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대한민국의 한글날 : 한글의 이름과 창제 의의
한글날 (Hangul Proclamation Day, Korean Alphabet Day, Hangeul Day) 또는 조선글날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고 있다.

○ 한글날 유래와 역사
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로 《세종실록》 1446년 (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 (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 (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1906년에 제안했던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명명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이것은 1582년 이전의 윤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매기고, 1582년에 생략된 날짜는 고려하지 않고 잘못 환산한 것이었다. 1446년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실제로는 율리우스력으로 10월 18일이 된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기간도 그레고리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는 역산 그레고리력 (proleptic gregorian calender)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합의가 나와 그에 따라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그러던중에 한글이 반포된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에 따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므로 새로이 한글날을 10월 9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1. 한글에 대한 이름
한글을 일컫는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당시에는 ‘훈민정음 (訓民正音)’이라 불렀는데,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 때의 소리는 글자와 통한다. ‘바른’이라는 꾸밈말을 붙인 이유는, 한자를 빌려 쓰는 것과 같은 구차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글자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훈민정음 (訓民正音)’은 바로 이 이름을 쓴 책이고, 그 밖의 여러 문헌에도 이 이름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훈민정음 (訓民正音)’을 줄여 ‘정음(正音)’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이름은 훈민정음 해례의 끝에 있는 정인지의 글에 이미 나타나 있다.
‘언문(諺文)’이라는 이름은 최근까지 쓰였는데, 이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말이다. 원래 ‘언’이란 ‘우리말’ 또는 ‘정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에 보면, “문(文)과 언(諺)을 섞어 쓸 때는…” 또는 “첫소리 (초성)의 ㆆ과 ㅇ은 서로 비슷하여 언에서는 가히 통용될 수 있다”라고 하였고, “반혓소리 ㄹ은 마땅히 언에 쓸 것이지 문에는 쓸 수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언’은 우리글·우리말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실록’에는 언문청 (諺文廳)이라는 말이 나오고(28년 11월조), 또 바로 ‘언문’이라는 말도 나타난다(25년 12월조). 또, 그 뒤로는 ‘언서(諺書)’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한문을 ‘진서(眞書)’라 한데 대립시킨 말이다.
최세진 (崔世珍)의 ‘훈몽자회 訓蒙字會)’서는 ‘반절 (反切)’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초·중·종성을 따로 분리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정음이 초·중·종성을 분리하여 표기하는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고 보아 붙인 이름인 듯하다.
‘암클’이라는 이름도 쓰였으니, 이는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이다. 선비가 쓸 만한 글은 되지 못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1908년 주시경 (周時經)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가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바로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고친 후, 1913년 4월에는 다시 그 이름을 ‘한글모’로 고쳤다. 이 때부터 ‘한글’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듯하며,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27년 한글사에서 펴낸 ‘한글’(7인의 동인지)이라는 잡지에서부터이다.
‘한글’의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니, 우리글을 ‘언문’이라 낮추어 부른 데 대하여,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권위를 세워 준 이름이다. 이는 세종이 ‘정음’이라 부른 정신과 통한다 할 것이다.
– 한글 각 글자의 이름
정음을 만들던 당시에 한글 낱 글자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 부르는 ‘기역, 니은, …’등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6세기에 나온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이다.
최세진은 ‘ㆆ’을 없애고 나머지 27자를 ① 첫소리에만 쓰이는 8글자, ② 첫소리·끝소리에 두루 쓰이는 8글자, ③ 가운뎃소리에만 쓰이는 11글자로 나누고, ②와 ③ 에 대해서는 지금과 같은 이름을 붙이고 ①에 대해서는 ‘ㅈ(지), ㅊ(치), ㅎ(히)…’와 같이 한 음절 이름을 붙였다. 첫소리로만 쓰이므로 첫소리로 쓰인 예만 보인 것이다.
1933년 조선어학회( 한글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내면서 모든 닿소리 글자는 받침으로 쓸 수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①도 ②처럼 두 음절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28글자 가운데 지금 쓰이지 않는 ‘ㆆ, ㅿ, ·(ᄋᆞ)’의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고, ‘ㅇ’과 ‘ㆁ’의 구별이 없어짐에 따라 그 이름도 하나로 통일되었다.
2.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의
인류의 참된 역사는 언어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록이 없는 시기는 역사 시기가 되지 못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의 우리 나라에도 언어의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으며, 수많은 비석문을 비롯하여 개인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록들이 있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어 놓은 기록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 한아버지(할아버지)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바로 전해 주기에는 부족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한 언어는 그것을 모국말로 하여 자라는 겨레의 생각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여러 민족의 생각하는 방식이 모두 조금씩 다른 것은 여기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한문은 그 어휘나 문법의 체계에 있어 중국의 말이지 우리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아버지들에 대한 한문으로 된 기록은 바로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중국 사람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참된 모습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기록들은 그 양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기록 당시의 언어를 복원하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아버지들에 대한 참된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 때부터 우리 한아버지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게 되며, 그 생생한 감정의 움직임을 바로 피부로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참된 역사 시기가 열리며, 참된 국문학이 시작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말 자체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부터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참된 우리 겨레의 역사 시대의 출발을 의미하는, 우리 겨레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1) 반포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사실이 기록에 난 것은 ‘세종실록’ 25년(음력 1443년)이다. 그 해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몸소 언문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내니…이것을 훈민정음이라 부른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라는 기록이 있다. 즉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이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음력 12월이다.
그러나 이 때 아직 책으로서 국민에게 반포되지는 않았던 듯하여, ‘세종실록’ 28년(1446년) 병인 9월조에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是月訓民正音成)”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책이 만들어진 것을 말함이니, 1443년 음력 12월에 일단 완성된 훈민정음 글자를 다시 다듬고 그 자세한 풀이를 하여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라는 책으로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40년 7월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해례본)의 끄트머리에 붙인 정인지의 글에 있는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臣鄭麟趾 拜手稽首謹書”라는 말로 보아 더욱 분명해진다. 정통 11년은 1446년이다.
2) 한글날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는 것을 총칼로 누르는 ‘어문 말살 정책’을 썼다. 당시의 우리 겨레에게는 우리말을 쓰는 것이 민족정신을 가다듬는 한 방편이었고, 우리글을 쓰는 것을 일종의 독립 운동으로 여겼으니, 그 때에는 ‘한글’이 곧 우리 민족정신의 의지할 곳이었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80년이 되던 1926년 조선어연구회에서는 음력 9월 끝날인 29일을 양력으로 고쳐 10월 28일을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정하고, 이날을 ‘가갸날’이라 하였다. 당시로서는 반포의 날을 정할 수 있는 기록은 ‘세종실록’ 28년의 기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나 좀더 가까운 날짜를 알게 되었다. 정인지의 글에 훈민정음 반포가 9월 상순의 일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는 반포한 날을 음력 9월 10일로 잡고,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3) 세종조 어문 정책과의 관계
세종 때의 언어관은 바른 정치는 바른 소리(正音)에서 나온다는 성리학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즉, 올바른 소리를 모르고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사상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홍무정운(洪武正韻)’이었다.
이 두 책은 모두 그 이전 운서의 음이 어느 한 지방의 음만을 대표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중국 어느 지방에서나 통할 수 있는 정음(正音, 標準音)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언어관을 따르면 언어의 방언적 분포나 변천은 잘못된 것이고 고쳐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비단 고유어의 표기 수단을 만든다는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훈민정음을 만든 뒤 시행한 최초의 여러 사업 가운데 상당히 비중이 높았던 ‘동국정운(東國正韻)’과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편찬에서도 드러난다.
‘동국정운’은 그 당시 우리의 한자음을 중국음과 비교해 볼 때 왜곡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다. 물론 바로잡는다고 해도 완전히 중국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지만, 이러한 목적 때문에 ‘동국정운’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게 편찬되었으며, 당시의 중국음에 근접시키려는 노력을 담고 있었다.
요컨대, ‘동국정운’은 당시의 한자음을 통일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나, 현실 한자음과의 거리로 인하여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30년 만에 쓰이지 않게 되었다. ‘홍무정운’은 명나라 홍무제(洪武帝)가 중국의 한자음을 통일시키려는 목적으로 편찬한 책이었는데, ‘동국정운’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조에는 이 책의 음을 중국의 표준 발음으로 믿고 있었고, 따라서 ‘홍무정운역훈’은 중국 표준 발음을 교육시키려는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정음사상(正音思想)’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한 동인(動因)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또 건국 초부터 인근 여러 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중요한 국가 시책의 하나로 대두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능통한 역학자(譯學者)의 양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조정에서는 1393년(태조 2) 9월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학(四學)이라 하여 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학(女眞學)을 교육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한학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외국어를 교육하는 데에는 정확한 발음 기호가 필수적이었고, 이러한 필요에 부응한 것이 훈민정음이었다.
훈민정음과 그와 관련된 사업 (‘동국정운’ 등의 편찬과 여러 가지 번역 사업)을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공식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던 세종은 여러 개의 사설 기관을 마련했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언문청이었다 (문종 때의 기록으로는 正音廳). 실록에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 곳에서 훈민정음과 그와 관련된 사업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책방 (冊房)· 묵방 (墨房)· 화빈방 (火鑌房)· 조각방 (彫刻房) 등을 사설 기관으로 두었는데, 이들도 훈민정음의 편찬 및 그에 이은 번역 사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훈민정음 기원설 (訓民正音起源說)
표음 문자인 훈민정음이 어느 문자의 계통을 이어받아 창제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설명이나 학설을 훈민정음 기원설이라고 한다.
1940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여러 갈래의 기원설이 존재했으나, 원본 ‘훈민정음’의 제자해(制字解)에서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라고 하여 훈민정음의 창제가 ‘상형’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밝히고 있어 다른 문자로부터의 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해의 “各象其形而制之(각각 그 꼴을 본떠 만들었다).”와 원본 ‘훈민정음’ 끝 부분의 정인지 서문에 “象形而字倣古篆(상형을 하되 글자가 고전과 비슷하다. 또는 고전을 본떠 상형하였다)”이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여러 기원설이 주장되고 있다.
음소 문자인 훈민정음은 그 문자적인 성격에 있어 한자와 다르나, 그 제자(制字)의 기본 방식에 있어서는 한자의 제자법을 따를 수도 있다. 한자 제자법의 바탕이 되는 것은 육서법(六書法)이며, 그 중에서도 상형과 지사(指事)가 기본이 된다.
따라서, ‘各象其形而制之’와 ‘象形而字倣古篆’은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가 한자와 마찬가지로 ‘상형’이며, 이렇게 해서 자형(字形)이 고전(古篆)과 비슷하게 되었음을 설명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 중에 나타나는 “글자의 꼴이 비록 옛날의 전자(篆字)를 본떴으나(字形雖倣古之篆文)”라는 구절도 어디까지나 자형에 대한 것이지 제자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면 위와 같은 설명은 합리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象形而字倣古篆’은 ‘고전’을 참고로 하여 먼저 제자한 다음 상형설을 결부시켰음을 설명한 글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에는 원나라의 파스파 글자까지 결부시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파스파 글자를 참고하되 고전 글자와 비슷하게 생긴 파스파 글자와 마찬가지로 훈민정음도 고전 글자처럼 제자하고, 여기에 상형설을 결부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음소 문자인 훈민정음은 글자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몽골 글자나 파스파 글자와 같고, 음절 단위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보아서는 한자나 파스파 글자와 같은데,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기원설은 제자 방식이나 자체(字體)의 유사성에 더 중점을 두고 설명해 온 느낌이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지금까지의 기원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발음기관 상형기원설
‘정음자 (正音字)’가 모두 발음할 때의 발음 기관의 상태나 작용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신경준 (申景濬)· 홍양호 (洪良浩)· 최현배 (崔鉉培) 등 가장 많은 학자들이 이 설을 주장하였다.
② 고전기원설(古篆起源說)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조(권 제102, 42장)에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가 고전을 본떴다 (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고전 기원설이 나오게 되었으며, 역시 ‘세종실록’에 기재되어 있는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문에도 “글자의 꼴이 비록 옛날의 전자를 본떴으나 (字形雖倣古之篆文)”(세종 26년 2월)라고 되어 있어 이 설을 더욱 뒷받침하였다.
또, 세종 28년 9월조에 실려 있는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 가운데 ‘象形而字倣古篆’이라고 구절도 이 기원설의 근거로 내세워지고 있는데, 다만 ‘象形而字倣古篆’에서 ‘상형’과 ‘자방고전’을 분리시켜 ‘상형’은 제자 방식을 말한 것이고, ‘자방고전’은 최만리가 지적한 대로 자형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기원설은 이덕무 (李德懋)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에 실려 있는 ‘앙엽기 (盎葉記)’나 일부 서양학자들의 저술에서 주장되었으며, 최근의 국내 학자 가운데에도 이 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③ 범자기원설(梵字起源說)
조선 성종 때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훈민정음을 ‘其字體 依梵字爲之’라고 말한 이후로 광해군 때 이수광(李睟光)이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8에서 “우리 나라 언서는 글자의 꼴이 전부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라고 한 데서 범자기원설이 비롯되었는데, 이는 주로 자체의 유사성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 뒤 영조 때의 황윤석(黃胤錫), 1930년대의 이능화(李能和) 등 국내외 몇몇 학자들이 이 설을 주장하였으나 근래에는 이를 주장하는 이가 없어졌다.
④ 몽골자 기원설
조선 숙종 때 이익 (李翼)이 ‘성호사설’에서 훈민정음이 몽골글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순조 때 유희 (柳僖)도 ‘언문지 (諺文志)’에서 ‘몽골의 글자모양 (蒙古字樣)’을 따라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⑤ 범자와 몽골자 기원설
이 기원설은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주장한 것이다.
⑥ 고대문자 기원설
영조 때 신경준이 ‘훈민정음운해 (訓民正音韻解)’ 서문에서 “우리나라 (東方)에는 옛날에 민간이 쓰는 문자가 있었다 (東方舊有俗用文字).”라고 한 것과, 기타 비문(碑文) 등의 글을 근거로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도 고대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다.
⑦ 역리 기원설 (易理起源說)
훈민정음 창제 당시 그 학문적 배경이 되었던 성리학을 확대 해석, 훈민정음이 성리학의 바탕이 된 역학의 원리에 따라 창제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등이 이에 속한다.
⑧ 창문 상형 기원설
서양학자 에카르트 (Eckardt, P. A.)가 주장한 것이다.
⑨ 기-성문도 기원설(起―成文圖起源說)
자체 (字體)의 유사성보다도 제자 방식을 가지고 훈민정음의 기원을 설명한 것이다. 정초 (鄭樵)의 ‘육서략 (六書略)’에는 한 항목으로서 ‘기―성문도’가 있는데, 여기에서 상형의 기본이 되는 자획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 때 이것을 참고로 하여 한글의 자형을 제자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이다.
⑩ 기타의 기원설
서장문자 (西藏文字) 기원설, 팔리 문자 (Pali 文字) 기원설, 거란문자·여진문자기원설, 일본 신대문자 (神代文字) 기원설, 악리 (樂理) 기원설 등이 있으나 모두 참고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는 견해들이다.
다만, 훈민정음과 같은 음소 문자를 창제할 때 15세기 당시의 이웃 나라들의 글자는 물론,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던 모든 글자들을 참고했을 것임은 짐작할 만한 일이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