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수천 년 후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흙 프로젝트’
지속 가능한 대안적 건축으로 성큼 다가오다!
반세기 남짓 된 한국의 현대 문명 속에서, 그동안 우리 삶의 터전을 일구는 재료로 첫손에 꼽은 건 단연 ‘쎄멘공구리’, 곧 시멘트 콘크리트였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빚어 지은 집은 서둘러 개량해야 할 ‘전근대의 유물’이고, 양회를 개어 골재를 섞고 네모반듯하게 세운 집은 너도나도 배워야 할 ‘문명의 선물’이었다. 이렇게 ‘양회의 시대’는 몇 십 년간 이어져왔고, 오늘 우리 곁에 남은 건 회색으로 점철된 쎄멘공구리의 그늘뿐이다. 아스팔트와 인공조명이 장악한 도시의 가로는 물론, 선명한 녹음으로 지친 눈을 쉬게 하는 농촌의 풍경 속에서도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은 자연의 일부인 양 곳곳에 박혀 있다.
‘쎄멘공구리’의 그늘을 밝히는 지속 가능한 힘, 흙
시멘트 콘크리트에 대한 ‘굳세 믿음’의 배경에는, 다름 아닌 신속함과 튼튼함 그리고 편리함이라는 가치에 대한 맹신이 있었다. 전후의 폐허에서 서둘러 헤어 나와 생존의 터전을 복구해야 한다는 게 반세기 전의 시대적 요구. 시멘트 콘크리트는 실제로 이에 크게 부응했다. 그 덕에 우리 사회는 반세기 동안 신나게 발전해왔다. 그리고 오늘, 현대 초기의 낡은 껍질을 벗고 새 살을 얻으려는 우리 앞에 놓인 건 처치 곤란한 산업폐기물의 산이다. 시멘트 콘크리트 문명의 치명적인 부산물을 목격한 이상, 그 폐해를 반복할 수는 없다. 우리의 미래 도시, 무슨 재료로 어떻게 지어야 할까? 그 답은 흙이 알고 있다.
흙, 알고 보니 시멘트 못지않은 힘을 가졌다. 신속함과 튼튼함과 편리함, 모두 흙으로 실현 가능한 가치들이다. 그것이 지닌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특징들을 잘 알고 응용한다면, 시멘트를 대체할 미래형 건축 재료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그저 ‘대체’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시멘트처럼 인체와 환경에 유해한 성분을 지니지도 않았고, 건축 재료로서 소임을 다한 뒤에는 다시 흙의 원재료 상태로 돌아갈 수 있어 자원 고갈에 대한 걱정을 덜어준다. 이른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천할 모범적인 재료인 셈이다. 서적 ‘건축, 흙에 매혹되다’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대안적 건축 모델로서 흙건축의 숨은 면모를 역사와 지리적 탐구를 통해 속속들이 파헤치고, 최신의 연구 성과를 한눈에 들어오도록 풍부한 사진과 함께 제시한다.
‘사막의 맨해튼’이 보여주는 놀라운 흙건축의 역사
‘흙건축’이라고 하면 귀농이나 다운시프트 등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의 생활만을 떠올리기 쉽다. 삶의 터전을 시골로 옮겨 초가삼간 짓고 푸성귀 키우며 사는 삶, 그 고즈넉한 풍경 속 집의 이미지다. ‘흙건축=농촌 주거’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듯하다. 하지만 흙건축의 체급은 그렇게 빈약하지 않다. 인류 역사와 어깨동무할 정도로 슈퍼 헤비급에 가까운 건축 방법이다. 소박한 서민의 주택부터 영주의 저택까지, 산악의 작은 취락부터 찬란한 고대 문명의 도시까지, 그리고 중국의 만리장성과 서양 각지에 산재한 크고 작은 성채까지. 흙은 인간 사회의 형성 이래 모든 종류의 건축물 시공에 적극적으로 활용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인류 공통의 건축 재료였다.
세계 각지에는 전통 방식으로 지은 유구한 역사의 흙건축물이 산재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예멘의 고도(古都) 시밤(Shibam)에는 500년 넘게 사용되고 있는 ‘흙빌딩’이 즐비하다. ‘사막의 맨해튼’이라는 별명답게, 이곳에는 높이 30미터에 달하는 흙건축물 500여 동이 다닥다닥 붙어 늘어서 있다. 8-9층 규모에 해당하는 ‘빌딩’을 흙으로만 지었다니, 500년 전 기술의 놀라움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한편 저 유명한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은 최고 높이 45미터에 달하는 건물을 흙으로 지었고, 역시 스페인에 있는 바뇨스 성은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공격을 견디고 굳건히 서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황량한 건조 지대 구간마다 흙으로 성곽을 축조한 사실이 있다. 모두 합해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구간의 장성 곳곳이 여전히 남아 그 단단함을 대변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각 대륙 곳곳에 산재한 피라미드들도 흙건축의 강인한 면모를 보여준다.
현대 건축이 소환한 전통 흙건축의 지혜
이 같은 흙건축 문화유산들은 천년의 세월을 견딜 만큼 튼튼함을 과시하지만, 일상의 터전으로서 흙건축의 뛰어난 면모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각 지역의 기후 환경과 그로 인한 토양의 특성에 최적화하여 다양한 시공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리비아의 고도 가다메스(Ghadames)에는 흙으로 지은 주거시설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형성되어 있다. 넓지 않은 오아시스에서 집이 들어서는 면적을 최소화해 경작지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고, 서로 들러붙은 집이 자연스레 요새의 기능을 하여 적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며, 외부에 노출되는 벽면을 줄여 뜨거운 직사광선의 영향을 최소화함으로써 실내를 쾌적하게 유지하기 위함이다. 생존을 위한 궁리가 낳은 빛나는 지혜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밀집형 주거지의 모델은 이미 기원전 7000년에 형성된 바 있다. 터키의 고대유적 사탈 후유크가 그곳이다. 밀도 높고 방어적인 건축 계획으로 도시의 효율을 극대화한, 고대인의 지혜가 빛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이처럼 자연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여 효율을 극대화한 흙건축의 전통은 오늘의 건축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는 건축가 릭 조이(Rick Joy)가 현대적으로 해석한 흙건축을 연달아 선보이고 있다. 미관상 주변 환경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룸은 물론, 흙에서 얻는 열에너지적 이점을 적극 활용해 자연스레 실내의 쾌적함을 배가한다. 독일의 마르틴 라우흐, 칠레의 마르셀로 코르테스, 인도의 사프렘 마이니 등은 철학, 공학,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며 흙건축의 한계를 실험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건축가 고(故) 신근식은 건축가와 엔지니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보이며 흙건축 마스터를 꿈꾸었다. 한국 현대 건축계에 흙의 가치를 환기한 건축가 고(故) 정기용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재료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새로운 장비 개발을 통해 흙다짐 공법의 구조적 정확성을 높였다.
서적 ‘건축, 흙에 매혹되다’는 흙의 물리-화학적 특성을 면밀히 분석함과 아울러, 그 특성들을 극대화해 흙을 대안적 건축 재료로 격상시켜줄 신기술에 대해서도 꼼꼼히 살핀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 우리는 모래성의 물리적 특성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흙의 다양한 특성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흙을 현대적인 건축 재료로 활용할 방안을 강구해냈다.
경이로운 인류의 전통을 복원하는 최첨단의 진보
시멘트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얼마나 될까?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만 따져도 전 세계 총 배출량의 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흙건축의 현대적 실천은,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첫걸음이자 적극적인 진보의 한 방법일 수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의 실천을 위해서는 건축계의 대대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최선의 선택지는 바로 흙을 활용한 건축이다. 아울러 흙건축은 이미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거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그 지역에서 채취한 흙을 활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단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낳은 결과다. ‘만인을 위한 주거’라 부를 만하다. 또한 흙건축은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상실한 지역 문화와 지역 생산 시스템을 복원하는 효과적인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다.
격변하는 시대가 앗아간 흙건축. 그 경이로운 인류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일은,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중요한 숙제다.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 재료로 건물을 짓고, 자연에 해를 주지 않으면서 사용하다가, 용도를 다하면 다시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궁극의 자연 친화적 대안, 바로 흙건축이다.
에듀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