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 해전 (Battle of Actium, BC 31년)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기원전 31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후의 아우구스투스) 간에 로마의 패권을 두고 겨룬 해전이다.

로마의 경우 해전에 상당히 취약했으며, 악티움 해전의 경우에도 ‘해전을 육전화’한 로마 식의 전투가 벌어졌다. 해전 자체는 별 특징이 없이 옥타비아누스 측의 승리로 끝났다.
기원전 31년 9월 2일에 그리스의 서북부 악티온 앞바다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시저)의 동방정책(특히 파르티아 공격)을 추진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부(富)에 주목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 로마 영토 키프로스섬과 크레타섬 등을 선물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이익을 무시하고 동방적 군주지배를 꿈꾸는 것을 비난하고 자기는 공화정치를 지킨다고 선언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온 연안의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는 패전하여 두 사람은 이집트로 피신하여 자살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지배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뒤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로의 발판이 되었다.
– 악티움 해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시작되는 날인 기원전 33년 1월 1일 원로원 연설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노예로서 로마의 자유와 영토 보전을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이두정이 기원전 33년 12월 31일 만료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선언한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 편의 인물인 가이우스 소시우스와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집정관에 오른다. 이들 중 소시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떠한 공직도 없는 민간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비난조의 연설을 하고, 옥타비아누스를 억압할 수 있는 내용의 법률을 제안한다. 다음 원로회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무장 경비원들과 함께 상원 의사당에 들어가 집정관들을 고발한다. 이러한 행위에 두려움을 느낀 안토니우스파 집정관들과 200명 이상의 원로들은 다음날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로 간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2년에 에페수스로 향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제공할 수 있는 800척의 함정 중 200척을 제공한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 내용을 의식한 아헤노바르부스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옥타비아누스 정벌에 클레오파트라를 제외시키려 했다. 그러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전쟁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군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다며 아헤노바르부스의 의견에 반대한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이집트를 방어하려면 그리스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막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여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요청을 거절한다.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이러한 판단으로 인해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등 저명한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의 진영에서 이탈한다.
기원전 32년 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아테네로 향하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옥타비아에게 공식적인 이혼 선언서를 보내라고 설득한다. 플란쿠스는 이제 옥타비아누스에게 베스타의 여사제들에게 맡겨진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확보해야한다고 간언한다. 신성한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감수하고서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신전에서 강제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확보하는데, 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선전전에서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에서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의 선언을 확증하고, 클레오파트라와 나란히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길 원하고, 로마 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알렉산드리아를 삼을 것이라는 내용을 발견해 선전에 활용한다.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자신의 영묘를 지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기원전 31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됨으로써 이전에 문제로 제기되었던 옥타비아누스의 법적 지위 역시 해결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론화함으로써 전쟁 명분을 확보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에 대한 법적 명분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 획득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삼두정치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민간인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보다 거대했지만, 병력들은 잘 훈련되지 않은데다가 일부는 상선의 선원들을 징발한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타렌툼이나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봉쇄하고자 했지만, 이집트를 방어가 주목적인 클레오파트라는 이탈리아를 직접 공격하자는 안토니우스의 결정을 무시한다. 기원전 32년 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의 파트라이에 사령부를 세워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암브라키코스만 남쪽의 악티움으로 사령부를 옮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동맹국을 여럿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갈등을 겪었던 헤로데는 유다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지원군을 물린다. 나바테아의 말리쿠스 1세 또한 동맹군에서 탈퇴하는데, 이는 이후 전략적인 영향을 미쳤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여름 악티움 주변에서 옥타비아누스와의 교전에서 몇 차례 패배한데 이어 안토니우스의 오랜 동료 델리우스, 갈라티아왕 아민타스, 파플라고니아의 데이오타로스 등이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망명한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진영에서 해전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후퇴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뜨리는게 목적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해전을 계속 이어간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대치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주력함인 안토니아스 호를 타고, 함대의 후방에 있는 암브라키코스만 입구에서 60척의 배를 지휘했는데, 안토니우스의 장교들이 전투에서 그녀를 소외시키기 위해 후방에 배치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안토니우스는 추격이나 후퇴에서 추진력을 얻기 위해 배에 돛을 달라고 명령한 적이 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이 추진력을 이용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재빨리 철수하곤 했다. 로마의 작가들은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쳤다고 적지만, 클레오파트라 군이 후퇴한 것은 적군의 봉쇄를 깨트리고 함대를 최대한 인양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그녀의 배에 옮겨탔는데, 안토니아스 호는 티리언 퍼플로 염색된 까닭에 쉽게 식별되어 두 사람은 전투를 피해 타이나론으로 후퇴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타이나론에 도착해 클레오파트라의 몸종들이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와 대화를 하라고 하기 전까지 클레오파트라와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악티움 전투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없이 9월 3일 아침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수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망명하였다.
–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옥타비아누스의 승리
서기 1세기 초 폼페이에 있는 주세페 2세 가문의 집에서 발견된 벽화로, 다이아뎀을 쓴 클레오파트라가 독약을 마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아들 카이사리온 역시 다이아뎀을 쓰고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지키고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테네를 점령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파라이토니온에 상륙한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키레네로 가서 증원군을 모집한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서 그리스에서의 마치 승리를 거둔 것 처럼 거짓말을 한다. 악티움 전투의 결과가 알려지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과거 아르메니아에서 사로잡아온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처형하고 그 목을 아트로파테네의 아르타바스데스 1세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안토니우스에 의해 임명된 키레네 총독 루키우스 피나리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사절단이 총독부에 도착하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절단을 처형하여 옥타비아누스의 곁으로 망명하는데 안토니우스가 얻고자 했던 자신 휘하의 4개 군단을 모두 데리고 갔다. 안토니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살하려하지만 참모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는 파로스섬에 인간혐오와 냉소주의 사상의 철학자 티몬의 이름을 따와 티모네이온이라는 오두막을 짓고 거기에 은거한다. 악티움 전투 이후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배신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헤로데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위해 로도스로 갔고 안토니우스에게서 받은 왕위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의 말과 충성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유대에서 왕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늦여름부터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리온에 대한 방해물로 여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지중해에서 홍해로 선단을 데려간 다음, 인도에서 회복할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말리쿠스 1세가 옥타비아누스 편인 시리아 총독인 퀸투스 디디우스의 조언대로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을 불태워 나바테아의 영토를 빼앗긴 것에 대한 해묵은 복수를 자행한 까닭에 클레오파트라는 떠나지 못한다. 이제 옥타비아누스의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 측에서 퍼뜨린 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시기에 클레오파트라는 죄수들과 하인들에게 다양한 독극물을 시험해보았다고 전해진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신전의 입단식을 통해 시민권을 획득하기 전 청년으로서의 의무가 부여되는 에페보스로 등록하는데, 콥토스에서 발견된 비석에 의하면 기원전 31년경에는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연대의 뜻으로 안토니우스는 풀비아에게서 낳은 아들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 역시 입단식을 통해 에페보스로 등극시켰다. 이즈음 계속 로도스에 머물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각각 사절을 통해 편지를 보냈는데, 클레오파트라만 답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집트를 상속하는 것을 허락할 것과, 안토니우스의 생존을 요구하며 상당한 선물을 보냈는데 만일 소원을 들어준다면 향후 더 많은 재화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부하인 티르소스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내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무덤 속에서 보물과 함께 분신자살하겠다며 협박한다. 티르소스는 살고싶다면 안토니우스를 죽이라고 조언하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안토니우스에 의해 곤장을 맞고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간다.
지리한 협상 끝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봄, 이집트를 침공한다. 새로운 동맹인 헤로데로부터 물자를 제공받기 위해 페니키아의 프톨레마이아스에서 잠시 머무른 뒤 곧이어 남쪽으로 이동하여 펠루시온을 빠르게 점령하는데, 동시에 키레네에서 동쪽으로 진군하던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파라토니온 근방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재빨리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해 도시의 경마장 바깥쪽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그새 돌아온 안토니우스에 의해 작은 패배를 맛본다. 그러나 8월 1일, 안토니우스의 해군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고 기병대가 그 뒤를 따른다. 클레오파트라는 측근들과 함께 무덤에 숨는데 이 때 안토니우스에게 목숨을 끊었다는 전서를 보낸다. 이에 절망한 안토니우스는 배를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어 53세의 생애를 마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숨이 붙은 채로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무덤으로 가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이 명예롭게 숨을 거두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동료중 가이우스 프로쿨레이우스는 믿을만한 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프로쿨레이우스가 사다리를 타고 무덤에 잠입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사로잡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보화와 함께 불타죽을 용기조차 없다고 비아냥댄 것이다. 이렇게 붙잡힌 클레오파트라는 호송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를 자신과 함께 이집트의 전통 장례법에 따라 안장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허가받는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들어가 왕궁을 점령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자녀들을 사로잡는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났을 때 “개선식 앞에 서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육성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생존은 보장하지만 이집트 왕국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이들을 사흘 뒤 로마로 이주시킬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처럼 개선식에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 생각하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노라 다짐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0일 39세의 나이로 자신의 무덤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인인 에이라스와 샤미온과 동행했으며, 이들도 같이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록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실에 분개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 옆에 왕의 위엄을 갖춘 채로 매장되었다 한다. 자살의 방법에 대해 주치의 올림포스가 직접 전하는 이야기는 없지만, 이집트 코브라에 물리는 방식으로 자살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는 몸에 독을 주입하기 위해 가시로 몸에 생채기를 냈다고 이야기하는데 비해, 디오 카시우스는 바늘로 독약을 주입했다고 말하고, 스트라보는 일종의 연고를 이야기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순간에 카이사리온을 상이집트로 보내기로 결심했는데, 아마도 쿠시나 누비아, 에티오피아, 혹은 인도로 도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등극한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주리라는 헛소문에 속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18일째 되는 날인 8월 29일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세상에 시저는 한 명만 존재해야한다는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모스의 조언을 이제 실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멸망하면서 아이깁투스 속주가 설립되고, 헬레니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기원전 27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하고 세력을 축적하여 초대 로마 황제로 제국의 시대를 연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