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오바댜서 개관 – 운명의 반전
독자들은 마태복음 2장에서 왜 헤롯왕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서 잔악한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되시는가? 헤롯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그렇게 민감했던 이유는 물론 이스라엘의 왕이 왔다는 그 사실자체였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더 깊은 내막이 있다. 헤롯은 정통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돔출신의 이두매인으로 로마가 분봉황으로 세웠고 이로 인해서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적법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출신의 새로운 왕의 출현이란 소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오바댜 본문은 구약시대에 에돔족속의 심판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다. 오바댜란 이름의 인물은 구약성경에 13명이나 등장하는 흔한 이름으로서 “여호와의 종”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이 오바댜가 구약성경에서는 유일하게 한 장인 성경을 기록했는데, 기록 연대는 대략 남부유다가 멸망한 B.C586년 직후로 추정한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에돔에 대한 신탁들이 여러 군데에 걸쳐 등장한다(이사야서34:5-15; 예레미야서49:7-22; 에스겔서25:12-14; 아모스서1:11-12; 말라기서1:2-5). 위의 예언서들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대한 신탁과 함께 에돔에 대한 신탁이 언급되지만 오바댜서는 오직 에돔에 대한 신탁에만 집중한다.
그렇다면 먼저 구약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에돔과의 관계는 어떠했던가를 알아보자. 에돔족은 에서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에돔과의 갈등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로 출생할 때부터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운명적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에돔족의 지경을 통과하려 할 때 에돔족은 이스라엘의 통행길을 막는다(민20:14-21). 그후 사울 시대까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으나, 다윗이 권좌에 있는 동안에 에돔을 정복한다(삼하8:13-14;왕상11:15-16). 여호사밧시대에 에돔이 유다를 공격하였으나 격퇴한 후에 에돔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에돔내에 꼭두깍시 정권을 세워 다스린다. 그후 여호람때에 에돔이 반역에 성공하였으나, 아마샤왕때에 다시 에돔을 통치한다. 이런 아주 오랜 기간의 적대관계로 인해서 에돔은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바댜서의 내용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오바댜서는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1:1-9) – 에돔의 멸망에 대한 예언), 제2부(1:10-14) – 에돔이 멸망하게 된 이유, 제3부(1:15-21) – 이스라엘이 회복될 여호와의 날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1부인 1:1-9에서 오바댜는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는데 멸망의 이유는 특별히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돔이 위치한 지역의 특색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돔은 지리적으로 사해의 남쪽과 동쪽에 놓여있으며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의 변경에 놓인 꽤 좁은 띠 모양의 땅으로 두개의 중요한 남북교역로가 이 지역을 통과했었다. 첫째는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인데 바로 이곳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통과하려고 했던 지역이다. 이곳은 물을 좀더 쉽게 구할 수 있는 농경지를 따라 뻗어있으나 동서간의 깊은 계곡을 건너기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두번째 길은 농경지의 동쪽 바깥경계를 따라 뻗었는데 이 길은 계곡을 건널 필요가 없었다. 이 요단강 동편의 두 중요한 간선도로를 따라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물품이나 물건들이 운반되었고 대상들에게 거둔 세금이 에돔의 수입중 중요한 토대였다. 그들은 남서쪽 국경 70마일 거리에서 이 도로는 관리하여 통행세를 받고 그 처소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이렇듯 에돔은 교류에 중심점에 있으면서도 요새화된 곳에 살고 있음으로 적들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에돔의 천연적 방어시설은 매우 훌륭했다. 남동쪽에 위치한 산악지역은 좁고 긴 능선 위에 있었고, 북부지역의 능선은 전체적으로 해발 1200m가 넘었다. 더욱이 그곳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아라바까지, 그리고 동쪽의 사막까지는 계곡들이 많았기 때문에 에돔인의 거주지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런 지형이 그들로 하여금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교만에 빠지게 하였다. 이렇듯 에돔은 지극히 요새화된 땅으로 인해 교만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잊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원하시면 어떤 것을 견고하게 하실 수도 있고, 무너지게 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보기에 크고 작은 것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 하나님께는 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영원한 요새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인간적 방어체계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생의 요새가 되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를 그토록 미워하면서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서 그 생명이 보호하심을 받는다. 반면에, 이집트의 바로는 인간적으로 견고한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세와 싸워 패배하였지 않는가? 또한 그렇게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인 여리고성도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에돔이 요새화된 자기 땅을 의지하고 교만한 것은 패망의 지름길이었다. 실제로 에돔은 요새화된 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 의해 황폐해졌고(렘49장, 겔35장), 또한 마카비왕조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리고 A.D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는 에돔 역시 멸망하여 그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제2부인 1:10-14에서 멸망의 또 다른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것은 에돔의 무정함 때문이다. 에돔은 바벨론에 공격에 의해 곤경에 처한 형제국가인 유다에 대해 비정한 정도의 무정함을 보인다. 1:12을 보면 유다가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고, 그들의 패망에 대해 입을 크게 벌리고 환호한다. 또한 1:14을 보면 도망하는 유대인을 막어서고 심지어 남은자들을 인신매매하는 일까지 서슴치 않은 다는 것이다. 곤경에 처한 이웃을 탈취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1:10에서는 이런 포악한 행동으로 인해 영원히 멸절될 것을 선포하신다. 무정함이 삶의 방식인 자들은 추락하고 만다.
지금 이 땅에 시행되고 있는 삶의 방식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이익과 풍요로움을 위해 약한 자들의 것을 탈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으로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사실은 풍요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식 가운데 최악의 방식이다. 에돔은 이 방식을 택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개인이나 단체, 더 나아가 국가들이 은혜로운 나눔의 방식이 아니라 냉혹한 무정함을 토대로 자신의 풍요로움을 확보하려고 하는가? 결국 오늘의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궁핍과 고통은 자원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가진자가 더 가지려는 나눔의 결핍현상에서 기인하는 것이 큰 이유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 오바댜서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삶을 표방하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인 나눔의 삶이 회복되고 있는가, 아니면 에돔의 방식인 무정한 이기주의인가?
제3부인 1:15-21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신다. 1:15에는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하실 날” 즉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 제시한다. 이 여호와의 날은 에돔이 패망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날이다. 그 날에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기뻐하던 에돔도 열방과 함께 망하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은혜가 베풀어져서 회복될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한다. 바로 여기에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B.C722년에는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하고 포로가 되고, B.C586년에는 남유다가 망하고 포로됨의 수치를 당함을 보게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적 계약을 스스로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무엇인가?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의 주군관계, 남유다가 바벨론과의 주군관계에 따른 충성의 맹세를 어기고 그들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결과가 초래됐다. 조약을 통해서 조공등으로 자기 배를 채우려는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의 자기 욕심적 발로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거기에는 파괴와 유랑, 그리고 야만적 잔인함이 표출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어떠한가? 물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관계가 있었다. 또한 그것을 깨뜨릴 때는 유랑과 방랑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점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두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신30:1-5). 다시 말해 남은자들을 통해 그 땅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북이스라엘과 앗시리아 사이, 남유다와 바벨로니아의 주군관계의 조약이 깨질 때 다시금 회복되는 조처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제2의 기회를 준비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시려고 작정하신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삶의 방식의 표방인 율법안에서, 세상의 부조리와 악을 초극하는 사랑과 우정의 신실한 공동체를 다시 재건하도록 하나님은 준비하시고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을 깨고 자신의 욕심의 발현인 우상숭배에 깊이 유혹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리 이탈한 계약당사자인 이스라엘이지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의 백성이 변질된 행동에 대해 징벌하신다. 그것이 공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되신 하나님은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를 통해서 다시금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확립시키도록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당시 근동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주군관계의 계약과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이다. 이 은혜로 이스라엘은 다시금 소생했다.
오바댜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통찰력과 교훈을 제공한다. 교만하고 무정하게 행하던 에돔은 나중에 이두매인이 되어 그 중의 한 인물인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원천 봉쇄하려고 하는 자리에 섰다. 결국 그들은 역사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A.D70년).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징계의 채찍을 맞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인해 그 중에 남겨진 소수의 경건한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 사역을 이루어가셨다.
그 남은자들 중에 예수님이 오셨고, 사도들을 세우시고 복음의 일군들을 세우셔서 지금 이 시대까지 하나님의 복음이 흥왕하게 하셨다.
이제 우리의 길은 분명하다. 이 시대가 에돔과 같이 교만하고 또한 약육강식의 무정함이 팽배해있다. 그러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시대속에서라도 복음의 제시하는 사랑과 섬김과 세움의 원리속에서 살아가며 이 땅 가운데서 진정한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자들로 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속에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