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을 제국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 (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 (Gaius Julius Caesar, BC 100년 7월 12일 ~ BC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 · 정치가로, BC 100년 7월 12일에 태어났다. 7월을 가리키는 영어의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민중파인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귀환,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BC 69년에는 재무관, BC 65년 안찰관 (按察官)을 거쳐 BC 63년 종교상 최고직인 종신 대신관이 되었다.
BC 60년에는 폼페이우스 및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BC 58년 ∼ BC 50년, 속주 갈리아의 장관으로서 갈리아 전쟁을 수행, 브리튼과 게르만 족의 영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대부분 평정하였다.
BC 53년 삼두체제의 한 중심인 크라수스가 동방원정에서 전사함으로써 원로원 보수파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으며 BC 51년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로마 소환과 군대해산을 결의하자, BC 49년 1월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함으로써 내전을 시작하였다.
BC 45년 3월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들까지 진압함으로써 마침내 5년간의 내전을 종결시켰다.
BC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이 되었고, 곧이어 BC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율리우스력을 제정하고 노예에게 관직을 허용함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로마를 정비하는 등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지나친 권력의 집중을 견제하고자 했던 원로원 공화파와 공화정 지지자들에 의해 BC 44년 원로원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 율리우스 카라사르 시저 (Gaius Julius Caesar)
.출생: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
.사망: 기원전 44년 3월 15일(56세), 로마
.정당: 포풀라레스
.부모: 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모) 아우렐리아 코타
.배우자: 코르넬리아 (기원전 84년 결혼, 기원전 69년 사별), 폼페이아 (기원전 67년 결혼, 기원전 61년 이혼), 칼푸르니아 (기원전 59년 결혼, 기원전 44년 사별)
.자녀: 줄리아 카이사리스 필라, 카이사리온 (사생아), 옥타비아누스 (입양)
.종교: 로마 다신교
* 로마 공화국의 독재관
임기: 기원전 49년 10월 ~ 기원전 44년 3월 15일
전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후임: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투르니우스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임기4: 기원전 44년 1월 1일 ~ 기원전 44년 3월 15일
.공동재임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전임: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 후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임기3: 기원전 46년 1월 1일 ~ 기원전 45년 9월
.공동재임자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전임: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 후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임기2: 기원전 48년 1월 1일 ~ 기원전 47년 1월 1일
.공동재임자: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전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마이오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 후임: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임기1: 기원전 59년 1월 1일 ~ 기원전 58년 1월 1일
.공동재임자: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전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루키우스 아프리카누스 / 후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우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군사 경력
.군복무: 로마 공화국
.참전: 갈리아 전쟁, 브리타니아 침공, 카이사르의 내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라: Gaius Iulius Caesar)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 연표

.기원전 100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7월 12일 로마의 서민지역인 수부라 지구에서 탄생.
.기원전 85년 – 아버지 사망. 집정관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
.기원전 82년 –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피. 미누키우스 총독의 군대에 지원하여 참모가 됨.(~81년)
.기원전 80년 – 미누키우스의 레스보스섬 공략전에 참가.
.기원전 78년 – 술라 사망. 로마로 귀국.
.기원전 77년 – 변호사 개업을 하고 당시 권력자들을 고소하지만 실패.
.기원전 76년 – 고소 실패로 로도스 섬으로 도피 유학을 가던중 해적의 습격으로 포로가 되 몸값을 주고 석방후 해적 소탕.
.기원전 73년 – 로마로 귀국해 제사장 및 대대장이 됨.
.기원전 70년 – 회계감사관에 취임(~69년). 먼 에스파냐에 부임. 귀국후 원로원 의원이 되다.
.기원전 68년 – 고모의 장례식에서 대담한 추도연설을 행함. 아내 코르넬리아 사망.
.기원전 65년 – 안찰관에 취임. 자비로 아피아 가도를 보수하고 화려한 검투시합을 개최.
.기원전 63년 – 최고 제사장에 취임. ‘카틸리나 역모사건’에 대해 키케로, 소 카토와 논전.
.기원전 62년 – 법무관에 취임. 후처 폼페이아에 얽힌 귀족 클라우디우스의 스캔들 때문에 아내와 이혼.
.기원전 61년 –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현지인인 발부스를 등용. 대서양 연안을 평정.
.기원전 60년 – 카이사르, 귀국하여 이듬해 집정관에 출마. 폼페이우스·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정치 결성.
.기원전 59년 – 집정관에 취임. 농지법과 공직자에 대한 율리우스 법을 가결.
.기원전 58년 – 갈리아 전쟁 1년째. 카이사르, 갈리아 총독에 부임. 헬베티족과 아리오비스투스 격파.
.기원전 57년 – 갈리아 전쟁 2년째.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에 진출하여 벨가이 반란군을 격파하고 각 지방을 평정.
.기원전 56년 – 갈리아 전쟁 3년째. 카이사르·크라수스·폼페이우스의 루카 회담. 갈리아 각 지방을 평정.
.기원전 55년 – 갈리아 전쟁 4년째.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대승.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 어머니 아우렐리아 사망.
.기원전 54년 – 갈리아 전쟁 5년째.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암비오릭스의 반란. 카이사르, 반란군을 격파. 딸 율리아 사망.
.기원전 53년 – 갈리아 전쟁 6년째. 갈리아 북동부의 모든 부족을 평정.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갈리아 대반란이 일어남. 카이사르, 게르고비아를 공격하러 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 ‘갈리아 전쟁기’ 전7권 간행
.기원전 51년 – 알레시아 공방전의 전후 처리로 모든 부족을 복종시키고 평정 ‘갈리아의 로마화’에 착수.
.기원전 50년 – 북이탈리아 속주로 귀환.
.기원전 49년 – 원로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결의. 1월 12일 라벤나를 떠난 카이사르,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도하(“주사위는 던져졌다!”). 내전의 시작. 일레르다 전투 승리. 이듬해인 기원전 48년도 집정관에 선출.
.기원전 48년 – 카이사르, 그리스에 상륙.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 카이사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이집트인들과 벌인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
.기원전 47년 – 『내전기』 전3권 완성. 소아시아에 상륙, 카파도키아 지방의 젤라에서 파르나케스를 격파(“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기원전 46년 –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군을 대파. 로마에 귀환. 네 차례의 개선식을 거행. 내전이 사실상 종결. 각종 개혁 실시. 율리우스력(태양력) 채택. 국립 조폐소를 창설.
.기원전 45년 –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반카이사르파가 봉기하자 히스파니아로 떠나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
.기원전 44년 – 2월 원로원과 민회,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에 임명. 3월 15일 카이사르,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
– 저서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146]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 및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