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 창비 / 2018.4.20
유홍준의 입담으로 되살려낸 조선 제일의 천재 추사 김정희
– 200년 전 중국과 일본을 사로잡은 ‘한류의 원조’ 유럽에 다빈치가 있다면, 우리에겐 추사 김정희가 있다!
한국 인문서를 대표하는 독보적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저자 유홍준 교수가 방대한 자료와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담은 『추사 김정희: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를 펴냈다. 그동안 우리 문화유산만큼이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한국 문화사의 거인 추사 김정희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다. 추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쏟아지고, 그의 작품들이 줄줄이 보물로 지정되며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단편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추사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역작이다. 탄생부터 만년까지, 주인공의 일대기를 좇는 전기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간 파편적으로 이해되어온 추사의 삶과 예술, 그리고 학문을 총체적으로 그려낸다. 대갓집 귀공자로 태어나 동아시아 전체에 ‘완당바람’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하던 추사가 두 차례의 유배와 아내의 죽음 등을 겪고 인간적·예술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 역사소설처럼 흥미롭게 펼쳐지는 한편, 그 속에 녹아든 추사 학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여느 학술서 못지않게 탄탄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전공자가 읽으면 학술이 되고 일반 독자가 읽으면 문학이 되는’ 잘 쓰인 교양서다. 책에 실린 280여 점의 도판은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이다. 『세한도』,『불이선란』 등 기존의 대표작뿐 아니라 『침계』,『대팽고회』,『차호호공』 등 최근 보물 지정이 예고된 작품들과 그 제작 경위까지 상세히 실려 있어 도판만 따라 읽어도 추사 예술세계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고, 추사체의 변천을 비롯한 추사 예술의 흐름까지 한눈에 알 수 있다. 혹은 학자로, 혹은 예술가로, 혹은 정치인으로, 다양한 분야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불세출의 천재 추사 김정희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예술사적 지평을 넘어 조선 후기의 문화와 격동의 역사까지 함께 들어온다.
– ‘세한도’와 ‘추사체’를 넘어 추사 학예의 실상과 마주하다
추사 김정희 하면 흔히 추사체를 떠올리지만 추사체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추사체라고 불리는 글씨들의 형태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네 살배기 아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쓴 글씨는 더없이 반듯하지만 노년의 외로움을 담은 시축에는 처연한 감성과 허허로움이 넘쳐난다. 같은 글자임에도 유배 직전에 쓴 대둔사 『무량수전』 현판은 ‘난자완스’처럼 기름기가 넘치고 유배 시절에 쓴 은해사 『무량수전』 현판은 ‘칼국수 국숫발’처럼 뼛골의 힘이 살아 있다. 따라서 추사의 개성적인 글씨, 즉 추사체를 이해하려면 먼저 추사가 어떤 삶의 경험과 조건 속에서 그 글씨를 썼는지 알아야 한다. 이는 비단 서예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추사와 연경학계의 교유를 모르고서는 추사 학문의 기반이 왜 경학과 고증학, 금석학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추사가 겪은 삶의 고난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예술세계가 어째서 그토록 급격하게 바뀌었는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전기 문학의 형식을 통해 추사의 인간상과 작가상을 강조한 이 책은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다. 역사적 사실에 재미와 감동을 버무리는 유홍준 교수의 탁월한 필력은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하여, 지난한 삶의 기복 속에서 추사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저자의 안내대로 추사의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추사 학예의 실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 까칠한 천재는 어떻게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나?
이 책은 추사의 생애를 총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1장에서는 왕가의 사돈집인 월성위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나 신동으로 촉망받던 어린 시절이 그려지고, 2장에는 갓 생원시에 합격한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연경을 방문하여 옹방강, 완원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담았다. 3장 ‘학예의 연찬’은 추사가 연경에서 귀국한 이후부터 대과에 합격하기 직전까지의 내용으로 연경학계와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청나라 학문의 신사조였던 고증학, 금석학을 들여와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무장사비 등 추사가 조선의 옛 비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경위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4장과 5장에는 추사가 서른넷 젊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고 빼어난 기량으로 학문과 예술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며 ‘완당바람’의 주역으로 서는 모습을 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오만으로 비칠 만큼 자신만만한 성격과 날카로운 독설로 미움을 사는 일이 많았고, 예술이나 학문 면에서도 중국의 것을 답습하거나 조금 변형하는 수준에 그쳤다. 추사가 인생관의 대반전을 이루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계기가 된 것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였다. 6장 ‘세한도를 그리며’와 7장 ‘수선화를 노래하다’는 이때의 이야기로, 탱자나무 울타리에 고립된 채 끊임없는 질병의 고통과 싸우던 추사의 외로운 나날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8장에서는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가 오늘날의 용산 근처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수많은 명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강상시절을 다룬다. 추사 글씨의 최고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잔서완석루』와 거의 신품의 경지로 평가받는 『불이선란』 등이 모두 이 시절의 소산이다. 이처럼 궁핍한 처지에도 독서와 서화로 유어예(遊於藝)하던 추사에게 날벼락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오랜 벗 권돈인을 둘러싼 정쟁에 휘말려 차디찬 북청 땅으로 유배된 것이다. 9장에서는 북청 유배시절 자작나무 굴피집에 살면서도 벗들과 어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유적지를 답사하고 시와 글씨를 지으며 마음을 잃지 않았던 추사의 일상을 차분히 추적한다. 마지막 10장에는 해배되어 과천의 한 초당으로 들어간 추사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범성과 보편성의 가치와 관용의 미덕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과 예술 모두를 원숙한 경지로 마무리해가는 과정이 담겼다. 결국 추사는 고된 삶의 과정 속에서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하고, 이로써 우리 문화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예술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우리 문화사의 자랑, 추사 김정희
추사는 단순히 유명한 서예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서예뿐만 아니라 경학·금석학·고증학·시문·다도·미술품 감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한 국제적인 학예인이었다. 학문 면에서 추사는 당시 학문의 신사조이던 청나라의 고증학과 금석학을 들여와 조선의 현실에 적용했고, 치열한 자기화 · 토착화 작업을 통해 조선에서 이룩한 성과를 다시 연경에 전함으로써 조선과 중국 학계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철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는 “청조학 연구의 제1인자는 추사 김정희”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예술 면에서 당시 추사가 차지했던 국내외적 위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200년 전 중국과 일본에 첫 한류를 일으킨 그의 글씨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림에 있어서도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와 비견될 만큼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조선·청나라·일본 할 것 없이 추사의 글과 글씨를 갖고자 하는 문인·학자들이 줄을 이었다. 청나라 문인 정조경이 추사를 만나 인사드리는 장면을 상상해 그린 〈문복도〉는 당시 추사의 국제적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처럼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세계를 무대로 학문과 예술을 전개하여 높은 성과와 인기를 얻은 추사의 삶은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랑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답사기’ 시리즈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워왔듯, 이 책 『추사 김정희』역시 한국 문화사를 대표하는 위인 추사 김정희를 제대로 알게 하는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답사기’ 유홍준 교수의 30년 추사 공부를 담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시대 서화 연구자로서 유홍준이 오랫동안 넘고자 했던 산이었다. 1988년 성균관대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추사 김정희론을 연구 주제로 삼은 그는 2002년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아 『완당평전』(전3권)을 펴냈고, 그 후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추사를 주제로 강의하며 대중에게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전파해왔다. 그리고 2018년, 추사 김정희에 대한 30년간의 도전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2006년 절판시켰던 『완당평전』을 다시 꺼내들었다. 출간 후 논란을 낳았던 오류들을 모두 수정하고 새롭게 발견된 작품이나 내용들도 추가했다. 전문적·학술적인 이야기는 과감하게 덜어내 분량을 대폭 줄이고, 특유의 편안하고 유쾌한 입담을 더해 가벼운 대중서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그렇게 탄생한 이 책 『추사 김정희』는 탄생부터 만년까지, 파란 많은 일대기를 중심으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알기 쉽게 풀어놓은 역작이다. “명작은 명작으로, 대가는 대가로 통한다”는 말처럼 유홍준이 풀어내는 추사 김정희는 분명 다르게 읽힌다.

○ 목차
서장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제1장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제2장 감격의 연경 60일
제3장 학예의 연찬
제4장 출세와 가화
제5장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제6장 세한도를 그리며
제7장 수선화를 노래하다
제8장 강상의 칠십이구초당에서
제9장 북청의 찬 하늘 아래
제10장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종장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후기 『완당평전』에서 『추사 김정희』로

○ 저자소개 : 유홍준 (Yu Hong-june, 兪弘濬)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인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1985년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십여 차례 갖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았다. 영남대학교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학교 교수 및 문화예술 대학원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제주 추사관 명예관장도 맡고 있다.
평론집으로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답사기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10, 일본편 1~4), 미술사 저술로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전2권), 『완당평전』(전3권),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추사 김정희』 등이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저작상(1998),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했다.
○ 추천평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나라 안팎으로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자신은 늘 한국미술사 연구자로 자칭하며 자부해왔다. 일찍부터 추사를 연구하여 드디어 『추사 김정희』를 완성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추사가 단지 미술가가 아니고 한국과 동아시아의 지성사에 우뚝한 위인이듯이, 유홍준의 전기 역시 미술사의 국한을 훌쩍 넘는다. 온갖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의 궁금증을 탁탁 짚어내는 ‘답사기’ 저자의 공감능력도 여전하고 그 이야기 솜씨는 장편서사의 규모를 얻었다. 한국 전기문학의 몇 안 되는 고전으로 남으리라 믿는다. – 백낙청(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예전에 내가 우전 신호열 선생께 직접 들은 말이 있다. “추사가 등장한 이후 우리나라 서화 값은 추사가 기준이 되었다.” 추사는 고품질의 문화적 가치를 창출한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위당 정인보 선생의 『완당전집』 서문에서 눈여겨본 대목이 있다. 세상이 추사를 높이 아는 것은 오직 서예이고 좀 나아가면 고증학을 말하는 정도라 한다. “서예와 고증학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 중시할 뿐 그 ‘참’을 터득한 자 과연 몇이나 될까-” 유홍준 교수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하면서 『완당평전』을 세 권으로 엮어냈고 16년이 지났다. 그사이 공부를 더 깊게 하고 정수를 뽑아 한 권으로 이 책을 간행하니 실로 기대되는 바 크다. – 임형택(성균관대 명예교수)
인문학 공부의 최종 목적지는 평전이다. 노성한 학자의 경지에 이르러야 제대로 쓸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종잡기 힘든 추사의 생애와 예술과 학문을 삶의 경로에 따라 요령있게 안내하였다. 거장 추사의 세계를 한 권의 평전에 농축하여 쓴 수락석출(水落石出)의 저술로 평전의 모범으로 기억될 것이다. – 안대회(성균관대 교수)

○ 독자의 평 1
‘불계공졸(不計工拙)’은 “잘되고 못되고가 가려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추사가 추구한 무심한 예술의 경지를 나타냅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한국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국보 180호에 지정된 <세한도>가 요즘 교과서에는 어떻게 실려 있고, 선생님들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요. 제가 교과서에서 봤던 것처럼 다른 분들도 대개 고졸한 풍경의 집과 나무를 떠올리실 겁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대부분의 이미지도 그렇고요. 그러나 이 그림의 반만 보고 평가하는 100프로 잘못된 감상입니다. 이 그림과 같이 있는 추사의 글씨까지 전체를 봐야 합니다.
“<세한도>는 구도와 묘사력 따위를 따지는 화법만이 아니라 필법과 묵법의 서법까지 보아야 제맛과 제멋과 제 가치를 알 수 있다. 또 ‘세한도’라는 화제 세 글자와 ‘우선시상 완당(藕船是賞阮堂)’이라는 낙관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면서 그림의 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중략)… 이 <세한도>에서 더욱 감동적인 면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세한도>의 진가는 그 제작 경위와 내용, 그림에 붙은 글씨의 아름다움, 그리고 갈필과 건묵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에 있다. 즉 그림과 글씨와 문장이 고매한 문인의 높은 격조를 드러내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즉, 추사가 누누이 강조한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보여줍니다. 한국 문인화의 최고봉이라는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한도>가 그려진 이후 사연도 이 그림의 진가를 알려줍니다. 그런 평가가 나오기까지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하겠군요.
추사는 어려서는 북학파의 석학 박제가의 제자였지요. 박제가는 청나라 연경을 자주 오가며 그곳의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추사와 중국 학자들 간의 다리를 놓아주었죠. 부친 김노경이 외교사절로 연경으로 갈 때 추사도 함께 가 청나라 학자들과 본격적으로 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조 문화의 일인자 평을 듣고 있는 운대 완원과 담계 옹방강을 평생의 스승으로 만납니다. “추사는 옹방강과의 만남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갖게 되었죠. 이들의 엄청난 자료와 저술들을 보았고 평생 교류하게 되는데, 이후 추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하는 계기, 학식의 정확한 토대를 세우는 학문의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추사의 학문세계는 그가 1816년 31세 지은 책 제목 ‘실사구시설’로 요약됩니다. ‘실사구시’를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내건 명구로 생각하는데, 그 구호는 “청나라 고증학의 개조인 고염무가 주창한 캐치프레이즈”로,『한서(漢書)』에 나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라는 표현이 연원입니다. 1811년에 옹방강이 추사에게 ‘실사구시’라고 써서 보내준 편액도 있습니다.
추사는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송나라로 나눌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라고 합니다. 이것과 더불어 추사는 고증학의 기본 정신이라고 할 ‘입고출신(入古出新, 옛 것에서 새로움이 나온다)도 강조하지요. ‘실사구시’와 ‘입고출신’은 추사 평생의 정신이며 그의 학문을 설명합니다. 추사는 음운학·천문·경학·역사지리학·주역·노장·불교와 시·문장·서예·전각 등 전방위로 공부했고 연결할 줄 알았으며, 글씨도 전·예·해·행·초서에 통달해 자유자재로 썼습니다. 추사의 개성과 파격은 중국 서예사 2천 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뛰어넘은 듯하지요. 그래서 ‘괴(怪)’하다는 평이 격찬으로도 험담으로도 추사 생전 내내 따라다녔죠. 그러나 후대에 청조 고증학을 연구하던 후지쓰카 지카시는 추사를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고 평했고, 중국의 학자들도 추사가 중국의 학자였다면 제일가는 명필로 꼽혔을 거라 말하죠. 우린 이것도 알아야 합니다. 추사는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부단한 노력으로 스스로 선 천재라는 것을.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칠십 평생에 나는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평생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하여 모질게 정체(精彩)를 쏟아나가면 구천구백구십구 분은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나머지 일 분이 인력(人力)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하는 거라네.”
(석파 이하응(흥선대원군), 역매 오경석 같은 제자에게 수련을 강조하며 한 말)
추사가 일곱 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채제공이 예언하기도 했듯이 추사는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더 화를 당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고 벗과 제자를 돕고 가르치는데 아낌없는 그였지만, 완벽주의자이고 너무 똑똑해 성격이 원만하지 않은 것도 있어 적도 많이 만들어 조정에서 안동 김 씨의 세력이 커질 때마다 고초를 당했죠. 그래서 제주도와 북청으로 유배를 두 번이나 가게 되지요. 이쯤에서 추사 생애를 보는 구분을 좀 볼까요.
1786~1809년(1~24세): 출생부터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1809~19년(24~34세): 대과에 합격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1819~40년(34~55세): 출세해서 관직에 있는 21년간의 중년기.
1840~49년(55세~64세):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1849~56년(64~71세):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1849~51년(64~66세): 해배 후 용산에 살던 2년 반의 강상시절
-1851~52년(66~67세): 북청에 1년간 유배된 북청 유배시절
-1852~56년(67~71세): 해배 후 서거까지 4년의 과천시절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제자 이상적이 연경에서 많은 책을 구해 제주까지 보내주는 정성에 감격해 헌사한 작품이지요. 이상적은연경에 갔을 때 오찬 자리에서 <세한도>를 16인의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여줬고, 추사의 명성을 익히 아는 이들이 시나 문장으로 제(題)와 찬(贊)을 붙였지요. 이것을 이상적은 표구를 하게 되는데 <세한도>는 원래 크기 23.3×108.3cm에서 「청유 16가의 제찬」이 붙은 이후로 지금은 14m가 넘는다고 합니다. <세한도>는 추사의 지인뿐 아니라 문인들도 여럿 따라 그릴 정도였고 매너리즘에 빠진 당대에 새로운 문인화의 예가 되었습니다. <세한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기까지의 드라마 같은 사연은 책에서 확인해 보세요. 이 작품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일 수밖에 없는 사연이 절절합니다.
제주 유배는 추사 인생과 글에서 매우 큰 변곡점이었습니다. 추사체를 잘 아는 박규수, 청명 선생과 동주 선생의 평처럼 전한 시대 예서부터 왕희지, 구양순, 옹방강 등 서학(書學)을 연구하고 임모(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하며 자신의 서체를 만들어온 추사가 진정한 추사체를 완성하는 ‘입고출신’을이뤄낸 것이 제일 큰 성과겠죠. 삶과 앎의 어우러짐을 깨달은 추사가 유배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해야 될 이들에게 찾아가는 모습은 정말 훈훈했습니다. 그러나 9년의 유배 기간 동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한 차례 더 유배 생활을 했던 것, 그가 죽기 전까지 부친과 자신의 사면 복권을 보지 못한 건 안타까웠습니다. 추사가 죽는 날까지 ‘실사구시’와 ‘입고출신’의 정신으로 공부하고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건 어려울 때에도 함께했던 인복 덕도 있었다고 생각되더군요.
책 가득한 추사의 글씨와 변천사, 그의 그림 중 특출난 난초 그림 비롯 각종 편지들, 그의 교우 관계와 인생 이야기, 영향을 받은 중국 서예 자료들과의 비교 등을 풀어놓는 유홍준 선생의 글이 물 흐르듯 흘러 일목요연하게 잘 이해됐습니다. 추사에 대한 자료 조사가 여전한 와중에 주석과 고증으로 가득한 책은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미흡함과 오류가 많았다고 밝히신 유홍준 선생의 전작 『완당평전』이 이 책의 ‘입고출신’ 계기가 된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학문과 예술, 추사의 작가성과 인간성을 다 잡은 이 전기 형식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백벽(百蘗)’의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추사에 대한 도전이 끝은 아니시겠지요. 학문과 예술을 별개의 것으로 보거나 예술을 그저 기술이나 재주, 위안거리로 여기는 세태에서 추사는 얼마나 귀감이 되는 존재인지!
기백 넘치고 유려하던 추사의 글씨와 너무 달라 마지막 글씨 <판전(板殿)>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진정 ‘불계공졸’로 받아들일만 한가 의문이었는데, 유홍준 선생 해석 이상으로 생각하기 어렵겠기에 끄덕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쓰실 추사 책도 기다리겠습니다.
○ 독자의 평 2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의 김정희 평전.
특유의 필력으로 옛날 이야기하듯이 추사의 삶을 집대성하였다.
추사는 단순한 명필이 아니었다.
文,史,哲과 詩,書,畵에서 최고의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책에는 거의 두페이지에 하나꼴로 추사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이렇게나 많다는데 좀 놀랐다.)
그런데, 그 작품마다 같은 글씨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전서,해서,행서,초서,예서를 시대에 따라 용도 목적에 따라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서체를 보여준다.
‘일금십연재(一琴十硏齋)’, ‘진흥왕 순수비’ 비각,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의 글씨는 ‘그 시대에 이런 글씨를 어떻게 쓸 생각을 했을까’ 할 정도로 요즘 나오는 폰트와 비교해도 세련됨과 참신함이 손색 없다.
추사체는 그의 특정한 서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그가 쓴 모든 글씨를 ‘추사체’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책에서는 제주도 유배 시절 추사체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추사에 대해서는 이 책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책 속에 수록된 작품만 둘러봐도 눈호강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 독자의 평 3
책 속 추사의 글씨를 보고 있노라니 옆에서 이를 본 사람이 문득 말한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따지면 캘리그래피 같은 거네요.” 듣고 보니 그러하다. 문외한이지만 추사체로 쓰여진 글씨를 보면 현대 디자인의 공간감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책 <추사 김정희>에서는 그러한 추사의 글씨를 작은 사진 크기에 그치긴 하지만 연대기 순으로 넉넉히 볼 수 있다.
당대 석학들과 교류한 것은 저자인 유홍준 교수도 누구 못지않으니 저자의 글을 통해 듣게 되는 진짜배기 ‘전문가’들의 말씀이 인상적이다. 평론도 그래서 예술이라고 하나 보다.
이쯤에서 추사체의 특질에 관한 논의를 끝맺을 수도 있으나 그래도 의문으로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유배지에서 마음을 다스린 결과가 하필이면 왜 사람들이 괴(怪)라고까지 말하는 형태로 나타났느냐 하는 것이다.
평소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1990년 동주 이용희 선생이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미술사 연속 특강을 하셨을 때 넌지시 이에 대해 여쭌 적이 있다. 그때 동주 선생은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요”라며 얼핏 떠오르는 생각을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심 ‘무릎을 치게 하는 탁견’이라고 감탄했다.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 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 제주도에서도 왕이건 친구건 제자건 관리건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특이하고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언젠가 조용필씨가 갈수록 노래 실력이 느는 것 같아 기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지금도 매일 연습을 몇 시간씩 한다는 얘기를 한 다음이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가성비’의 시대에, 이런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쉬이 넘기면서도, 잠시 머뭇거리며 돌아보게 된다.
추사는 훗날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칠십 평생에 나는 벼류 열 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유 교수의 책이니만큼 읽는 재미는 기본적으로 보장. 책을 읽고 추사의 실제 글씨를 보러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이나 제주 추사관을 한번 가볼 참이다.
○ 독자의 평 4
한국 인문서를 대표하는 독보적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저자 유홍준 교수가 방대한 자료와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담은 <추사 김정희: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를 펴냈다. 추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쏟아지고, 그의 작품들이 줄줄이 보물로 지정되며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단편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추사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역작이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시대 서화 연구자로서 유홍준이 오랫동안 넘고자 했던 산이었다. 1988년 성균관대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추사 김정희론을 연구 주제로 삼은 그는 2002년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아 <완당평전>(전3권)을 펴냈고, 그 후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추사를 주제로 강의하며 대중에게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전파해왔다.
<완당평전>이 출간되면서 추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만, 유홍준 교수는 학계에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고문헌 연구가인 박철상 박사는 <완당평전>을 분석한 결과 오류 200여 개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유홍준 교수는 <완당평전>을 절판하고, 2006년 분량을 3분의 1 정도로 줄인 전기 <김정희>를 새롭게 내놨다. 하지만 이 책도 수명이 길지 않았다. 추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료가 끊임없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신간 <추사 김정희>는 유홍준 교수가 12년 만에 선보이는 <김정희> 개정판이라 할 만하다.
추사의 생애를 총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탄생부터 만년까지 주인공의 일대기를 좇는 전기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간 파편적으로 이해되어온 추사의 삶과 예술, 그리고 학문을 총체적으로 그려낸다.
대갓집 귀공자로 태어나 동아시아 전체에 ‘완당바람’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하던 추사가 두 차례의 유배와 아내의 죽음 등을 겪고 인간적. 예술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 역사소설처럼 흥미롭게 펼쳐지는 한편, 그 속에 녹아든 추사 학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여느 학술서 못지않게 탄탄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전공자가 읽으면 학술이 되고 일반 독자가 읽으면 문학이 되는’ 잘 쓰인 교양서다.
추사는 단순히 유명한 서예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서예뿐만 아니라 경학, 금석학, 고증학, 시문, 다도, 미술품 감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한 국제적인 학예인이었다. 학문 면에서 추사는 당시 학문의 신사조이던 청나라의 고증학과 금석학을 들여와 조선의 현실에 적용했고, 치열한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통해 조선에서 이룩한 성과를 다시 연경에 전함으로써 조선과 중국 학계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았다.
당대 시인 신서희는 “추사는 본디 시와 문장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됨으로써 그것이 가려지게 되었다”고 평했고, 차 분야에서는 다산, 초의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다성으로 꼽히고, 고증학과 금석학에 조예가 깊어 일본 학자가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라고 결론을 내릴 정도이니, 그의 활약상을 일일이 적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추사는 만년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사자는 코끼리와 싸울 때도 온 힘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온 힘을 다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추사를 타고난 천재라고 말하곤 하지만 추사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추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었습니다.” 실로 자랑스러운 고백이다. 추사는 이처럼 무서운 장인적 수련과 연찬을 거쳤다
책에 실린 280여 점의 도판은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이다. <세한도> <불이선란> 등 기존의 대표작뿐 아니라 <침계> <대팽고회> <차호호공> 등 최근 보물 지정이 예고된 작품들과 그 제작 경위까지 상세히 실려 있어 도판만 따라 읽어도 추사 예술세계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고, 추사체의 변천을 비롯한 추사 예술의 흐름까지 한눈에 알 수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