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예언자들의 비장미(悲壯美)
문학이 추구하는 미적 범주 즉 아름다움의 범주는 숭고, 우아, 비장, 골계 등으로 나눈다. 문학은 예술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문학, 특히 가사(歌辭)에 드러나는 미는 크게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 등이다. 이러한 미적 범주는 대상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자연을 대상으로 해서는 다음과 같다. 자연의 조화와 질서를 본받는 태도로 대할 때 그 아름다움은 우아미로 나타나고, 자연의 조화를 현실에서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태도일 때 숭고미가 나타나며, 자연의 조화를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의지가 좌절될 때 비장미로 나타난다. 한편 골계미는 해학과 풍자 등 웃음을 유발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다. 고전문학의 판소리나 현대문학에서 김유정 문학 등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문학에서 비장미는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이상이 시련에 부딪혀 침해되고 멸망하는 과정 내지 결과에서 생겨나는 격렬한 고뇌 속에서 얻게 되는 미의식이다. 현실적인 것이 우세한 상황에서 그것에 정면 대항하여 이상적인 것을 끝까지 추구하려 할 때 나타난다. 슬픔, 고통, 절망 등의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때 잘 드러난다. 비장미는 이상적인 것의 우월성을 특성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것이 이상적인 것에 대해서 부정적 관계를 갖는 가운데, 이 양자가 대립하면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장미의 출발점이 되는 현실적인 것은 불만스러운 현실이다. 부당하게 억압되어 있는 생활, 용납할 수 없는 허위로 가득 찬 정치, 비인간적인 사회 등이다. 따라서 비장미는 체제 비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혹한 현실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현실 극복 의지에서 나타난다.(문학의 위상/박영민)
특히 성경 중에서도 구약의 16개 예언서들은 이런 비장미(悲壯美)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예언서를 읽을 때는 성경본문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시공간(時空間)의 문화적 간격을 고려하면서 모든 예언서의 역사적인 의미가 오늘 우리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발견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며 보면 왕정정치가 아니라 신정정치였다 그래서 사사들은 온 나라의 문제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리더가 되었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자기 직업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어느날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민족의 침입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왕권이 세워짐으로 해서 사유재신이 생기게 되고 부익부 빈익빈이 생겨서 족장공동체에서 해결했던 고아/ 과부/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오경/예언서/성문서등으로 구분하는데 특히 예언서에는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쏟으며 강렬하면서도 직설적인 설교를 한 사회정의 예언자들은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아모스, 호세아, 제1이사야, 미가가 있었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실망한 예언자들은 가슴을 치며 울며불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외친 주전7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활동했던 예레미야, 스바냐, 나홈, 하박국등이 있었다. 식민지살이의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승화시킨 바벨론에서의 예언자들은 에스겔과 제2이사야가 있었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새로운 제국 페르샤 지배하에 무너진 신앙 유대공동체를 세우려는 학개와 온고지신의 스가랴가 있었다. 유대주의 여명기에 두 얼굴 보편주의와 배타주의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말라기, 제3이사야, 오바댜, 요엘, 요나가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고 어떠한 위협과 박해, 도전에도 불굴의 삶을 통해 응답했던 구약의 예언자들의 생생한 말씀 선포을 했다.
짧은 지면을 통해서 예언자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언자(Prophet)라는 정의를 집고 넘어가고 싶다. 이 말은 헬라어 “프로페테스”(prophetes)에서 왔다. “프로”(pro)라는 접두어에 “말하는 자”(phetes)라는 말이 합성 되어 이루어진 단어이다. 헬라어 “프로”는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시간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였다. 그래서 “프로페데스” “미리 말하는 자”의 의미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접두어 “프로” “누구를 대신한다”뜻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프로’는 장소의 의미도 있다. 이 경우는 “어느 자리에서 말하는 자”가 된다 즉 예언자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인 것이다(암7:10-17; 렘7:1-15) 구약의 예언은 한 마디로 예언(預言)이지 예언(豫言)이 아니다. 예언(預言)이란 신탁이다.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성서의 예언(預言)인 것이다.(왕대일/신앙공동체를 위한 구약성서 이해)
에언하면 흔히 앞날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말해 주는 정도로 생각해 왔다. 그러던 것이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이 여러가지 은사를 강조하게 되면서 사도 바울의 “예언 은사”(고전12:10)를 이런 맥락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왜곡된 의미에서의 예언은사, 예언기도가 우리 교회의 밑바탕 속에 은밀하게 파고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의 예언은 신,구약을 통털어서 “장래일을 미리 말한다”는 차원의 예언(豫言)이 아니다. 성서의 예언(預言)은 “내게 맡겨주신 말씀을 전한다”는 차원의 예언(預言)이다. 은행에 돈을 맡기듯이(預金)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 “하나님이 말씀을 맡겨 주셨다”는 의미의 예언(預言)이다.
히브리 예언의 특징을 “앞날의 일을 미리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전파하라고 맡겨주신 말씀을 예언자(預言者)가 대신해서 선포하는 행위였다. 예언자의 예언은 “내일 일을 미리 말하기”(foretelling)라기 보다는 “앞장서서 말하기”(forthtelling)이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상 그는 백성 앞에 서서 인생을 담보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이 전파하라고 맡겨주신 말씀을 선포할 수 밖에 없었다. 예언자들의 관심사는 미래가 아니었다 바로 심혈을 기울려 탐구하던 시간은 바로 “오늘”이라는 현재이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까닭은 오직 현재를 결정짓기 위함이었다. 지금 여기서의 회심을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타락한 현존을 버리고 새현존을 선택하라(겔36:25-27) 그것이 예언자들이 기울였던 궁극적인 관심사였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세월호참사에 대한 반응과 대처하는 방법을 두고 기독교계에서 이런저런 말들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다 사건을 해결하는 정부의 미숙함과 책임감없는 후속대책들을 보고 실망감과 자괴감으로 상처라는 트라우마에 온 국민이 같혀 있다.
특히 일부 목회자들의 무책임하게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온갖 작태들은 망말수준을 뛰어 넘는 발언들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이 불국사나 가지 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느냐?’ 혹은 ‘국민이 미개하다는 말은 틀린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에 기회를 주기 위해서 아이들을 죽였다’ 는 식의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다 대형교회 장로인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의 교회강연이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기독교는 바닦을 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왜곡이든 아니든 문제는 우리들의 아픔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필자는 물론이거니와 교회지도자들의 바른 예언(預言)의 모습이 아쉬울 뿐이다.
필자가 15년 전 교단행사로 로마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아내와 함께 단 둘이 베드로 성당과 일반 성지순례에서는 방문하지 않는 바울기념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베드로 성당입구에 들어 섰을 때의 놀람과 아픔이 몰려오는 중압감(重壓感)에 괴로워 했던 신앙의 아픈 추억이 있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 말로 비탄(悲歎)이란 뜻이다. 또 기독교 예술 주제 중 하나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시신을 안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14세기 독일에서 처음 나타나 많은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비장미, 성(聖)과 속(俗)의 일치, 극한의 모성 등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장 유명한 피에타로상징되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돼 있는 조각상을 감상했었다.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 성모 마리아의 어찌보면 담담해 보이는 얼굴은 아들 잃은 어미의 참척(慘慽)을 역설(逆說)하고 있다. 그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이미 숨진 것이다
팽목항, 진도의 실내체육관, 단원고와 병원들에서 수백의 피에타가 현신했다. 숨진 아이를 보던 아버지는 “우리 애가 추운데 양말까지 젖었다. 양말 벗겨달라”고 부탁했단다. 어머니는 “시신을 건질 때마다 게시판에 인상착의를 아디다스, 나이키, 폴로 등 다들 상표로 하더라. 내가 돈이 없어 우리 애는 그런 걸 못 사줬다. 그래서 우리 애를 못 찾을까 걱정돼 나와 있다”고 했단다.
세월호와 줄줄이 총리후보자들 낙마의 뉴스를 보며 가슴 치는 이들 모두 피에타를 보고 있다. “얘들아, 미안하다”고 통감하는 모든 이들과 필자가 다녔던 신학교의 교가 후렴구인 ‘그 이름 예언자! 예언자! 예언자!!’ ‘그 이름 전도자! 전도자! 전도자!!’ 를 잊어버리고 올곧게 예언하지 못하는 목레기는 아닌지 자신을 반문하면서 나 자신에게 모차르트 <레퀴엠 D단조(K.626)> ‘라크리모사(Lacrimosa·눈물의 날에)’를 들려주고 싶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