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아우구스투스 연구 – 로마제국 초대 황제, 그의 시대와 업적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책과함께 / 2016.5.13
.열아홉 나이에 치열한 로마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은 아우구스투스!
.로마제국 초대 황제로서 77세에 숨을 거두기까지 격변의 50여 년 동안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업적들과 당시의 시대상을 만난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서기 14년에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죽음을 맞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 아우구스투스는 친구들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 생각에 내가 인생극장에서 내 배역을 적절하게 연기한 듯하지 않소? 내 역할을 잘 수행했으므로 박수를 보내주오. 그러면 칭찬을 받으며 무대를 내려오게 하오.” 그리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기꺼이 그에게 신격을 부여했다.
양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고 2차 삼두정기와 내전기를 거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한 뒤 제국 통치라는 막대한 과제를 해결하여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룩하고, 이후 서쪽에서는 462년, 동쪽에서는 1,439년 동안 이어질 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우리가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것은 내전에서 승리한 후, 무력이나 경찰력이 아닌 원로원과 로마시민의 힘을 빌려 지중해 세계에 로마의 평화라는 깃발 아래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힘에 의한 통치는 손쉬운 지배방식이지만 오래갈 수는 없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기에 아우구스투스의 국가체제 확립 과정은 현대인들에게도 특별하고도 큰 의미를 가진다.
공화정의 자유라는 전통, 원로원의 보수적이고 과두적인 특권 의식을 존중하면서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의 통합, 나아가 속주민들을 하나의 시민단으로 완성하는 작업은, 길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결국 이뤄내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로마가 다시 한 번 비약했으니, 이는 공화정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한 것 못지않게 인류 역사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서거 2천 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이 책은, 아우구스투스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로마사 전공자들이 인구, 문화정치, 도시 로마의 정비, 재정 등 각자의 시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아우구스투스 연구’는 아우구스투스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로마사 전공자들이 인구, 문화정치, 도시 로마의 정비, 재정 등 각자의 시각으로 연구한 결과물
전체 2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와 문화’를 주제로 일곱 편의 글을 소개한다. 1장 ‘아우구스투스 시대 센서스와 시민 수 문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인구 문제를 다룬다. 로마에서는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처음 시작한 이래로 5년마다 센서스(총조사)를 실시해 시민과 그 재산을 등록하고 과세나 징집의 근거로 활용했다. 이 장에서는 센서스의 절차와 세부 내용, 아우구스투스 치세기에 행해진 센서스의 수치를 통해 로마제국의 행정적, 제도적 변화를 추정한다.
2부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평가’를 주제로 여섯 편의 글을 소개한다.

○ 목차
머리말
1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와 문화
1장 아우구스투스 시대 센서스와 시민 수 문제_ 김덕수
1. 시작하며
2. 센서스 제도의 창설과 주요 내용
3. 아우구스투스 시대 센서스 해석을 둘러싼 논쟁
4. 마치며
2장 옥타비아누스의 문화정치 : 기원전 33년의 공공서비스 사업과 선물 공세를 중심으로_ 김경현(金京鉉)
1. 시작하며
2. 아그리파의 아이딜리스로의 선출
3. 수도 로마에서의 공공서비스 사업과 아폴로
4. 로물루스와 수도 로마의 ‘아버지(pater urbis)’
5. 마치며
3장 기원전 31~27년 옥타비아누스의 모범사례로서의 누마 폼필리우스 활용_ 배소연
1.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2. 로물루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3. 누마 폼필리우스와 옥타비아누스
4. 아우구스투스의 모범사례들
4장 《아이네이스》에 그려진 제국 로마와 황제 아우구스투스 : 8권, 《아이네아스의 방패》를 중심으로_ 안재원
1. 시작하며
2. 바깥 장면들
3. 안 장면들
4. 마치며
5장 디오니시오스의 로마 기원론 : 제정 초 그리스 지식인의 로마제국관_ 고경주
1. 시작하며
2. 트로이 기원설과 아우구스투스
3.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 기원설
4. 로물루스 체제
5. 마치며: 《로마 고대사》 서술의 목적
6장 아우구스투스의 계승 계획과 율리아 추방_ 배은숙
1. 시작하며
2. 아우구스투스의 계승 계획
3. 율리아의 추방 이유
4. 마치며
7장 아우구스투스의 ‘간통에 관한 율리우스법’과 4~6세기 기독교 시대의 칙법 전통_ 남성현
1. 시작하며
2. ‘간통에 관한 율리우스법’의 특징
3. 간통에 관한 4~6세기 기독교 시대의 칙법 전통
4. 마치며
2부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평가
8장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수도 로마_ 김경현(金炅賢)
1. 시작하며
2. 삼두정기 말의 옥타비아누스와 수도 로마
3. 구도심의 장식: 포룸, 팔라티움, 카피톨리움
4. 수도의 확장: 마르스 평원과 티베리스 강 우안
5. 마치며
9장 아우구스투스 치세기 신설된 상수도 관리관의 자질과 역할_ 김칠성
1. 시작하며
2. 상수도 관리관의 자질
3. 상수도 관리관의 역할
4. 상수도 관리관의 전문 인력단 감독
5. 마치며
10장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제단_ 김상엽
1. 시작하며
2. 마르스 신과 누마 폼필리우스: 건국 신화-과거
3. 행렬: 로마의 정치·사회 안정-현재
4. 로마 여신과 텔루스 여신: 로마제국의 영광과 황금시대의 도래-미래
5. 마치며
11장 아우구스투스와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의 건설_ 이지은
1. 시작하며
2. 칸타브리아-아스투리아스 전쟁(기원전 26~25년)
3.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의 건설과 제대병들의 정착
4. 아우구스투스의 도시, 에메리타 아우구스타
5. 마치며
12장 로마 공화정 후기의 재정 의식과 아우구스투스의 재정 운영_ 김창성
1. 시작하며
2. 공화정 말기 공공회계 인식
3. 재정 운영의 방향
4. 파피우스 포파이우스법
5. 마치며
13장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누스_ 최혜영
1. 시작하며
2. 율리아누스가 본 아우구스투스
3. 아우구스투스와 태양신 아폴론
4. 아우구스투스 대 율리아누스
5. 마치며
연표
집필진 소개
○ 저자소개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고대 그리스와 로마 등 서양 고대사와 고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학자, 연구자, 전공자 들이 모여, 서양 고대사 및 관련 학술 분야의 발전과 국내의 문화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1993년에 설립하였다. 학술지 《서양고대사연구》를 연 4회 발간하고 있다.
.고경주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사.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로마 제정 전기 문헌을 바탕으로 황제권력과 기원후 1~2세기의 지적 활동 연구. 논문으로 [타키투스의 대화편], [소 플리니우스와 프린켑스 정치 인식], [로마 제정기 사법체계 내에서의 고문] 등이 있다
.김경현(金炅賢)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고대사, 서양사 연구. 공저로 《서양사 강의》, 《서양고대사 강의》 등이 있다.
.김경현(金京鉉)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영국 런던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고대사, 서양사, 로마의 정치제도사와 문화사 연구. 논문으로 [고대 로마 세계 노인의 지위와 역할: 조르주 미누아의 테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안토니누스 역병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 공저로 《공간 속의 시간》, 《동서양 역사 속의 공공건설과 국가경영》 등이 있다.
.김덕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서양고대사, 서양사,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연구. 저서로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로마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그리스와 로마: 지중해의 라이벌 2》,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공저), 번역서로 《로마사》, 《로마문명사》, 《로마혁명사 1·2》(공역) 등이 있다.
.김상엽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교양교육대학 교양학부 강의조교수.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고대사, 서양사 연구. 저서로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이야기 그리스 로마사》,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등이 있다.
.김창성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고대사, 서양사, 로마의 신분제도와 기능 연구. 저서로 《로마 공화국과 이탈리아 도시》, 《사료로 읽는 서양사 1·2》,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공저) 등이 있다.
.김칠성
백영고등학교 교사,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고대사, 서양사 및 역사교육 연구. 공저로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 《고등학교 세계사》(천재교육) 등이 있다.
.남성현
한영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기독교 영성 및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기독교 문명사 연구. 저서로 《고대 기독교 예술사》,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연구》 등이 있고, 번역서로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에바그리오스의 실천학》 등이 있다.
.배소연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캠퍼스 서양고대사 전공 박사과정 수료. 서양 고대의 여성과 종교, 사학사 연구. 현재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원수정 재조명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 중이다.
.배은숙
계명대학교 교양교육대학 인문사회계열 조교수. 경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고대사, 서양사, 로마 군사사 연구. 저서로 《강대국의 비밀: 로마제국은 병사들이 만들었다》, 《젊은 지성을 위한 로마제국 쇠망사》, 《로마 검투사의 일생》 등이 있다.
.안재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서양고전문헌학 연구. 저서로 《키케로의 수사학》, 《로마의 문법학자들》, 《Hagiographica Coreana 2》, 《인문의 재발견》 등이 있다.
.이지은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경기대학교 시간강사.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서양 고대사 연구. 논문으로 [로마 제정 초기의 황제 숭배], [소 플리니우스의 《서한집》 제10권 속 황제 트라야누스의 이미지: 서신 1~14를 중심으로] 등이 있고, 번역서로 《로마 제국》,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이 있다.
.최혜영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그리스 이와니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서양고대사 연구. 저서로 《그리스 문명》,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공저), 《서양고대사 강의》(공저)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센서스의 일차적 용도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 징집 가능한 건강한 로마 군인 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모든 시민들, 무장 가능한 보병들, 모든 트리부스의 개인들과 관리관들을 (……) 이 줄 안으로 여기 내게로 소집하라”는 켄소르의 명령이 내려지면 일정 정도의 재산을 보유한 성인남자 시민들은 로마 성벽 밖의 마르스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전쟁의 신 마르스를 기념해서 조성된 마르스 광장은 원래 로마 군대의 소집 및 훈련장소이기도 했다. 센서스에서 무기와 갑옷을 마련할 수 있는 시민들의 경제력이 확인되면 그가 속할 등급과 켄투리아가 배정되었고, 이에 따라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전수받은 팔랑크스, 즉 중장보병 밀집대를 주축으로 하는 군대 조직이 완성되었다. — p.26「1장 아우구스투스 시대 센서스와 시민 수 문제」중에서
아그리파가 사업을 추진했던 목적이 로마의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여 로마시민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데에 있지만은 않다. 이는 정치적·문화적 관점에서 도시의 경관을 재조직한 일종의 문화정치를 반영한다. 특히 안토니우스와의 전면적인 충돌이 임박해 있는 시점에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가장 유능한 군사령관을 내세워 대대적인 정책을 펼쳤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문화정치란 인간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영역이 정치적 권력과 관계를 맺는 복잡한 갈등과정을 의미한다. 현대학자들도 옥타비아누스가 정치에서 이미지의 힘을 간파하고 치밀하게 이용했던 정치가였음에 동의한다. — p.52「2장 옥타비아누스의 문화정치」중에서
일인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부인할 수 없는 약점은 내전을 통해 어렵게 획득한 권력과 장기간 기틀을 다진 제국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힘들게 다져놓은 제국을 물려받는 사람이 자신의 가문 출신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 바람을 이루어 줄 사람은 무남독녀 율리아뿐이었다. 율리아와 결혼하는 사람을 후계자로 생각한 것도 가문에 대한 그의 애착에서 나온 것이었다. 율리아는 기원전 25년 마르켈루스와 결혼했다— p.「중략)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구도에 첫 번째 제동이 걸린 것은 기원전 23년 마르켈루스의 죽음이었다.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마르켈루스가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 p.187「6장 아우구스투스의 계승 계획과 율리아 추방」중에서
아우구스투스 치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제국의 거대도시로 발전한 로마에서는 여러 행정개혁이 단행되었다. 특히 로마의 도시 문제 중에서 급선무인 급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겸비한 전문 관료가 필요하였다. 기원전 12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상수도 관리관 직을 신설함으로써 로마시민에게 원활하게 물을 공급할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수도 시설의 유지와 관리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이들의 직무를 통하여 아우구스투스는 급수권을 통제하고, 급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로마시민의 민생 문제 해결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 p.292「9장 아우구스투스 치세기 신설된 상수도 관리관의 자질과 역할」중에서
그[아우구스투스]는 이미 내란기 로마에서 병사들에 약속한 보상의 액수에 따라서 병사들의 동향이 좌우되었던 것을 경험한 터였다.
안정된 권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인들에 대한 보상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국고를 튼실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란으로 피폐해진 사정에서 국고에서 재원을 조달하는 것은 난망한 과제였다. 그래서 별도의 기금을 만들기로 한다. — p.397「12장 로마 공화정 후기의 재정 의식과 아우구스투스의 재정 운영」중에서
율리아누스가 본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정복 사업을 벌인 것, 철학적 가르침에도 애쓴 것, 내전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새로운 입법과 개혁으로 바로 세운 것, 지나친 전쟁욕에서 벗어나 나라의 경계를 세운 것 등으로 크게 요약될 수 있다.
각 황제의 업적에 대한 평가 다음으로 신들이 정한 두 번째 평가 기준은 인생의 목적이나 동기 혹은 원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업적들은 운에 의해서 좌우되기 쉬우므로, 진정한 동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율리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를 최고의 운을 타고 난 황제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 p.425「13장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누스」중에서

○ 출판사 서평
– 기획 의도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서기 14년에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죽음을 맞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 아우구스투스는 친구들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 생각에 내가 인생극장에서 내 배역을 적절하게 연기한 듯하지 않소? 내 역할을 잘 수행했으므로 박수를 보내주오. 그러면 칭찬을 받으며 무대를 내려오게 하오.” 그리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기꺼이 그에게 신격을 부여했다.
양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고 2차 삼두정기와 내전기를 거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한 뒤 제국 통치라는 막대한 과제를 해결하여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룩하고, 이후 서쪽에서는 462년, 동쪽에서는 1,439년 동안 이어질 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우리가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것은 내전에서 승리한 후, 무력이나 경찰력이 아닌 원로원과 로마시민의 힘을 빌려 지중해 세계에 로마의 평화라는 깃발 아래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힘에 의한 통치는 손쉬운 지배방식이지만 오래갈 수는 없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기에 아우구스투스의 국가체제 확립 과정은 현대인들에게도 특별하고도 큰 의미를 가진다.
공화정의 자유라는 전통, 원로원의 보수적이고 과두적인 특권 의식을 존중하면서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의 통합, 나아가 속주민들을 하나의 시민단으로 완성하는 작업은, 길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결국 이뤄내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로마가 다시 한 번 비약했으니, 이는 공화정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한 것 못지않게 인류 역사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서거 2천 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이 책은, 아우구스투스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로마사 전공자들이 인구, 문화정치, 도시 로마의 정비, 재정 등 각자의 시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세계가 남긴 업적이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서양을 넘어 우리의 정치·사회·문화 곳곳에 스며들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도 이 공동 연구가 지닌 현재적 의의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지중해 세계를 주도한 고대 로마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이나 교양인문서 독자뿐 아니라 사회 각 방면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이유이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시대를 통해 우리를 되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 노력이 세계화와 다문화 시대를 맞아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결과 사회 통합에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 책의 내용
이 책은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와 문화’를 주제로 일곱 편의 글을 소개한다. [1장 아우구스투스 시대 센서스와 시민 수 문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인구 문제를 다룬다. 로마에서는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처음 시작한 이래로 5년마다 센서스(총조사)를 실시해 시민과 그 재산을 등록하고 과세나 징집의 근거로 활용했다. 이 장에서는 센서스의 절차와 세부 내용, 아우구스투스 치세기에 행해진 센서스의 수치를 통해 로마제국의 행정적, 제도적 변화를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아그리파가 기원전 33년에 행한 공공서비스 사업과 선물 공세는 로마시민의 호의를 얻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해되었지만, [2장 옥타비아누스의 문화정치]에서는 이를 ‘문화정치’라는 개념으로 파악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권력 기반으로 삼고 있는 안토니우스에 대적해서 이탈리아와 로마를 보호하고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도 로마의 위상을 고양시켜야만 했고, 그 해결책을 문화정치에서 찾아 시행한 것이다.
[3장 기원전 31~27년 옥타비아누스의 모범사례로서의 누마 폼필리우스 활용]은 악티움 해전이 일어난 기원전 31년부터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된 기원전 27년까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역할 모델을 바꾸어가며 정치 지도자로서 이미지 변신을 꾀한 방식을 탐구한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종교와 법제도를 정착시켜 내정의 안정화를 가져다준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와 율리우스씨족의 조상 아이네아스 등, 당시의 필요에 맞게 적합한 본보기를 선택해 자신과 동일시하고 선전하는 데 활용했다.
[4장 《아이네이스》에 그려진 제국 로마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건국 서사시의 작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8권 ‘아이네아스의 방패’에 나타난 세계상에 담긴 역사인식을 논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의 방패를 통해 로마를 세계의 통치자이자 집행자로 상징화했다. 이 글은 정치적 상징화 작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동시에 베르길리우스가 로마를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킨 근거를 분석한다.
로마 민족의 기원에 관한 표준적인 전승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던 트로이 기원설이다. 하지만 그 표준적인 신화가 로마제국 내 모든 이의 동의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5장 디오니시오스의 로마 기원론]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대표적인 그리스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서 《로마 고대사》를 저술한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제기하는 그리스 기원설을 소개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해명한다.
아들이 없던 아우구스투스는 무남독녀 율리아를 매개로 체제를 계승시키고자 했고, 계승 작업은 기원전 25년에 율리아와 자신의 조카 마르켈루스와의 혼인으로 시작되었다. [6장 아우구스투스의 계승 계획과 율리아 추방]은 마르켈루스의 병사를 포함한 잇따른 후계자들의 등장과 퇴장 등 아우구스투스의 계승 계획과 율리아 추방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다룬다.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는 타락한 도덕을 개혁하여 국가적 발전을 견고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로마의 상류계층을 제어하고자 간통에 관한 법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간통에 관한 율리우스법’이다. 이 법의 주요 골자는 간통을 제3자가 고발할 수 있는 공범죄(公犯罪)로 만든 것인데, [7장 아우구스투스의 ‘간통에 관한 율리우스법’과 4~6세기 기독교 시대의 칙법 전통]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간통에 관한 율리우스법, 즉 ‘간통금압법’과 4~6세기 기독교 시대의 칙법 전통을 비교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간통에 관한 로마법 전통은 큰 변화 없이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4~6세기 기독교 로마제국의 시대에 이르러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수정된다. 이 글을 통해 로마법상 간통죄가 기독교 시대에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탐구해본다.
2부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그에 대한 평가’라는 주제로 여섯 편의 글을 담았다.
[8장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수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수도 로마를 어떻게 꾸미려 했는지, 특히 마르스 평원을 중심으로 수도 로마의 모습을 어떻게 재구조화하려 했고 그 의도는 무엇이었는지를 탐구한다. 투표소나 개표소 같은 공공건물 건축, 왕조의 존재를 과시하는 기념물 외에 광활한 부지와 자연환경을 활용해 다중이 향유할 수 있는 위락공간 조성 등 수도 로마 재구조화의 목표는 제국의 위상에 맞는 수도의 외관을 갖추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아우구스투스 자신과 율리우스 가문의 명예, 그리고 왕조적 권력의 이미지를 수도 주민에 부과하고 선전하려는 의지가 줄곧 작용한 것이었다.
[9장 아우구스투스 치세기 신설된 상수도 관리관의 자질과 역할]에서는 상수도 관리관이었던 프론티누스의 《로마 상수도론》을 바탕으로 아우구스투스 치세기 신설된 상수도 관리관의 자질과 역할을 논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고, 따라서 특히 로마의 도시 문제 중에서 급선무였던 급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겸비한 전문 관료가 필요하였다. 상수도 관리관 직을 신설함으로써 로마시민에게 원활하게 물을 공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수도 시설의 유지와 관리라는 각별한 임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0장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제단]은 아우구스투스를 평화의 군주로 선전하는 데 크게 기여한 평화제단의 설립과정과 조각들의 의미를 탐구한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제단은 기원전 13년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로마로 귀환한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해 착수되어 기원전 9년에 완공되었다.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성공이 로마의 군사력과 로마인들의 번영과 안정에 뿌리를 두었던 반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제단은 이데올로기적인 변화를 완화시키고 율리우스 혈통을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시칠리아를 차지한 뒤부터 이탈리아 반도 밖에 있는 해외 영토의 관리는 로마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1장 아우구스투스와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의 건설]에서는 기원전 26~25년 히스파니아 서북부 정복과 새로운 식민시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의 건설이라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탐구하여, 권력과 체제의 확립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가 속주에서 실제로 어떠한 정책과 활동들을 펼쳤는지 고찰한다.
[12장 로마 공화정 후기의 재정 의식과 아우구스투스의 재정 운영]은 아우구스투스가 국가 재정을 세울 수 있었던 배경과 그 세부 시행령을 검토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의 세원을 파악하고, 새로운 세금을 신설해 합리적인 국가 재정 운영책을 마련하였다. 병사들에게 분배할 토지를 마련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를 구매하고, 국고를 원로원이 관할하게 하고, 국가 회계자료를 상세히 남기게 하며, 정부의 회계보고를 정례화하는 등,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일종의 최고경영자나 회계책임자로서도 매우 현대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13장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누스]는 제정 후기에 율리아누스 황제가 아우구스투스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리고 두 황제의 공통점은 무엇인지를 규명한다. 율리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정복 사업과 내전 후 국가 정비 등 로마 황제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상당한 업적을 남겼지만, 신들을 모방하기보다 인간들의 장점을 따르려 한 면모를 지적한다. 두 황제의 공통점으로는 태양신 숭배와 황금시대관을 이야기하는데, 동서양을 함께 통치하여 새로운 황금시대를 이루려 했던 율리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기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고 율리아누스는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된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