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평화로다
2020년 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육을 입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땅의 가장 낮은 말구유로 오였다. 이날이 크리스마스이다. Christmas는 Christ + Mass의 합성어로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Holy Day이다. 아기예수 탄생의 의미를 누가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평화이다.
1) 영광 (榮光, Glory, doxa, kabod)
영광이란 헬라어 ‘독사’(δόξα)는 히브리어는 ‘카보드’이다. 독사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영예’, ‘명성’, ‘평판’ 등의 의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눅 17:18; 행 12:23; 롬 4:20; 계 4:9; 계 11:1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롬 15:7; 고전 10:31)과 같은 표현에 사용된다. 둘째 하나님의 ‘현존’, ‘임재’, ‘위엄’, ‘권능’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행 7:2), “영광의 아버지”(엡 1:17), “지극히 큰 영광”(벧후 1:17)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표현이 빈번하게 나온다(마 16:27; 행 7:55; 롬 1:23;롬 6:4; 엡 3:16; 딤전 1:11; 계 15:8). 특별히 카보드(kabod)는 성소에 하나님의 임재함을 뜻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소를 완공하자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출 40:34),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왕상 8:11), ‘여호와의 영광’(출16:7,10 ; 24:16,17)이란 하나님 자체를 뜻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다. 14절에 보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영광’ (δόξα)을 보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영광’(δόξα)을 보는 것이요(요1:14),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하자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8절)라고 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4:9-10)라고 하셨다.
2) 평화 (平和, Peace, eirene, shalom)
평화란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이다. 에이레네는 ‘평안, 평강, 평화, 화평’ 등의 뜻으로 ‘결합하다’라는 뜻의 ‘에이로’(eiro)에서 파생된 단어로 ‘평화,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과 같다. 샬롬(שלום)은 ‘완전, 조화, 건강함, 행복, 번영, 고요, 안전’ 등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완전하다, 건전하다, 완성하다, 마치다, 회복하다, 보답하다’라는 뜻의 솨람(shaw-lam)을 기본어근으로 하고 있다.
요한복음 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라고 했다. ‘평안을 끼친다’는 의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16:33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ειρηνη)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일치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라는 말이 있다. 로마의 전성기 때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시기를 말한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의 강력한 힘으로 전쟁을 억제한 평화였지, 자발적인 평화는 아니었다. 역사가들은 강대국의 힘에 의해 전쟁이 사라진 평화를 ‘가짜 평화’, ‘팍스 로마나’라고 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이다. 평화를 주제로 사생대회가 열렸다. 대상은 폭풍 가운데 엄마 품 안에서 새록새록 잠자고 있는 어린아이를 그린 사람에게 돌아갔다.
세 종류의 구원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Salvation)이다. 구원은 헬라어로 ‘소테리아'(Soteria)이다. ‘소테리아’는 ‘영혼구원’을 넘어 ‘전인구원’을 뜻하고,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구원’에도 사용된다. 전인구원이란 ‘영, 혼, 육’ 모두의 구원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사회란 개인이 모여진 공동체이기에,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가진 ‘신앙 공동체’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지, ‘교회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지 않았다. 구세군은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구원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로 구분된다.
칭의 (Justification)의 구원
칭의는 ‘초기적 구원(Initial Salvation)이다. 칭의란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율법주의자’이고,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행위구원론자’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예수가 누구인가?”이다. 유대인은 선한 사람, 이슬람교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다. 성일도 다르고, 경전도 다르다. 또다른 교리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유대교는 율법을, 이슬람교는 행위를, 기독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기독교에서 행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다.
죄에는 적극적인 죄와 소극적인 죄가 있다. ‘적극적인 죄'(Commission)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고, ‘소극적인 죄'(Omission)는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구약의 계명은 613가지이다. 둘로 나눈다면 ‘하라는 것'(248개)과 ‘하지 말라는 것'(365개)가 있다. 이를 요약한 것이 십계명이다. 1계명부터 4계명은 대신관계이고, 5계명부터 10명은 대인관계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신앙생활은 ‘인간과의 관계’이다. 613개의 율법 앞에선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가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칭의는 초기적 구원으로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중생, 화목, 해방, 거듭남, 칭의, 화목, 성령세례를 뜻한다. 중생은 성화로 들어가는 시작이다. 새사람은 되었지만, 아직 새사람답게 살지는 못하는 상태이다.
성화(Sanctification)의 구원
성결은 ‘지속적 구원'(Ongoing Salvation)이다. 헬라어 ‘하기아스모스'(ἁγιασμός)는 성화(Sanctification), ‘성결'(Holiness) 또는 ‘거룩’이라고 한다. 성결이란 구원 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다. 성결은 일회적 사건이 아닌, 점진적 과정이다. 성결에 이르는 길을 성서에는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5), ‘그의 마음을 품으라’(빌 2:5),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라’(갈4:19), ‘성령 충만함을 받아라’ (엡 5:18) 등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다는 뜻이다.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빌1:21)라고 했다. 로마서 7장에 바울은 죄의 문제로 심히 괴로워했다.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답게 살지 못하는 ‘성결의 문제’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들어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였다’ 고백하고 있다. 성결 역시 성령의 역사임을 고백하고 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처럼, 성결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성결은 인간의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대 제사장들은 푸른 머리띠에 ‘Holiness Unto God’라고 쓴 금패를 하고 지성소에 들어간다.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부정하면 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푸른색은 거룩을 뜻한다. 구세군 군기는 3색으로 되어 이다. 붉은 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노란색은 성령의 불, 푸른색은 하나님의 성결이다. 군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한다. 이스탄불에 가면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건축한 537년부터 1453년까지 기독교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1453년 이슬람교들이 점령하고 모스크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란 ‘거룩한 지혜’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 출구에는 아기예수를 앉은 성모가 중앙에 있고, 왼쪽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성전을 바치고 오른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왕국을 바치는 아름다운 모자이크 그림이 있다.
거룩이라는 히브리어 ‘카다쉬'(שךק)나 헬라어 하기아스모스(ἁγιασμός)는 모두 죄악된 행습으로부터 분리(Separation)되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구별하여 헌신(Consecration)하는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한다. 전자가 소극적 성결이라면 후자는 적극적 성결이다. 소극적 성결이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이라면, 적극적 성결은 완전히 새사람으로 옷 입게 되는 것이다. 희망의 신학자인 몰트만 교수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소극적 성결이라면, 인생을 기쁨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은 적극적 성결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성화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갖습니다. 죄로부터(From) 벗어나서, 하나님께로(to) 헌신 되는 것이다.
영화(Glorification)의 구원
영화란 ‘궁극적 구원'(Ultimate Salvation)이다. 구원의 최종 단계로서 구원의 완성이다.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13:11) 그 날에는 죄의 본성이 사라진 거룩하고 완전한 육체를 입게 된다. 질병이나 죽음도 없는 영원한 육체를 말한다. 죄의 본성으로부터 완전 해방되는 것이다.
영화의 구원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뤄진다. 그 다음으로 살아있던 사람들은 산 채로 육체가 변화된다. 그래서 영화의 구원에 이르게 된다. 우리 육체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처럼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구원은 우리에게 소망이다. 우리가 영화의 구원을 받는 날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살아야 한다.
천로역정이란 책이 있다. 작자 번연이 꿈의 형식을 빌려 순례자들의 개인적 구원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역경을 극복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성경을 읽다가 죄를 깨닫고 다가올 심판을 피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순례 도중 여러 사람을 만나고, 어려운 상황을 겪지만 끝까지 순례를 길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천국에 도착한다. 신앙인의 인생길을 은유와 풍자를 통하여 잘 묘사했다. 순례자와 나그네는 다르다. 순례자는 분명한 목적지를 알고 여행을 하는 사람이고 나그네는 목적지가 없이 상황에 따라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향하여 성화의 길을 걷는 순례자이다. 우리는 출애굽을 했지만 아직 가나안 땅에 도착하지 못했다. 인생길은 광야길이다. 오늘도 믿음의 주여 온전케하는 주님을 바라보면 천성을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