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과학의 미래 : 버트런드 러셀의 미래를 위한 과학 철학
버트런드 러셀 / 열린책들 / 2011.10.25
.과학기술이 권력화될 때 민주주의는 퇴보한다!
과학 문명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버트런드 러셀의 비판적 시각
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사상가이자 실천하는 지성, 버트런드 러셀이 1931년 세상에 내놓은 이 책은 수많은 미래 과학 소설가들을 경악시켰다. 전체주의가 자행할 인간성의 파괴, 그것을 조직적으로 가능케 할 과학 기술의 변절이 몰고 올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를 섬뜩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는 이 책으로부터 자양분을 먹고 걸작으로 자라났다.
철저한 반전주의자이자 사상의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고자 한 러셀에게 당시 유럽을 휩쓴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은 벗어나고 싶은 현재이자 암울한 미래였다. 자연의 이치를 조작하는 과학, 순수한 지식이 아닌 힘의 구현체로서의 과학이 전체주의와 결합해 탄생시킬 독재의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러셀은 과학을 구원하기 위한 철학을 선보인다.
○ 목차
서문
저자의 말
1부 과학적 지식
과학적 방법의 사례들
과학적 방법의 특징들
과학적 방법의 한계
과학적 형이상학
과학과 종교
2부 과학 기술
과학 기술의 시작
무생물계의 기술
생물학의 기술
생리학의 과학 기술
심리학의 기술
사회 속에서의 기술
3부 과학적 사회
인공적으로 창조된 사회들
개인과 전체
과학적인 정부
과학 사회의 교육
과학적 번식
과학과 가치
옮긴이의 말: 과학 기술의 현재와 미래, 한 위대한 철학자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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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B.A.W. 러셀)
철학자, 수학자, 사회운동가, 교육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영국 수상을 두 차례 지낸 존 러셀 경의 손자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10년에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출간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세계에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분석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논리학·인식론·존재론·윤리학·사회철학 등 철학 전반에 분석적 방법을 적용해 독창적 견해를 발표했고, 기호논리학도 확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전쟁과 징병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쫓겨나고, 6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1927년에는 아내 도라 블랙과 함께 영국에 진보적인 대안 학교를 설립했고, 1938년부터 하버드대, 뉴욕시립대 등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철학을 강연했다. 1950년에 『러셀 서양철학사』, 『인간 지식』, 『결혼과 도덕』 등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과학의 힘을 믿는 무신론자이자 개혁적 자유주의자인 그는 1955년에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고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러셀 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고, 각국의 과학자와 함께 군축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를 개설했다. 이후 ‘100인 위원회’를 결성하여 88세에 대중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고, 1963년에 ‘버트런드 러셀 평화 재단’을 설립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전쟁, 인도·중국 국경 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당대 많은 현안에 적극 참여했다.
주요 저서로는 『러셀 서양철학사』를 비롯하여 『철학의 문제들』, 『행복의 정복』, 『권력』,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러셀의 교육론』, 『자유와 조직』, 『러셀 자서전』 등 70여 권이 있다.
-역 : 석기용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언어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우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간 다수의 전문 철학서와 교양 인문서를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 『비트겐슈타인과 정신분석』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과학의 미래』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 『삶의 품격에 대하여』 『사이보그 시티즌』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일상에 숨어 있는 과학 기술의 힘, 그것이 권력화될 때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과학이 인류 문명을 진보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과학 기술이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쓰일 당시 유럽 사회가 전체주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우성과 열성의 유전자 법칙은 민족 배타주의의 훌륭한 이론이 되었고, 독재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합리화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행위는 자연선택설에 따르면 무척이나 과학적이다.
“정치학에 응용된 다윈주의는 과학적인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최적자 생존’이라는 구절은 사회적인 문제들을 고심하던 지식인들에게는 너무나 벅찼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적’이라는 단어는 윤리적인 함축을 갖는 것처럼 보이고, 그로부터 자기가 속한 국가, 종족, 그리고 집단이 필연적으로 최적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이 뒤따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이비 다윈주의 철학의 후광을 등에 업고 황화, 호주 사람들의 백호주의, 그리고 노르만족의 우월성 등과 같은 신조에 도달한다. 그러한 윤리적인 편향성으로 인해, 우리는 사회 문제들에 적용된 모든 다윈주의의 논증을 최대한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이 논증은 상이한 종들 간뿐만 아니라 동일 민족 내의 상이한 계급들 간에도 적용된다. 모든 다윈주의 저술가들은 전문가 계급에 속하며,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 계급이 생물학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 바로 다윈주의 정치학의 공인된 격률이다. 그로부터 그들의 자녀가 봉급 생활자의 자녀들보다 공공의 비용으로 더 나은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주장이 뒤따른다. 그런 식의 모든 논증에서 일상사에 응용된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특정 집단의 편견을 모양새 좋게 꾸미려는 의도로 과학의 언어 일부를 차용하는 경우가 존재할 뿐이다.” (256쪽)
과학 기술이 만들어 낸 미디어에 대해서도 러셀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미디어를 장악하면 독재는 언제든 가능하다. 강력한 선전 도구를 통해 획일된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획일성을 추구하는 데 이바지하는 현대 세계의 또 다른 발명품은 라디오이다. 물론 이 경우는 사업이 자유로운 미국보다는 정부가 사업의 독점권을 갖고 있는 영국에 좀 더 들어맞는다. 1926년의 총파업 기간에, 라디오는 소식을 전파하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수단이 되어 주었다. 정부는 이 수단을 정부 측의 입장을 전달하고 파업자들의 주장은 은폐하는 데 활용하였다.”(264쪽)
“우리는 영화를 통해 부유함은 높은 미덕이 된다는 것을 알고, 현실을 통해서는 밉살맞은 노인네가 부유함을 누린다는 것을 안다. 이로부터 밉살맞은 노인네는 덕스러운 사람으로 둔갑하고, 그가 피고용자들을 착취한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불평분자라는 얘기가 뒤따른다. 따라서 영화는 가난한 사람들의 시기로부터 부자들을 보호하는 데 유용한 역할을 수행한다.”(266쪽)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촉수가 닿지 않는 분야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일상에서 과학 기술은 작동한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무지를 밝히는 무형의 ‘지식’이지만 또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형의 ‘도구’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작동하는 과학 기술의 메커니즘을 소수의 지배층이 전유하면 독재와 전체주의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게 러셀의 경고이다.
“그의 읽을거리는 거대한 신문사가 제공한다. 그의 오락거리는 할리우드가, 그의 자녀 교육은 국가가, 그의 자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은행이, 그의 정치적 견해는 그가 지지하는 정당이, 그의 안전과 문화 시설은 그가 세금을 지불하는 정부가 제공한다. 따라서 그가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모든 활동에서 이제 그는 고립적인 단위체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 조직에 의존해 있는 존재인 셈이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부분의 조직이 최적의 수익 구조를 찾기 위해 조직의 규모를 키우고 있다. 아주 많은 측면에서 국경선은 기술적으로 불합리한 걸림돌이 되었으며, 지금보다 더 큰 진보를 원한다면 그런 경계선이 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불행히도 국가주의는 대단히 강력하다. 그리고 과학 기술이 민족주의적인 국가들의 손아귀에 쥐어 준 선전 기술의 증대된 위력은 그러한 시대착오적인 힘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런 사태가 해소되지 않는 한, 과학 기술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측면에서 이룩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들을 결코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270쪽)
그리하여 러셀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강력한 논지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과학이 실재의 완전한 지식을 제?할 수 없다는 것. 둘째, 과학이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의 우려는 과대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러셀의 통찰은 방향을 잘못 짚은 것인가? 러셀의 예언으로부터 80년이 지난 지금, 인류 사회가 러셀의 손바닥에서 얼마만큼 빗겨나 있는지 고민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백미일 것이다. 그의 아래와 같은 섬뜩한 경고가 단지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거리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그의 통찰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 유효한 것이다.
“조작과 개발은 전형적인 과학적 산업주의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열망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옹색한 문제에 집중하는 태도를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런 사람은 힘의 원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세상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기계주의의 광신자들에게 넘겨주고 만다. 오늘날 시대에 거대 사업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세계 변화의 힘은 과거에 몇몇 개인들이 가진 적이 있는 힘들을 훨씬 압도한다. 그들은 네로나 칭기즈칸처럼 자유롭게 사람들의 목을 자를 수는 없겠지만, 누가 굶주릴 것이며 누가 부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는 있고, 강의 흐름을 변경시킬 수 있으며, 정권의 몰락을 결정지을 수 있다. 모든 역사는 거대 권력에는 중독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다행히도 현대의 권력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확실히 인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그들 안에 자리 잡게 된다면 그때는 인간 독재의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216쪽)
.과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과학
이 책의 후반부는 소수의 과학 전문가들이 독재를 행사하는 비인간적인 세계에 관한 반(反)유토피아적 전망이 펼쳐진다. 반대 의견은 묵살되고, 노동자들은 강제로 불임이 되며, 개개인은 과학적 연구라는 미명하에 고문당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러셀이 전하고자 한 근원적인 교훈이 무엇인지가 매우 분명해진다. ‘과학적인 사회’는 모든 인간적 가치를 붕괴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권력은 부패한다. 특히 과학의 발전을 통해 엄청나게 증강된 권력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만 하는 인간적인 목적들을 무색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과학이 만들어 낼 디스토피아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방법은 없는가? 아이러니하지만 러셀은 그것 또한 과학이라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 철학과 역사의 확립이다.
러셀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역사에 대한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도자들이다. 러셀은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역사를 공부하여 인간성에 대한 온당한 존중심을 얻게 되는 그런 미래를 기대한다.
“세계 정부는 과거를 잘 모르고, 전통에 대한 애정이 없으며, 자기들이 무엇을 파괴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 통치의 목적은 단지 통치하는 사람들에게 쾌락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통치받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을 견디고 살 만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그 안에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과학 기술이 더는 온통 힘을 가진 사람들만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어도 이전의 모든 세대에게 익숙했던 진리들을 잊어버릴 정도까지 새로운 힘에 중독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지혜가 새로운 것은 아니며, 또한 모든 우둔함이 과거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연에 복종하도록 단련받아 왔다. 이러한 복종에서 스스로 해방된 인간은 주인으로 승격된 노예가 가질 수 있는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자연의 힘 앞에 복종해 온 그간의 태도를 인간이 가진 최고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체할 새로운 도덕적 전망이 요청된다. 과학 기술이 위험한 것은 바로 그러한 존중의 태도를 결여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 태도를 간직한다면 과학은 자연의 속박에서 인간을 풀려나게 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인간 안에 도사린 노예근성의 속박에서 인간을 풀려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꼭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희망을 품는 일은 최소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합리적인 태도이다.” (351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