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지금은 변화 할 때입니다(2)
– 고후 3:12-18 –
오늘 성경의 본문은 구약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내려 왔을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말할 때에 그들은 그의 얼굴에서 영광을 볼 수 있었고 그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영광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백성을 가르치고 나서 그는 곧 수건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사라질 영광의 끝자락을 보지 못하게 수건으로 가리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로부터 나온 광채를 보면서 모세를 우상으로 섬길까봐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사실 이단을 누가 만드는가? 하면 스스로 이단이 된 사람도 있지만 주로 이단은 추종자들이 만듭니다.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신비스럽게 생각하고 또 그가 말한 것을 우상화하면서 이단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지도자가 어디에 갈 때에 평소에 막히던 길이 안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이러면 추종자들이 우리 “지도자가 길을 가니까 다른 차들이 다 비켜주었다”라고 말을 만듭니다. 그런 이야기를 몇 번 지도자가 들으면 처음에는 우연이다 싶다가도 주변에서 우상화를 시키면 스스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 내가 메시야일지도 몰라~”나도 어떤 날엔 길이 하나도 먹히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말입니다.
모세가 그렇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행해서 모세를 거의 교주처럼 따르는 백성이 하나 둘이 아닌데 모세의 머리에서 광채가 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가 아무리 거부를 해도 그는 추종자들이 교주로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곧 사라질 광채가 보이지 않게 수건으로 가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건이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덮여져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모세가 가린 그 수건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수건이 덮여져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메시야를 메시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5절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종말론이 극성을 떨면서 가장 큰 문제는 종말과 심판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히 심판이 있고 종말이 있는데 하도 이상한 종말론이 설치니까 막상 종말론이 올 때에 외쳐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하도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쳐대니까 사람들이 구원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수건으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던 시대에 메시야가 왔다. 바리새인도 학자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눈에 수건이 덮여져서 바로 옆에 두고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덮여져 있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수건을 벗게 되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왜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가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나의 생각에, 나의 눈에, 나의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수건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나의 고정관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깨트리지 못합니다. 나의 고정관념으로 매일 똑 같은 것을 보고 생각하니 변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쉽게 한 단어로 표현하면 고집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고정관념입니다. 이 고정관념에는 편견도 들어가고, 선입견도 들어가고,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경험도 포함됩니다.
어떤 교회는 저녁예배를 드리다가 오후예배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에 몇 명의 성도는 어떻게 예배시간을 바꿀 수 있느냐고 하면서 지금도 한 분은 저녁 7시에 나와서 혼자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고정관념입니다. 저녁 7시에 예배드리는 것이 진리입니까?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고정관념입니다. 우리는 고정관념을 진리처럼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우리의 변화를 스스로 막고 있으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합니다. 필름카메라를 고집하는 분들은 지금도 필름카메라를 사용하면서 어떻게 사진을 디지털로 찍어 보정을 할 수 있는가라고 분개를 합니다. 고정관념입니다. 유명한 필름 회사였던 코닥이 파산하는 것을 보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필름 즉 아날로그를 고집하다가 늦게서야 디지털로 전환하는 도중에 자금이 부족해 파산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코닥은 자신들의 필름이 최고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 고정관념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데 돌이 떨어져서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갔는가? 그게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면서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아날로그가 문제가 되어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쓰면 됩니다. 내 핸드폰이 무슨 문제인가요? 그냥 통화만 하면 되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청동기 시대에 살면서 돌만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요?
둘째는 나의 불신앙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바로 나의 변화를 막고 있습니다. 수건이 앞을 가리고 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구름위에 빛나는 하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구름만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건만 보이기 때문에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늘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믿음이 없어 불안하고 머리속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전과 약속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나의 무지입니다. 예배 후 축도를 하고 인사하러 나갈 때에 송영이 울림니다. 이 송영은 오늘 말씀을 다시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목사가 나갈 때에 빤히 쳐다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가 민망해야 합니까? 목사가 민망합니다. 어떤 분은 목사 보다 더 빨리 나갑니다. 왜 그런가요? 몰라서 그렇습니다.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바빠서 나가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급하면 나가도 됩니다. 그런데 바쁘지도 않은데 급하게 나가는 분들은 송영의 의미를 모르니까 목사가 나갈 때에 빤히 쳐다보는 것이지요.
차를 몰고 가던 남자가 도랑물을 만났습니다. 물 깊이를 몰라 망설이던 남자는 옆에 있던 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 도랑이 깊니?” “아니요, 아주 얕아요.” 남자는 아이의 말을 믿고 그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차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깊이 빠져버렸습니다. 겨우 물에서 나온 남자는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화를 냅니다. “얘, 깊지 않다더니 내 차가 통째로 가라앉았잖아! 너, 지금 어른을 놀리니?”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습니다. “어? 이상하다. 아까는 오리 가슴밖에 물이 차지 않았는데….”
무지함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왜 배우는가요? 변화하기 위해서 배웁니다. 알면 내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말로 하고 편지를 썼지만 스마트폰을 배우면서 카톡이라는 것도 하고 페이스북도 해봅니다. 변화입니다.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배웠기 때문입니다.<다음호에 계속>
송상구 목사(시드니예일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