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탄소세폐지, 환경논리에 앞선 호주 경제논리
호주의 탄소세폐지 법안통과에 ‘논란’일어
호주연방의회가 탄소세 폐지법안을 통과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호주상원은 지난 16일 하원을 통과한 탄소세 폐지안을 17일 찬성39표 반대32표로 가결했다. 이로써 호주는 주요탄소배출 대기업에 일정액의 세금을 내도록 하는 탄소세를 도입한후 폐지한 최초의 선진국이 됐다. 토니 애벗 총리는 노동당이 추진한 탄소세 폐지를 핵심 총선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그러나 그동안 야당이 과반을 장악한 상원에서 2번 부결됐으나 3번 만에 상원에서 통과됐다. 줄리아 길라드 전총리 시절인 2012년 7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한 탄소세는 호주 500대 탄소배출 대기업에 톤당 일정액의 세금을 내도록한 제도다. 그러나 탄소세 신설로 부담이 늘어난 대기업이 세금 증가분을 소비자에게 전가해 자유·국민당 보수정부가 폐지를 추진하게 됐다. 호주 경제가 최근의 경기침체를 방어해 주던 광산투자붐에서 벗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12대 경제국인 호주는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중 하나다. 2011년 호주의 일일 탄소배출량은 세계 평균의 4배 수준을 기록했으며, 인구당 일일 탄소배출량으로는 미국도 앞질렀다. 앞서 애벗 총리는 2005년부터 탄소세 배출권 거래시장이 운영되고 있는 유럽을 제외하고는 탄소세가 호주기업과 개인에게 불평등한 족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노동당과 환경보호론자들은 법안폐지가 기후변화에 맞서려는 국제사회에 반하는 처사라며 호주정부의 이번 결정을 비난했다.
경제입장, ‘환경을 무조건 보호해야 하나?’
사실 환경문제는 경제개발이 일정수준 이상 진행된 후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먹고 살기 어려울 때는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갖기 어렵지만,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고 ‘삶의 질’을 논할 단계가 되면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비로소 인식을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보다는 선진국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경향은 한국의 상황에서도 비슷하다. 과거에는 폐수ㆍ소음ㆍ대기오염 등의 문제가 왜 문제가 되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사회적인 관심사로 등장하는 빈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사회에는 “환경은 무조건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환상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환경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경제개발행위, 경제활동자체를 죄악시하는 견해가 팽배해 가고 있다.
대개의 환경문제는 크건 작건 간에 대부분 경제개발사업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환경보호와 경제개발은 진정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원론적으로 따져 보면 모든 개발사업은 환경 친화적이지 않다. 집을 짓는 것부터 도로 및 철도를 내는 것, 그리고 댐이나 공항ㆍ항만 등을 건설하는 것까지 대부분의 경제개발사업은 환경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개발사업들은 필연적으로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조건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발전소나 공장을 짓고 운영하는 것이라든지, 생산성을 높이거나 생활의 편의를 위해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 심지어 세제를 이용해 목욕하는 것 조차도 환경적으로는 바람직 하지 않다. 이런 행위들은 대체로 대기오염물질 또는 폐수를 배출하거나 소음ㆍ진동 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져 보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또 우리가 날마다 하는 행동 모두가 환경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사업이 도처에서 추진되고, 생산을 위한 경제활동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개발 및 생산활동에서 발생되는 편익이 환경보존으로 인한 편익보다 크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인정됐다’고 한다.
혹자는 한번 파괴된 환경은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자연환경의 파괴가 바람직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모든 경제행위를 죄악시 한다면 우리는 문명의 이기라할 수 있는 대부분의 편의시설 또는 장치를 모두 포기한 채 살아가야 한다. 환경보호의 측면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자면 원시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그동안 인류발전을 위한 노력을 모두 죄악시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자연환경은 기본적으로 자정능력이 있다. 일정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어느 정도의 오염은 자연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이 용인하는 범위안에서의 경제개발을 통해 환경과 경제개발이 조화를 이루게끔 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
환경입장, ‘경제논리는 환경보호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제들인 도시산업폐기물, 재활용, 대기오염등의문제를연구하는 환경공학과는 공학계열에서도 예외적으로 홀대받는 학문중 하나다. 그 원인은 바로 이 체제가 이윤을 위해 환경문제는 뒷전으로 두기 때문이다. 한국에 IMF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폐기물 재활용 기술을 도입한 몇 개 되지도 않는 폐기물 업체들은 잇따라 도산했다. 건설업체들은 ‘불필요한’ 돈을 내고 폐기물처리시설을 찾아 오려고 하지 않았고, 건설과정에서 나오는 활용가능한 폐기물들을 주민들 눈을 피해 고속도로 옆이나 간척지 등에 버렸다. 공장, 발전소 등의 굴뚝에서는 호흡기, 건물부식, 산성비에 영향을 주는 질소산화물, 황산화물 등의 유독가스들이 나오는데 TMS(굴뚝원격감시체제) 기술은 이런 가스들을 40퍼센트 이상 줄일 수 있는 환경공학의 기여다. 그런데 오염배출 사업장들은 규제치를 넘겨도 굴뚝TMS를 운영하는 환경관리공단에 오염물질을 스스로 줄이겠다는 자체개선계획서만 제출하면 몇 번이라도 부과금을 피해갈 수 있다. 결국 기한이 다 차서 부과금을 낸다고 하더라도 기껏 4백만원 안팎에 불과한 벌금이 그들에게 대체 얼마나 위협이 될 수 있을까!
환경보호와 경제개발의 병립, ‘지속가능한 개발(발전)’
환경보호를 위해 경제개발을 중단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경제개발을 위해 환경파괴를 그대로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최근의 ‘지속가능한 개발(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SD)과 관련된 논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3만여 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규모의 국제회의가 열렸다.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란 공식명칭의 이 회의에서 개발과 환경보호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지속가능한 발전’(持續可能發展) 또는 ‘지속가능한 개발’은 환경을 보호하고 빈곤을 구제하며, 장기적으로는 성장을 이유로 단기적인 자연자원을 파괴하지 않는 경제적인 성장을 창출하기 위한 방법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처음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87년에 발표된 유엔의 보고서 “우리의 미래”(브룬트란트)였으며, 이에선 ‘미래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되었다.
환경보호와 경제개발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칠 수 없다. 환경보호를 이유로 꼭 필요한 경제개발이 멈추어서도 안될 것이며, 경제개발을 위한 환경파괴가 일방적으로 용인돼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평가하기 따라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러한 조화는 쉽지 않지만 최선의 노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기후변화의 문제로 거의 포괄되고 있다. 인간의 화석연료 과다사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배출은 지구온난화라는 심각한 기후변화를 야기했으며, 이로 인해 인류 멸망의 결과가 야기될 것이라는 보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인류는 그간 이산화탄소 곧 탄소의 저감운동과 탄소배출권의 거래제 등의 노력을 통해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들을 하였으나, 그것이 개발도상국들을 향한 선진국들의 또 다른 음모라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개발도상국들은 원시적인 화석연료를 사용치 않고는 그들의 경제를 일으킬 방안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산화탄소의 배출억제는 인류가 당면한 과제인 바, 일단 그 운동은 에너지자원의 절약을 요청하고 있다. 산업과 가정에서의 전기 및 에너지 사용의 억제, 상품소비의 억제를 위한 경건 절제생활의 확산이야 말로 이런 환경운동의 기본이 되는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운동은 이같은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대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위기를 만든 경제구조, 정치구조 등 사회적인 문제들이 그 저변에 있으며, 아울러 그러한 눈에 보이는 환경문제 심층에 있는 사상과 가치관, 철학과 영성의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에 환경경제, 환경정치, 생태윤리, 생태철학, 생태신학, 생태영성 등의 논의의 그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