam seria nugatorie trctare).
3)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
잉글랜드의 법률가요, 정치가이며, 사상가였던 그는 대법관 까지 지낸 고위 공직자였으며 귀족이었으나 헨리 8세와의 신앙적 및 신학적 충돌과 대립으로 끝내 반역죄로 몰려 참수형을 당한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초기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윌리암 틴데일의 성경 번역과 보급을 정죄하면서 그를 ‘모든 이단들의 우두머리’라고까지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수적이며 스콜라철학에 깊이 침잠된 가톨릭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하원 의원과 의장을 지냈고 외교관, 장관, 대법관을 고루 섭렵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터졌습니다. 모어는 아서왕이 죽은 후 동생 헨리 8세가 왕위를 계승한 다음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내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려고하자 이를 반대했습니다. 모어는 만약 헨리가 재혼을 하려면 반드시 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재혼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이 이혼과 재혼 문제가 불씨가 되어 마침내 헨리 8세는 ‘잉글래드의 국왕은 잉글랜드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선언하고 잉글랜드 교회, 곧 앵글리칸 쳐치(Anglican Church)를 만들게 됩니다.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토마스 모어는 도저히 이를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고위 공직자인 그는 끝내 새로운 왕비로 등극하는 앤 볼린의 대관식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그 후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그는 1535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런던 타워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토마스 모어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는 왕의 신하이기 전에 하나님의 종입니다’ ‘세속적 지도자는 결코 영적 지도자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참수를 당하기 직전 자기 수염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수염이야 무슨 반역죄를 지었겠소? 그러니 정확하게 목만 쳐 주시오’라고 형 집행관에게 말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토마스 모어의 대표작으로는 ‘유토피아’(Utopia)가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친구 에라스무스와 그가 쓴 ‘우신예찬’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일체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적 공상 세계를 그렸습니다. ‘Utopia’–‘이 세상 그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꿈의 나라’를 그려 본 것입니다. 그는 자연법 사상을 추구했고 자연적 명령에 따라 자연적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가장 아름답고 평등하고 자유스런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도 토마스 모어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Renaissance Humanist)로 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어떠한 정치적 압력이나 종교적 권위에도 부당하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 죽음이 온다고 하더라도 의롭게 죽는 자세가 훗날 역사에 끼친 영향이 참으로 크다는 점 때문이고, 둘째는 이상적 인류 공동체란 반드시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는 식의 종교적 교훈을 거부하고 이 세상 그 어디에선가 우리 인간들이 능히 만들 수 있고 또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실현 가능한 세계라고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교훈
이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살펴본 16세기 종교개혁에 앞선 인문주의자들과 시간상 넉넉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인문학적 종교개혁자들이라고 부를수 있는 츠윙글리나 붓쳐 등등의 사람들이 그후 이어진 시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남긴 교훈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봅니다. 이들의 사상이 교회를 포함한 종교와 사상, 철학과 역사, 정치와 경제 등등 우리 앞에 놓여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개혁적 사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끊임없는 저항정신, 곧 protestant 정신입니다. protestantism입니다. 실제로 종교개혁 후에 나타난 교회들은 루터교회니, 개혁교회(장로교회)니, 감리교회니, 메노나이트니, 아나뱁티스트니 등등 여러가지로 불리웁니다만 통일된 개념으로는 ‘개혁교회’ ‘개신교회’ 즉 Protestant Church입니다. 이는 저항하는 교회, 항의하고, 데모하면서, No라고 부르짖는 교회입니다. 반대하고 항의하지 않는 교회는 개신교회도 아니고 개혁교회도 아닙니다. Reformed Church, Protestant Church가 아닙니다. 개신교회는 날마다 개신되어야하고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교회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학문세계를 포함한 모든 정신 세계와 현실 세계에 다 해당됩니다. 철학, 문학, 예술, 교육, 심리학은 물론이고 물리학이나 수학 등 일체의 자연과학적 이론과 의학, 농학, 경제학, 정치학 등 모든 응용과학 전반에 걸쳐 No라고 부르짖으면서 부정과 의심, 항거와 반대를 하는 것은 그들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뉴톤과 대립함으로 아인슈타인이 나오고 아인슈타인과 대립함으로 스티븐 호킹이 나옵니다. 고전 경제학이나 플라톤의 정치학 이론들은 오래전에 이미 넘어섰고, 의학도, 교육학도, 심리학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제일 변하지 않고 제일 느리게 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판정신이 없이는 아무 것도 발전하지 못합니다. 비판정신은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비판정신은 지성의 상징입니다. 모든 비판정신의 저변에는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과 반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관용과 너그러움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맞는 것입니다’ 교파주의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꼭 똑같아야만 마음이 놓이고 안정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전체주의적 사고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것을 아름답게 보고 다른 것들 때문에 풍성하고 넉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꽃들과 나무와 짐승들, 또 제 각기 다른 얼굴색과 언어와 지방과 문화와 전통들이 있는 것 처럼, 정치도 경제도, 종교와 종파도 다 나름대로 반드시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전체주의나 공산체제 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군인들이 줄맞추어 행진을 하거나 김일성광장에 나와서 통일된 카드섹션을 하는 것을 아름답게 보아서는 않됩니다. 통일성 보다는 다양성이 아름답습니다. 관용과 너그러움과 똘레랑스에는 균형과 조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성과 영성, 이성과 감성, 종교와 과학, 거룩성과 세속성의 조화가 따라옵니다.
셋째는 평등주의입니다. 르네상스와 16세기 교회개혁은 일체의 차별과 구분을 넘어서자는 생각을 바탕으로하고 있습니다. 왕과 백성, 영주와 농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남자와 여자, 지식인과 무식한 사람, 성직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던 모든 제도적, 사회적, 종교적 불의를 청산하려는 의도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길게 이야기를 하려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우리 교계는 여전히 만인 사제설을 이야기 하면서도 목사들의 강단 독점권이 강화되고 있으며 목사들은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어느 날에나 신부가 되고 목사와 장로와 총회장이 될 수 있을지 요원하기 그지 없습니다. 한국사회와 교회는 아직 중세시대가 한창입니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은 꿈도 못 꾸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르네상스와 지난날의 종교개혁에서 돈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모든 정신적이고 영적인 개혁이란 결국 자기반성이고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들을 벗어 던지고 포기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해 져야하고 부와는 거리를 두어야만 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교회만이 존경을 받습니다. 스스로 무력해지고 가난해지지 아니하면 절대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깨우쳐야 합니다. 정교유착, 금권과 교회의 유착, 이 두 가지를 끊어내는 것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기본정신입니다.
부록
오늘의 종교개혁을 중심한 ‘이야기나누기’(sharing)를 위해 참고로 다음 몇 가지 읽을거리를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1) 한국에서의 ‘국가조찬기도회’ – CCC회장으로 있던 김준곤 목사에 의해 1966년부터 시작된 이 기도회는 처음 ‘대통령 조찬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으나 1976년부터는 ‘국가 조찬 기도회’로 명칭을 바꿔서 실시해 왔습니다. 금년 3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의 참석하에 세월호 사태를 그렇게도 조롱하고 박근혜를 그렇게도 칭송해왔던 소강석 목사가 설교한 이 행사는 금년이 특히 그 기도회 50주년이라 하여 5천명 이상이 참석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일산 킨텍스에서 열렸습니다. 이 행사는 겉으로 나타난 것처럼 교회가 국가와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하며, 정치지도자들이 정의로운 길로 가도록 가르치고 지도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치인 박정희 대통령은 종교인들로부터는 국가주의적 충성서약을 받고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아내는 상호 이익을 교환하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문재인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그 어느 대통령도 이 행사를 거부하지 않고 이를 적당한 선에서 피차 이용해 왔습니다. 특히 금년에는 청와대 게시판에 이 기도회를 폐지해 달라는 청원이 빗발이 쳤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지난 날 이 행사의 역대 설교자들은 대통령들이 잘못하는 일들을 꾸짖는 예언자적 설교를 한 사람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시대의 대통령이 독재자이던 부패한 사람이던 상관없이 권력에 아부하는 달콤한 설교와 함께 그들을 축복하고 칭찬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빌어주었습니다.
김준곤은 박정희의 유신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회라고 설교했고, 정진경은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시대 전두환 대통령에게 중책을 맡기시어 모든 구악을 제거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역대 설교자들의 이름을 보십시요. 김준곤, 김장환, 조용기, 한경직, 강신명, 김창인, 정진경, 김지길, 조향록, 김삼환, 김선도, 이동원, 이영훈, 피종진, 길자연, 홍재철, 최건호, 박종화, 이용규, 전병금, 손인웅, 오정현, 김진홍, 문만필(당시 보안사군목), 정성진, 그리고 소강석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에서 ‘내로라’하는 목사들이 2번 3번 돌아가면서 대통령 앞에서 소위 설교와 기도와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아부를 해 왔습니다. 한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2)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공덕교회는 요즘도 자동차로는 들어가기가 참 힘든 좁은 골목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 이 교회를 설립한 최윤관 목사님은 이승만 대통령과는 참 친숙한 사이였습니다. 당시 경무대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늘 최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정부 고위층들과도 허물이 없이 지내며 외국에서 사절이 오면 통역도 자주해 주었습니다. 입각교섭도 여러 번이나 받았지만 목사님은 늘 ‘나는 목회자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습니다. 권력과 지근거리에 있었지만 권력을 넘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시무하는 교회 입구 손 좀 봐달라’고 할 만했는데도 그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좁은 골목 안에 있는 그 교회가 소중한 교회사적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권력과 유착되지 않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남의 황금 같은 땅인 정부와 시민들의 공유지를 권력으로 나누어가진 ‘사랑의 교회’ 이야기와 대비되곤 합니다(강석찬 목사님의 ‘이런 저런 생각’ – ‘신학적 어용’에서).
3) 영남 지역에서 존경 받아오신 고 김삼수 목사님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초등학교 동기요,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교회도 다니고 친하게 놀던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청와대에 가서 이런 저런 옛날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대통령이 물었습니다. ‘삼수 형은 요즘 무슨 일로 바쁘신가?’ 김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요즘 새로 예배당을 짖느라고 바쁘고 힘이든다’고 말하자 박대통령이 얼른 말했습니다. ‘거긴 우리 고향이니 예배당은 내가 지어주지!’ 그러자 김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배당은 그렇게 짖는 것이 아니네. 교인들이 정성으로 지어야 하는 것이네’ 대통령의 선심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강 목사님의 위의 글에서).
4)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 어느 정치 집회에서 ‘예수님은 내 형님’이라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호남의 대표적 교회 지도자였던 광주 양림교회 은명기 목사님이 이 말을 듣고는 김대중 선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보시오. 김선생,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말을 그리 함부로 하면 않되지요! 당장 취소하시요. 공개 사과하시요. 그렇지 않으면 상종도 않하겠소!’ 은 목사님은 김대중 선생과는 참 친하고 허물이 없는 사이였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지도자의 공적인 잘못을 그냥 덮어주지는 않았습니다(강 목사님의 위의 글).
5) 서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는 2년 전 그 교회에서 은퇴를 했으나 지금까지 후임 담임 목사를 정하지 않은채 설교를 계속해 오다가 얼마 전 자기의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명성교회를 세습해 주는 결정을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절차적 과정은 모두 정당하게 마쳤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담임 목사가 그의 아들이나 사위나 딸 등 가족들에게는 세습을 할 수 없다’고 세습을 금지한 총회의 결정을 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 목사는 ‘나는 2년 전에 은퇴한 사람으로서 현재는 담임목사가 아니다. 이 조항은 나에게는 해당이 않된다. 이것은 담임목사의 세습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목사를 절차에 따라 청빙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총회 재판국에서는 논의를 하다가 8:7로 명성교회는 세습이 아니고 적법하게 처리를 했다고 판결을 하며 김삼환 목사의 편을 들어주었는데, 마침 지난 9월 10일에 열린 대한예수교 장로회 정기 총회는 재판국의 해석이 잘못 되었고 명성교회는 총회의 헌법을 어겼다고 판정을 했습니다. 김삼환 목사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이고 그 법정신에 따라서 보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세습입니다. 이 교단의 총회장까지 역임한 김삼환 목사는 그 총회의 헌법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총회의 결정이 있었던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서 김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내가 이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것은 십자가를 물려주는 것이지요…고난을 물려주는 것이지요.. 총회는 타락했어요… 지금 마귀는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어요… 이는 우리 아들만 죽이는 게 아니예요…우리 교회, 우리 장로님들 다 없애 버리려는 마귀의 장난이예요’ 하면서 10번 이상이나 총회와 총대들을 향하여 마귀들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여기에서 저는 시골이나 도시 빈민촌에 있는 작은 교회의 목사님이 진정 자기 자식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그 작은 교회를 세습해 준다면 그건 세습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정 우리 시대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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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