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에스겔서 개관 – 허물어진 인간 사회를 세우시는 능력
에스겔서 1:1에 “제 삼십년”이란 막연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선지자 에스겔의 나이를 표시한다면 그는 아마도 B.C623년경인 유다 요시야왕(B.C640~609)의 개혁 당시에 태어났을 것이다. 한 제사장의 아들로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요시야의 개혁을 목도했음에 틀림없다. 또한 젊은 나이에 앗시리아의 쇠퇴와 멸망, 바벨론 세력의 성장, 외국의 예루살렘 지배, 갈그미스에서 느부갓네살에 의한 애굽과 앗시리아의 패배(B.C605)를 보았을 것이다. 이런 와중 B.C603년에 바벨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비롯한 유다의 지도급 인물들을 바벨론으로 유배시켰다.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 유배 이후에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충성한다는 조건하에 계속 왕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3년 후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원조를 의지하다가 느부갓네살의 진노를 사서 B.C597년 3월16일에 도성과 성전이 유린 당했으며(왕하24:13) 2차 유형을 겪어야 했다. 이때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과 만 명에 달하는 지도급 시민들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 포로중에 스물다섯살난 에스겔도 들어있었다.
B.C593년부터 571년까지 에스겔은 그발강가에 위치한 텔아빕에서 운하토목공사에 투입된 수천 명의 유형민들을 상대로 사역을 하였다. 사역중인 주전586년에 예루살렘 멸망소식을 듣는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임한 것은 포로 후 5년이 지난 30세 때였다. 그 사이에 에스겔은 누구보다도 고향과 성전을 잃은 설움을 많이 느꼈을 것인데, 절망과 좌절로 인해 기진해진 그에게 환상이 임하여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다.
바벨론의 그발강가에 흩어진 수 많은 유다 포로민들을 세우기 위한 사역의 내용이 에스겔서이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왜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에는 어떤 신앙과 민족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남유다의 멸망 이후에는 에스겔이 제사장겸 선지자로서 공적인 사역이 가능했는지를 먼저 살펴봄이 유익할 것이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제국은 분리와 정복정책을 채택했다. 다시 말해 한 지역을 점령한 후에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작은 무리로 나누어 제국의 여러 지역에 다시 정착시켰다. 그렇게 함으로 기존의 연대감과 동맹관계를 깨뜨리고 피정복민들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는 정책을 썼다. 그럼으로 피정복민족들의 조직이 파괴되고 정체성이 혼동되었다. 반면에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분산정책이 아니라 피정복민들이 제국을 위해 봉사하도록 병합시키는 정책을 썼다. 그들은 정복한 국가에서 쓸만한 일군들, 즉 지도자들이나 기술자들을 데려와 한 곳에 모아서 합리적으로 대우하고 체제안에서 진급까지 허락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서 피정복민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남겨둔채 그들의 다양한 재능과 능력으로 제국에 봉사하여 기여하도록 했다. 동시에 피정복국가에는 가난과 지도자의 부재로 제국에 대한 반란의 소지가 없도록 만들었다. 이 정책이 에스겔서에 나타난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왔으나 유대인 집단거주지역인 그발강가에서 수 많은 동족을 위해 합법적으로 신앙지도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에스겔은 공적으로 사역한다. 이것이 앗시리아에 멸망 당한 북이스라엘과는 다른 남유다의 포로기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사역하게 된 그발강가에 모인 유대인들의 상황은 어떠했던가?
에스겔을 포함한 포로민들은 적들에게 포위당하여 성벽안에 갇혀 있는 신세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전투초반부터 부상당하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항복과 더불어 가족들과 헤어지고 포로가 되어 먼길을 떠나게 되었다. 수개월 동안 걸어서 간곳은 낯설고 물설은 땅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바벨론의 큰 강들이 쌓아놓은 평평한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기름진 들판을 적시는 운하가 건설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세한 바벨론 문화와 분투하면서 믿음의 순수성을 수호해야 하는 “격동의 현장”속에 던져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계승되고 견고해지며 회복될 것인가? 아니면 당대 최고의 문명지에서 그들의 신앙과 정체성이 사멸될 것인가? 엄청난 격랑 속에서 에스겔은 부름을 받게 된다.
<구조와 개요> 에스겔서는 분명하게 주요한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단락(1-24장) : 신실하지 못한 예루살렘은 멸망을 피할 수 없다.
둘째단락(25-32장) : 특히 두로와 이집트에 강조를 둔 이방신탁에 관한 말씀.
셋째단락(33-48장) : 회복과 구원환상을 다룬다.
결국 그의 메시지는 죽음에서 부활로 이동한다.
그렇다면 왜 에스겔서는 심판의 메시지로부터 시작하는가? 에스겔은 신속히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하는 포로민들의 대중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거짓선지자들은 조속한 귀국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실상은 부패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에 대해 에스겔은 전달능력이 강한 『상징적 행동』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언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즉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저울에 달아 셋으로 나누어서 삼분의 일씩 태우고, 칼로 치고, 바람에 날림으로 철저한 심판을 몸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임박한 심판에 대한 극적인 상징표현으로 390일 동안 밧줄에 동여 매인채 한편으로 누워 더러운 음식을 먹는다든가 토판위에서 예루살렘의 포위극을 상영하고 정해진 음식과 물을 먹는 행동등으로 포위로 인한 예루살렘의 괴로움과 멸망을 표현하며 선포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됨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무엇이 크게 잘못되어 그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신앙적 무지속에서 교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B.C592년에 환상을 통해서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셨다. 그때 에스겔이 본 것은 제단문어귀와 성전안에 있는 우상들이었다(8:5-13). 그들은 태양신과 이집트와 가나안, 바벨론의 신들을 숭배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진지하게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렇다면 에스겔서에서 제시하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레위인들은 더 이상 백성들을 우상으로 유혹하기 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하며(44:9-14) 방백들은 공의로 다스리며(45:7-9), 상인들은 정직으로 거래해야 할 것이다(45:10-12). 다시 말해 사회속에서 공평과 정의와 인자가 사라졌다면 이미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참된 예배요소를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그들은 공허하고 껍데기뿐인 종교인으로 전락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참된 목적을 버렸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다. 결국 참된 예배의 요소가 결핍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무너짐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회복을 준비해놓으신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죄악은 그 종국에 달했지만 이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새로운 길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에스겔은 선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가?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심으로 회복의 사역이 진척된다. 이미 백성들의 마음은 옳은 결정들을 내리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무디어졌다. 아니 완전히 상실하였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야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택한 백성으로서의 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야만 37:1-14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마른 뼈들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명력 있는 존재로 새롭게 지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성령으로 인해 새 힘을 얻은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모시키는 자로 환골탈퇴할 수 있겠는가? 47:1-12 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성전의 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비스러운 물줄기를 목도한다. 그 물줄기는 동으로 이동하여 유다 광야를 걸쳐, 점점 그 깊이가 깊어져서 드디어 죽은 바다인 사해에 생명을 전달해 준다. 생명의 물줄기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것인가? 에스겔 이후 마침내 포로민들중 일부가 귀환하게 되었고 성전이 재건된다. 그러나 그때의 회복은 에스겔을 비롯한 선지자들이 기대한 이상적인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귀환 이후에도 세상을 변모할 만한 신실하고도 영향력 있는 공동체는 형성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스겔을 통해 예견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성취된다.
에스겔은 회복의 장의 정점에서 강물이 제단의 남쪽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이르는 모든 곳마다 생명을 부여해 주는 거대한 물결로 바뀌고, 죽음의 바다인 사해의 물을 생명체가 뛰노는 신선한 물로 바꾸어 주는 환상을 보았다. 결국 무엇을 상징하는가? 죽은 땅에 생멸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기대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우물 곁에서 만난 여인에게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생명의 물의 근원이라고 밝히셨다(요4:10-14). 또한 후에 예수님께서는 한 절기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은 “이는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요7:38-39).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생명수로 오신 분이셨고 실제로 인생의 참된 생수가 되셨다.
결국 에스겔을 통해 보여주신 회복에 대한 비젼은 이스라엘이라는 국부적인 나라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수 줄기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에스겔서는 대칭적 균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포로됨과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남으로 시작되어서(1-24장), 포로에서의 귀환과 그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재개로 끝마친다(33-48장). 그 가운데 인간의 실패를 초극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의 온전한 회복이 성령의 능력과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예고한다. 결국 허물어지는 인간 사회를 세우는 것은 인간의 힘과 능력과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추진됨을 보여준다. 이것이 에스겔서의 핵심이다.
결국 에스겔서는 권능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의 본성에 대한 무한 강조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행하심에 소망을 건다. 불순종과 부패속에 무너진 인간 사회를 재건하고, 미래의 신앙공동체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죽음의 세력속에 있는 인간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자 예수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죄와 사탄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이루어졌고, 성령의 사역으로 교회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 죽음의 길에 대기하고 있는 인류에 대한 회복의 진정한 메시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간 권력이나 제도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님의 능력과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에 순복하며 중보적 고난의 길을 걷는 성도들의 진정 어린 순종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성도의 존재이유이며 우리가 이 시대의 회복을 갈망하고 고난과 순종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