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스바냐서 개관 – 여호와의 날과 남은자의 구원
스바냐는 구약에서 상세한 족보와 함께 소개된 유일한 선지자이다(1:1). 그의 족보는 히스기야란 이름을 가진 4대 조상까지 올라가는데 아마 왕이었기 때문에 장황하게 소개하였을 것이다. 즉, 그의 4대 조상은 히스기야왕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 연유로 인해서 궁정에 들어가서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밀착해서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요시야왕 시대(B.C640~609)에 활동했기 때문에(1:1) 예레미야, 나훔, 하박국 선지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추정된다.
스바냐의 사역시기는 요시야의 개혁(B.C622) 직전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본문속에서 아직 우상숭배와 혼합종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바냐의 가르침이 젊은 요시야왕(28세)의 개혁계획을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조하는 일을 격려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한후, 남유다는 앗시리아의 위성국으로 조공을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런데 주전 701년 히스기야왕이 반앗시리아 동맹에 가입한 이유로 앗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을 받는다. 그때 하나님의 개입으로 위기에서 벗어난후(왕하20장) 산헤립은 시라아팔레스틴을 재차 침공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 성전과 성전제의가 유지되고 다윗의 가문은 여전히 유다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그 후 지속적으로 반 앗시리아 정책으로 독립투쟁을하던 히스기야가 죽고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른다.히스기야에 이어 왕이된 므낫세는 반란을 포기하고 앗시리아와 화친한 후에 정기적을 조공을 바침으로 55년간의 왕위를 유지한다.(왕하21장) 그는 재위기간 중 앗시리아에서 전파된 이교도의 종교의식을 중심으로 우상숭배를 적극적으로 용호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단지 2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친앗시리아 정책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추정되는 궁정사람들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그 반역을 진압한 무리들이 요시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런 상황속에서 스바냐는 왕하 22-23장 사건의 배경인 B.C630년 경에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국제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150년간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던 앗시리아는 무너지고 있었고(B.C612년, 즉 요시야시대에 무너짐) 이집트는 팔레스틴의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요시야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때 이미 멸망했으나 잔존세력으로 남아있던 앗시리아를 도와 바벨론을 견제하려고 북상하는 이집트의 바로느고를 막기 위해 므깃도로 갔다가 전사한다. 그야말로 역사의 격변의 시기였다.
그래서 스바냐가 활동한 요시야시대는 100년 이상 유다의 대적으로 서있던 앗시리아의 몰락이라는 국제 정세를 맞이하게 된다. 그 시대사람들은 이것을 희망의 첫 징조로 보면서 신중한 낙관론이 팽배한다. 그러나 스바냐는 당시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드러냈다. 유다가 국제정세의 호전(앗시리아의 쇠락과 패망)에 의해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빠지고 있다는 충격적 주장이다(1:15). 왜인가? 국제정세는 호전되는 것 같지만 유다는 진정 중요한 것을 잃고 점점 암흑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공포한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시대상황> 요시야가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8세) 그 나라는 전임자인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의 특징이었던 우상숭배와 불의와 타락한 관습이 여전히 팽배했었다. 진정한 믿음이 결여된 신앙은 이방종교와 혼합되었고(사실상의 우상숭배), 백성들은 므낫세 시대에 횡행한 잔악한 행위와 유약한 정치적 위치등으로 인해 도덕성을 상실해갔다. 특히 예루살렘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네 집단(방백,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은 사회를 보존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신들의 역할을 포기하였고(3:1-7), 일반백성들은 자신들의 삶과 하나님을 단절하는 실질적인 무신론자가 되었다(1:12). 이런 므낫세아몬시대의 영적도덕적 타락 이후에 요시야가 추진한 개혁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스바냐였다.
<전체구조>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심판(1:2-3:8)과, 남은자의 정화와 회복(3:9-3:20)이다.
다시말해 심판이 주제인 여호와의 날과 은혜와 자비의 주재인 남은자의 회복이 중심주제이다. 먼저,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을 통한 심판을 선포한다. 스바냐서의 전반부에는 여호와의 날이란 말이 많이 등장한다 『여호와의 날』(1:7,9), 『여호와의 희생의 날』(1:8), 『그날』(1:9,10; 3:1,16), 『그때』(1:12;3:19), 『여호와의 큰 날』(1:14), 『여호와의 분노의 날』(1:18), 『분노의 날』(1:15;2:2,3)
이 여호와의 날이란 개념은 선지서에 자주 나오는 주제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시고 열방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날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기적과 함께 전쟁을 일으켜 원수를 심판하시는 날이다. 이스라엘은 이날이 자신들에게는 축복의 날이요 적들에게는 저주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잘못된 견해를 공격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반역하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대항하여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여호와의 날을 초래했는가?
첫째로, 그들은 교만했다(2:3). 교만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진실한 삶의 방식을 경멸하고 자신들의 길을 제멋대로 선택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생명력 있는 길을 버리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걸어가며 하찮은 독립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길을 멀리 떠났다.
둘째로, 우상숭배가 만연했다(1:4-5). 스바냐서에는 바알과 같은 익숙한 우상뿐 아니라 그마림이나 말감 같은 생소한 우상도 등장한다(1:4). 아마 새로 도입된 우상일 것이다. 그리고 지붕위에서 하늘의 뭇별을 경배했는데(1:5) 이것은 앗시리아에서 전래된 우상숭배적 풍습으로 파악된다. 그들의 삶을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온전한 관계로 이끌어가는 하나님말씀을 내버리고, 자신의 추악한 욕심의 발로대로 우상을 끌여 들여 삶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언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자신들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준다고 약속하는 이교적 발상에 물든 상황이다. 결국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깨어지고, 말씀이 중요시하는 이웃과의 신뢰 깊은 관계가 금이 감으로 인해 영적 혼돈과 함께 사회적 타락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셋째로, 실질적인 무신론자들이 되었다(1:12). 실질적 무신론이란 하나님을 찾는 것 같고, 제사도 드리지만 정작 자신의 삶속에서는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다. 신앙과 삶의 괴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속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도, 말씀에 입각한 신실된 삶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삶은 붕괴되고 사회적 정의는 상실되었다. 결국 유다가 왕 같은 제사장 족속으로서의 특별한 지위와 사명을 상실한 채,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 주변 열국에 속한 자의 모습으로 변질되어감으로, 실질적인 불신자의 삶을 살고 하나님께 반역한 유다와 주변 나라에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은 어두움 뒤에는 빛이 오고 절망 뒤에는 희망이 뒤따른다. 여호와의 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채찍은 멸망 그 자체가 아니라 회복과 치유를 위한 단계였다. 즉,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헌신함으로 세상에 진정한 복을 전할 새로운 백성들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도의 일부였다. 그것은 바로 남은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스바냐는 동시대의 선지자인 예레미야, 하박국과 같이 여호와의 날인 무서운 심판이 도래할 것을 경고하지만, 남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실 것을 선포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은 임의적이거나 모순되거나 힘의 잔인한 표현이 아니라 이 땅에서 악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결심과 새 백성을 통해 새 세계를 건설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남은자인가? 누가 미래의 백성이 되는가?
원래 성경에서의 남은 자는 “어느 한 집단이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일어난 어떤 재앙을 겪을 때 그 재앙을 통해서 살아남아 존속하는 하나님백성의 핵이 되는 이들”을 말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런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일을 이어가실 것이다. 이제는 그 범위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보편성 있는 새로운 공동체로 확대되어진다(2:11;요4:21,23).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해결방식이다. 선민이라 칭함받는 전 이스라엘중에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남유다만 남았고, 이제 남유다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지고 소수의 남은자만 존재할 것이다. 범위가 좁아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소수의 남은자들을 통해서 이제 새로운 신앙공동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전세계로 퍼져 나아가는 비젼을 제시하신다(3:9-13).
이렇게 남은자로 구성된 새로운 신앙공동체는 이제 참된 예배를 드린다. 참된 예배가 사라졌을 때의 모습은 12가지의 죄의 현상이 출현했다(3:1-4). 그러나 이제는 격식을 차려드리는 예배뿐 아니라 삶을 통한 예배로 나아갈 것이다(롬12:1). 이 진정한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열정이다. 결국 이스라엘과 세계만방은 진정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관계가 치유될 것이다. 창조세계가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거짓과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다. 탐욕이라는 우상이 너무도 은밀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이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메스콤은 우리로 하여금 탐욕을 정당화시키고, 탐욕이 삶과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부추긴다. 이런 시대상황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고 예배해야 하는가? 전생애를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대한 가슴 깊은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묻어나는가? 아니면 변장하고 나타나는 우상(즉, 탐심 – 골로세서3장5절)이 아직도 우리의 삶을 뒤 흔드는 강력한 힘인가? 단군신상의 목을 밤에 가서 자르는 것이 우상을 척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껍데기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파고 드는 우상이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 바로 탐심이다. 그 세력이 언제나 우리 주변에 서성인다. 그 세력을 직시하고 발본색원하려는 신앙의 결단과, 말씀속에서 삶을 재건하는 진정한 부흥이 우리속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단절한 실제적인 무신론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스바냐시대의 유다의 문제였고, 이 시대의 우리의 문제이다.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함과 삶이 동반된 예배가 회복될 때에만 이 땅은 참된 희망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속에 우리를 남겨두셨다.이 땅의 진정한 그루터기와 같은 존재로 말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