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나훔서개관 –영적 각성의 후진 기아를 넣고 있지 않는가?
나훔서는 오바댜서와 함께 이방나라에 대한 신탁을 선언한 두명의 선지자중의 한 명이다. 요나도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지만 요나서의 내용은 신탁이라기 보다는 요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훔은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선지자이다. 나훔은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긴 시적 표현으로 선포하였다.
나훔은 스바냐와 젊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요나의 사역으로 잠시 연기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 선지자로 그가 엘고스 사람인 것과 그의 이름의 뜻이 위로라는 것 외에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나훔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앗시리아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주전 8세기후반과 7세기 초엽은 앗시리아가 주도권을 쥐고 팽창하던 시기였다. 디글랏 빌레셋3세(B.C745~727), 살만에셀5세(B.C726~722), 사르곤2세(B.C721~705), 산헤립(B.C704~681), 에살핫돈 (B.C680~669)등 능력 있는 왕들로 인해 제국의 지배력이 확대되고, 드디어 앗수르바니팔 (B.C668~627)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그는 이집트의 고대 수도인 테베(3:8의 노아몬)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드높힌다. 그러나 B.C652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에살핫돈이 자신의 사후에 발생할 후손들 사이의 잠재적 갈등을 해결할 계책으로 한 아들 앗수르 바니팔에게는 앗시리아의 왕좌를 주고, 다른 아들인 샤마쉬-슘-우킨에게는 정치적 속국인 바벨로니아의 권좌를 차지하도록 지시했다. 그후 10년 후인 B.C652년에 샤마쉬-슘-우킨이 갈대아인들을 이끌어 자기 형제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앗수르 바니팔이 승리했지만 대가는 컷다. 앗시리아의 힘은 기울고 멸망을 향한 긴 걸음을 시작한다. B.C627년 앗수르 바니팔의 죽음과 함께 앗시리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북이란의 메데족이 서쪽으로 진군한 것이다. 또한 B.C626년에 나보폴라살이 바벨론의 왕이 되고 메데인과 함께 앗시리아 정복을 위한 동맹을 해서 B.C612년, 3개월 반만의 포위 끝에 함락하고 세계최초의 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들이 유다와의 관계가 어떠했는가? 앗시리아 사람들은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B.C701년에는 히스기야왕의 남유다를 침공하는 등(산혜립) 유다의 생존자체를 위협했다. 또한 므낫세왕(B.C687~642)때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왕을 사슬로 묶어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대하33:10-12). 그 후에도 유다에 대한 지속적인 박해를 가했다.
저자 나훔은 이러한 앗시리아의 발흥과 쇠퇴기를 바라보면서 이 책을 기록했는데 B.C663년 앗시리아의 앗수르 바니팔에 의해 북부이집트의 도시인 테베(3:8의 노아몬)의 멸망을 알고 있으나, 앗시리아의 멸망(B.C612)을 모르고 있어서 B.C663년부터 612년 사이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던 당시의 이스라엘에게는 두 가지 신학적 문제가 제기 되었다. 첫째는 힘 자체에 관한 문제였다. 왜 하나님은 마음대로 날 뛰는 외국의 왕(앗시리아의 왕)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는가? 둘째는 선의 문제였다. 앗시리아는 유다보다 나은 모습이 없다. 그렇다면 유다에 대한 앗시리아의 지배를 하나님의 정의롭고 올바른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는가? 악한 앗시라아가 세계를 지배하는 때도 하나님의 힘과 선하심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것이 당대 이스라엘의 신학적 고민이었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위해 앗시리아를 잠시 사용하셨으나, 앗시리아의 잔인성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힘을 잘못 사용한 만큼 합당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들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악한 세력의 화신인 앗시리아를 보응하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선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앗시리아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어떤 상황속에 있었길래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징벌하시며 정의를 실현해야 했는가? 첫째, 그들은 매우 잔인했다. 그래서 성경은 니느웨를 가리켜 “피의 성”이라고 부른다(3:1). 그들은 반역한 민족을 가차없이 처단하고 박해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반역의 지도자들에게는 가혹하게 고문하고 사지를 절단한 후에야 처형했다. 정복한 민족을 송두리째 뽑아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정복한 곳에서 사람의 머리를 피라미드처럼 쌓았다. 인간 생명의 존귀함을 파괴하는 이 같은 잔악한 행위에 대해 묵과하지 않으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다. 둘째, 앗시리아는 교만했다. 느웨성은 교만함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성벽의 높이가 30m였고, 그 성벽위로 6대의 마차가 달릴 수 있는 길이 나있을 정도였다. 또한 그 성벽은 18m 깊이의 연못에 둘러 쌓여서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였다. 그 속에서 교만함 속에 안전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성을 무너뜨릴 세력(메데, 바벨론, 스키타이)을 보내심으로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앗시리아에 대한 다가오는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나훔서에서는 마치 과거에 발생한 일을 기술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다. 특히 2:3-7과 3:1-7을 보면 니느웨의 멸망은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묵도하거나 그 사실에 대해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선지자들은 종종 미래에 대한 사건을 과거에 일어난 사건처럼 묘사하는데 이것을 “예언적 완료”라고 부른다. 즉, 니느웨의 함락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그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 때문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기록한다. 먼저 정치적 사건에 대한 예리한 관찰도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니느웨의 함락을 내다보았고, 계시를 통해 예견하였다. 성도는 시대를 예리하게 분별할 줄 아는 통찰력과 함께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깨어있어야 함을 증명한다.
결국 나훔을 통한 경고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만함과 잔악함의 상징인 앗시리아를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하셨다(2:13). 그렇다면 나훔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계만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운명뿐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와 세력, 그리고 인간들에 대해 섭리하신다. 세상을 창조하고 명령하는 자연신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속에 깊이 개입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자기 백성의 삶을 치유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심판하신다. 나훔서에 나타나는 앗시리아는 단순히 지금부터 2,600~2,700년전의 고대근동의 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열방을 대표한다. 나훔은 고대 근동지방을 약250년 동안 지배하던 세상세썰물처럼 사라지는 운명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모든 민족과 인류에 대해 간섭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강해 보이던 앗시리아는 순식간에 약한자의 모습으로 판명되고 만다. 세상권세란 이런 것이다. 앗시리아가 이웃나라를 침공하는 위세는 그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는 세력처럼 보였으나, 그 교만함과 잔악함에 대해 손대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사라지는 안개와 같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전혀 바뀔 것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는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이 현명하고도 진솔한 믿음의 태도가 된다. 독자들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있는가?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억압적인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길은 우리를 향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 속에서 우리 삶의 새로운 여명은 밝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한 때 체험했던 위대한 부흥이라도 우리를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나훔시대보다 약100여년 전에 니느웨땅에 일었었던 부흥각성 운동을 기억한다. 어린아이12만 명을 포함해서 적어도 30만 명 이상과 짐승까지도 회개에 동참하는 전대미문의 영적각성 운동이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난 나훔시대의 니느웨는 어떠한가? 당대에 있어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가장 잔인한 행동을 보이고, 하나님께 교만을 보임으로서 영적각성에 후진 기아를 넣고 있지 않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나님 말씀앞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서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헛된 욕망의 찌꺼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추한 욕심의 발로 대호 행한 결과 신앙의 길에서 역행하고 만 것이다. 말씀의 진리가 주는 대로 감미로운 순종에서 나타나는 형제 우애적 공동체의 확립이 아니라, 힘의 진리를 신봉하고, 결국 그 힘의 논리가 그들의 삶을 왜곡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질주하게 한 것이 아닌가?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올바른 신앙과 삶인지에 대해 뒤죽박죽 된 세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도 정의와 올바른 삶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선포보다는 세속적 축복을 헤프게 남발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이런 가짜 복음에 스스로를 마취시켜간다면 우리 역시 니느웨의 길에 들어섰다고 경적을 울려도 지나친 일이 아닐 것이다. 한반도에 복음이 전파된 지 100여 년이 지났다. 이제 전국에 5만 교회이상이 있다. 그런데 왜 한국사회는 돈과 명예와 쾌락의 성을 점점 더 높이 쌓고 있는가? 그 속에 사는 우리는(시드니를 포함해서) 하나님을 진정한 주권자로 모시고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지 돌아볼 시기이다. 우리가 정의(아모스), 사랑(호세아), 하나님과의 감미로운 동행(이사야)을 통해서 초점잡힌 삶을 사는지, 아니면 요나가 복음을 외친지 100여 년이 지난 후 오히려 더욱 교만의 성을 높이 쌓고, 굳은 마음으로 살아간 앗시리아의 모습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앗시리아에 회개의 복음을 전파한 요나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앗시리아 제국의 모습이, 말씀으로 인해 숙성된 신앙인격이 아니라 세속적 부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함으로 인해 쓴 열매를 먹게 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제 우리를 돌아볼 차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말씀 속에서 신앙인격이 숙성되어서 시대의 진정한 빛을 주고 있는가? 니느웨는 요나가 복음을 전한 이후 100여 년이 되었을 때 실족했다. 한국교회도 100여 년이 되었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성숙한 신앙공동체를 견고히 세우고 있는지, 아니면 요나 이후 100여 년 지난 앗시리아처럼 세속적 부를 추구하면서도 헛된 안전의식 속에서 성을 높이 쌓으며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단절의 위태로운 경계선에서 서 있지 않는지! 우리 역시 영적각성의 후진 기아를 넣고 있지 않는지? 이것이 나훔서가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호소가 아닐까?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