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도 (feudalism)의 종류와 붕괴
기원전 1122년 주나라의 무왕이 은왕조를 정복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무왕은 호경에 도읍을 정하고 영토를 더 넓히다가 즉위 2년 만에 죽고 만다. 어린 성왕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는데, 다행히 주공 단이라는 뛰어난 사람이 뒷받침을 잘해 주어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북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런데 주나라는 아직 청동기 문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 넓은 땅덩어리를 중앙에서 직접 지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봉건제도다. 왕이 직접 통치하는 직할지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를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들에게 분봉하여 제후로 임명하는 것이다.
제후들은 공, 후, 백, 자, 남의 6등 작위가 주어지고, 작위에 따라 많게는 방 100리에서 작게는 방 50리까지 영토를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시키는 것이다. 제후들은 또 자기의 땅을 자기의 신하들인 경, 대부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봉건제도는 혈연적 유대 관계를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 혈연적 유대 관계를 규범화한 것이 바로 종법 제도다. 종법제도란 종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일혈족의 제사 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이 종법제도에 의하면 가장 큰 집안의 어른이 종족의 중심이 되어 종족을 통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철저히 종족의 법규를 따라야 했다.
중세 유럽 봉건제도의 기원은 로마적 요소인 은대지 제도와 게르만적 요소인 종사제도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먼저 은대지 제도란 로마 제국 말기에 이민족의 침입이 빈번하다보니 힘이 약한 귀족들은 힘이 강한 귀족들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대신에 충성을 맹서하는데, 힘이 센 귀족들은 그 대가로 토지를 수여하는 제도다. 종사제도란 것은 게르만의 부족 사회에서는 전사들이 추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추장은 전사들을 보호해 주기로 약속을 하는 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봉건제도는 정치적 구조인 주종관계와 경제적 구조인 장원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주종관계는 지배층 상호간에 쌍무적 계약 관계로 맺어졌다. 주종관계는 계약의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었다. 혈연관계로 맺어지는 주나라의 주종관계와 비교해보면 그 유대 관계가 조금 느슨하다고 할 수 있다.
장원제도란 지배층인 영주와 피지배층인 농민 사이에 형성된 지배와 예속 관계로 이루어졌다. 장원 내에서 생활하는 농민들은 모든 생활이 영주에게 예속되어 무거운 세금과 노역 의무에 시달렸고, 이사도 마음대로 못했다. 다만 고대 사회의 노예와는 달리 독립된 가정을 구리고 나름대로 재산도 소유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장원 내의 농민들을 농사짓는 노예, 즉 농노라고 부르는 것이다.
○ 봉건제도의 종류
1. 일반 봉건제도
대표적으로 중국의 주나라 왕조의 제후, 중세 유럽의 영주들과 중동 각국의 아미르/셰이크, 일본 막부 체제의 다이묘들 오스만 제국에서 티마르 (봉토)를 누리던 시파히 등이 대표적인 봉건제도사로 꼽힌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 파르티아, 인도 등지에도 비슷한 형태의 정치 체제가 있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인도 역시 무굴 제국까지 봉건제가 유지되었다.
.중국: 제후들의 봉건제도
.서유럽: 영주들의 feudalism
.동유럽: 보야르
.중동: 아미르
.오스만 제국: 시파히들의 티마르 제도
.일본: 다이묘
– 동양
한자 봉건은 봉토건국 (封土建國)의 약자로 천하의 주인인 천자가 중앙의 직할지 (왕기, 기내, 중국)만 직접통치하고 나머지 땅은 제후에게 나눠주어 다스리도록 한다는 뜻이다.
왕이나 황제가 공훈을 세운 자,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 충성 및 군사적인 조력, 또는 일정한 세금을 상납받는 제도를 말하며, 이렇게 형성된 대귀족 또는 지방 유력자가 해당 지역의 조세권과 지배권을 다시 실질적인 토착 군소 세력가에게 위임하는 방식으로, 결과적으로는 자기 세력안에서의 독자적인 통치권을 인정하는 지배 시스템이다.
세력권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세력가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주종 관계가 형성된다. 동양의 봉건 제도와 서양의 봉건 제도가 일견 비슷하다고 하여 근대 일본에서 주나라의 봉건 제도에 착안하여 이랗게 번역하였으나 세부적인 점은 매우 다르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번 등의 제도를 모두 합쳐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흔히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되며, 봉건제 당시 유럽 처럼 농노들 또한 존재했었다. 일본의 농노제
– 서양
서양에서는 고대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 (Gefolgschaft, retinue)와 후기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 (beneficium)가 결합하여 봉건제도 (Feudalism)가 나타났다.
고대 게르만족은 자유민 출신으로 구성된 종사들이 약탈 원정 시에 서약을 맺어 수장에게 전투력을 제공하고, 서약의 대가로 수장은 약탈에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종사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는 야만족 출신 군인이 국경을 수비하는 대가로 국가가 일정량의 먹고 살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AD 9세기에 들어서 서유럽에 등자가 보급되어 중무장 기병의 무력이 급상승하자, 황제를 위시한 영주 (주군)들이 기사 (봉신)들에게 중무장 기병을 부양하기 위한 영지 (fief)를 분배하면서 ‘봉건제도’가 탄생했다. 서양의 봉건 제도에서는 주군과 봉신이 원래 똑같은 전사 귀족 출신으로서 원칙적으로 신분이 평등했다. 따라서 주군과 봉신이 서로 맹세를 지켜야 할 신의성실의 의무를 가진 계약 관계를 토대로 봉건 제도가 수립된 것이다. 이 점이 동양의 봉건 제도와는 다른 역사를 갖게 된 원인이다.
이후 카롤링거 제국 (Carolingian Empire)이 점차 분권화되자, 봉신들이 황제의 권위로부터 독립하여 각지에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행사하는 성주들이 등장했다. 초기의 성주들은 주로 목책과 참호로 둘러싸인 망루로 이루어진 초보적인 성채를 건설했지만, AD 11-12세기에 돌로 지어진 성채들이 널리 퍼지면서 봉건 제도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서양 봉건제에서의 상하 관계란 결코 쌍무적 계약 관계나 충성 관계 같은 간단한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 황제/왕과 대봉건 봉신 (강력한 봉신)이 있다면 대봉건 봉신 휘하의 소봉건 봉신 (영지를 가진 자작, 남작 등)이 있고, 또 다시 도시의 코무네나 장인 조합, 주교령, 실질적 주교령, 수도원 등 각지의 세력이 법적으로, 사적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다양한 관계를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1세기 초 밀라노의 군주였던 대주교 아리베르토 (Ariberto da Intimiano)휘하의 소봉건 봉신들과 그들의 배신 (봉신의 봉신)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 싸움에서 소봉건 봉신들이 승리했고, 자연스레 아리베르토의 권력이 급상승했다. 이는 이탈리아 전 지역에서의 안 그래도 열세였던 황제의 권위가 추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황제 콘라트 2세는 하급 귀족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고, 1037년에 국고나 교회에서 얻은 봉토의 몰수권을 법제화하게 되었다. 여기서 봉토에 관한 칙령 (Edictum de beneficiis) 또는 봉토법 (Constitutio de feudis)이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로부터 시작된 공권력 약화는 지방 귀족들 사이의 극심한 무질서를 낳게 되었다. 지방 귀족들은 자신의 소유지 바깥까지 군주권을 무시한 비합법적인 군사적, 경제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약해진 군주권은 이러한 비합법적 지방 권력의 확산과 성립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 영주들과 귀족들은 무엇보다 무력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군사력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각지에서 무기와 갑옷, 공성 및 수성 기술, 축성 기술, 전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각 지방은 사실상 각각의 군사적 소국가가 되어갔다. 당시 문헌 자료들이 봉신을 의미하는 vasus와 전사를 의미하는 miles를 동의어로 사용하기까지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군사적 조력은 봉건제의 일부, 충성 맹세로 인해 생성되는 의무가 되었다.
사회적 상황이 아닌, 제도의 관점에서도 서양 봉건제를 규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샤르트르의 주교 퓔베르는 아키텐의 기욤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신은 무엇보다 자신의 군주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조언과 원조를 줌으로써 선행을 베풀어야만 하고, 군주는 그의 보사에 보답할 의무가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굳이 비틀어 보자면 군주가 봉신의 충성에 보답할 의무를 성실이 이행하지 않는다면, 봉신은 군주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던 대응할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백년전쟁 때 플랑드르나 부르고뉴 공작 등이 프랑스 왕에게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왕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보았고, 실제로 그러한 명분이 통했기기 때문이다.
11세기경부터 카롤링거 왕조 적부터 내려왔던 보호의 위탁 의식, 즉 봉신 맹세 의식이 3단계로 자리잡았다.
첫 번째로 신하가 되어 따를 것을 맹세하는, 봉신이 양손을 군주의 두 손 사이에 집어넣고 (immixtio manuum), 항상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복종과는 차별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 (volo)을 했다.
두 번째로 성경 또는 성유물을 놓고 충성을 맹세했다.
마지막으로 군주의 입술 또는 칼에 입맞춤 (osculum)을 했다. (굳이 입술에 하진 않았겠지만) 봉신의 지위를 획득하는 의식은 양도한 봉토를 상징하는 한 줌의 흙덩이와 나뭇가지, 또는 홀을 군주가 수여하는 것으로 끝났다.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의식이 꼭 필요하지는 않게 되기도 했다. 농업 계약에 쓰이던 방식으로 작성된 서면에 등록을 하는 방식으로 봉토를 획득하거나, 중세 후기에는 특히 도시에서 실질적으로 ‘봉사’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봉신의 신분과는 관계없이, 부르주아나 여성 권력자들의 발흥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봉토 또한 이전의 봉건적 관계에서 탈피한 매우 다른 방식, 즉 군사나 의무보다는 땅과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춘 양도가 지정되게 되었다.
서양 봉건제는 쌍무적 계약 관계, 상하 관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며 귀족들도 등급이 나뉘어 있었다. 기사였던 레프고의 아이케 (Eikie von Repgow)는 저서인, 작센의 관습법을 서술한 작센의 거울 (Sachsenspiegel, Specchio sassone) 에서 봉건제가 6개의 등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표현했다. 왕이 1등급이고, 주교와 수도원장, 수녀원장이 2등급, 평신도 제후가 3등급, 자유 영주가 4등급, 수사판사와 자유영주의 봉신 또는 그러한 자격 보유자가 5등급, 봉신의 봉신들이 6등급이었다.
이것만 보면 마치 상위 등급이 하위 등급의 상관자, 명령권자처럼 보이지만 이 등급은 정치적 제도 또는 상하관계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회적 계급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한국사에서 조선 시대에 선비가 중인보다 윗등급이지만 선비가 의사나 역관에게 바닥을 기라고 명령할 권리는 없었던 것과 같았다. 왕-봉신-봉신의 좁은 국면에서 보자면 상하 관계가 성립되긴 하지만 명령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소급적 봉신 (봉신의 봉신)에 관한 관계 또는 의무를 규정한 문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도 봉신의 봉신에 대한 명령권이나 충성의 강요를 법적으로 실행한 예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봐도 무방한데, 1330년대의 한 법학자에 의해 공식화된 표현인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의 봉신의 봉신이 내 사람이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시오”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양상은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카롤링거 왕조 권역 또는 영향권에 집중되어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알듯 유럽은 스칸디나비아나 동로마, 폴란드 등 다른 국가들이 있고 이들의 봉건제는 또 다르다. 이슬람의 제도도 봉건제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1000년을 이어간 중세의 모든 정치 체제는 발전 과정에 따라 비슷한 요소들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봉건제라 규정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2. 각 문화권 마다의 차이점
다만 중국 제도에서 따온 이름인 봉건 제도와 중세 유럽 제도인 feudalism, 그리고 일본의 막부 정권과 오스만의 티마르 제도는 그 사회 체계에 맞게 운영 방식이 각각 거리가 있고, 여러 차이가 있다.
– 여러 명의 주군을 섬길 수 있나?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동시에 여러 명의 주군을 섬길 수 없지만, 유럽에서는 한 번에 수십 명의 주군을 섬기는 봉신도 있었다. 아예 두 명 이상의 주군이 동시에 군사적 봉사 (군사 지원)를 요청할 경우 한쪽 주군에게 먼저 간다는 내용의 ‘특정 영주에 대한 충성 서약 (liege homage)’이라는 게 도입될 정도였다. 따라서 봉건제라는 이름이 같다고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 어떤 관계로 맺어져있나?
혈연관계 (중국): 가장 대표적인 구분이 바로 중국의 주나라가 혈연 관계로 이루어졌다.
계약관계 (중세 유럽): 중세 유럽은 계약 관계에 입각해 주종구도가 짜여졌다.
군국제(일본): 일본은 이를 절충해 수도 에도에서 가까운 지역엔 쇼군의 종친과 직속 부하들을 (신판다이묘, 후다이다이묘), 먼 지역엔 과거 적대 세력이었거나 단순한 현지 토호를(도자마다이묘) 영주로 세우는 군국제 비슷한 방식을 썼다.
절도사(오스만 제국): 오스만의 티마르 제도는 제국의 외곽 영지를 군사령관인 시파히들이 주둔 방어하는 동시에 경영하는 일종의 절도사 같은 제도였다. 지방 영주가 자신 영지에서 왕 못잖은 킹왕짱이었다는 공통분모는 있지만.
3. 유사 봉건제도
의외로 봉건제도와 유사한 형태는 고도의 관료제가 발달한 로마 제국이나 중국, 조선, 프랑스 왕국 등을 제외하고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대다수 국가들은 모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이 아닌 지방의 유력자가 존재했고, 이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봉건제와 유사한 지방 분권 체제가 존재한 것이다. 로마 제국이나 중국,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지방의 유력자를 완전히 통제해 버린 국가가 있는가 하면, 중세 유럽이나 이슬람, 인도 등은 완벽한 통제는 하지 못하고 적절한 계약 관계를 통해 왕의 권위를 인정받고 제한적으로 통제한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해서 개인의 친분에 따른 유사 봉건제가 유지되기도 했는데, 남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실 중국도 춘추전국시대와 오초칠국의 난을 통해 봉건제의 해악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발달시키려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건국 초기에는 오등작을 유지했다가 태종 때 폐지했다. 흔히들 정도전을 봉화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역시도 그 흔적 즉 오등작상 보면 ‘백작’에 봉해졌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특히 근세 이전 가장 강력한 병과였던 중장기병을 굴리는 국가들은 대개 봉건제와 유사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그 비싼 중장기병을 모두 국가가 관리하면서 양성하기는 매우 어렵고, 덕분에 대충 땅을 나눠주고 자율적으로 무장을 갖추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매우 정교한 관료제도를 완비했던 동로마 제국 역시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들에게는 기존 기병의 3~4배가 되는 땅을 제공했는데, 이는 어지간한 소영주에 맞먹는 땅이다. 다만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는 카타프락토이들에게 기존 테마 병사의 4배에 해당하는 토지가 제공하였다고 하나, 현실적으로는 3~4명의 기병이 공통으로 무장을 마련하고 번갈아가며 복무하였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고려에서도 군인들은 국가의 토지를 지급받고 실질적으로 군역을 세습하면서 군인전의 수입을 통해 복무 경비를 마련했다.
그래도 중국이나 동로마 제국의 관료들과 군부는 이런 무력집단의 통제가 가능했다. 물론 반란은 종종 일어났지만 그래도 통제할 수 있었는데 중세의 유럽이나 이슬람, 인도는 그 정도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4. 봉건제도가 아닌 나라
– 중국 진나라 이후
정작 봉건이란 단어의 유래가 된 중국은 진나라 이후 중앙집권을 확고히 굳혀 봉건제와는 관계가 멀어졌다. 다만 제도적으로 봉건제가 사라진 것이 의외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다.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정착되기는 하였으나 황제가 황자들에게 영지를 내리고 왕으로 임명하거나 신하들에게 오등작의 작위를 내리는 등 실권없는 제후를 봉하는 봉건제의 형식은 끝까지 유지했다. 이는 주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천자의 권위 중 하나인 제후를 봉하는 전통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전통 때문에 유지한 형식적인 의미의 봉건제고, 실질적으로는 한나라 시대에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 한국
한국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던 조선을 흔히 봉건 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되었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사회 경제 사학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특히 자본주의 맹아론으로 알려진 백남운 등은 ‘아시아적 봉건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조선 시대가 이 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쉽게 말해 조선의 지주-소작농 관계를 농노제를 비롯한 서양의 봉건제에 끼워맞춘 것에 가깝다. 이는 애초에 서양의 마르크스주의 유물 사관[14]을 한국사에 도입하여 한국사의 보편성을 입증하고 이를 통해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한국 사학에서 조선을 더 이상 봉건 국가로 설명하지 않게 된 지금도 이러한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봉건이란 말이 단순히 ‘구시대적 사회상’을 부정적으로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변질된 탓도 있다.
심지어 교과서조차도 그런데, 구 국사 교과서를 비롯한 한국사 교과서들이 조선 자체를 봉건 국가로 설명하지는 않으면서도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의 성격에 대해선 항상 ‘반(反)봉건’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봉건적’이란 말에는 본래 의미의 봉건제도에 관한 뜻 외에도 ‘신분이나 지위 등의 상하 관계에 따른 질서만을 중히 여기어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란 뜻이 있다. 물론 이것은 봉건제도에서 유래한 ‘봉건적’이란 말이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오용/혹은 마르크스식으로 사용되면서 그런 의미가 굳어진 것을 사전편집자가 포착하여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전에 그렇게 적혀있으니 써도 되겠네?’라는 식으로 교과서나 다른 책들에 싣는건 인과관계의 앞뒤가 뒤바뀐 아이러니한 일. 마치 순환논법을 보는 것 같다사학은 지금도 조선을 ‘리조봉건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식으로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나라들이 모두 봉건 국가이긴 하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아예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이기에 이때의 ‘봉건’도 정확한 의미의 봉건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참고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봉건가정’, ‘봉건유물’, ‘봉건잔재’ ‘봉건통치’ 등 봉건으로 시작하는 단어 중 일부가 북한어로서 등재돼 있는데, 대한민국 표준어에서는 한 단어가 아니므로 한국식 맞춤법으로는 ‘봉건’ 다음을 띄어 써야 한다.
○ 봉건제도의 붕괴
1. 붕괴과정
– 서양
.어떤 계기로 인해 국가, 국민, 애국 등의, 영지 단위를 초월하는 소속심이 생기며,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중앙집권화를 받아들일 심리적인 준비가 됨.
.어떤 계기로 인해 군주가 영주들을 압도하는 재력을 갖추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군주는 곧 영주들을 압도하는 무력을 확보한다. 강력한 재력으로 용병을 추가로 운용하거나 심지어는 대규모 상비군을 조직할 수도 있는데, 이게 특히 화기의 발달 이후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군주와 영주 사이의 무력 균형이 더욱 군주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장원의 붕괴, 나아가서는 영지의 붕괴 및 흡수
한편 장원의 붕괴에는 식량/부역/병역 제공-보호 관계가 돈을 대가로 한 관계로 바뀌게 된 점, 흑사병으로 인해 노동력이 귀해진 여파로 농노를 비롯한 피지배계층의 인권이 향상되며 농노를 옭아매던 규제들이 철폐되었고, 영주의 재력과 권력의 축소로 이어졌다.
영지의 붕괴와 흡수의 경우 전쟁으로 인한 여파, 영주나 영주 일가의 사망, 결혼 관계를 통한 권력 이양 등이 꼽힌다.
직접적인 봉건제의 종말과는 별개로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생기는 종교적인 문제의 극복도 있으나 해당 내용은 생략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공통사항이며, 영국과 프랑스는 거의 전형적으로 이 패턴을 따르지만, 신성 로마 제국/독일, 시칠리아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처럼 일반적인 흐름과는 약간 다르게 흘러간 경우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 화기의 발달 및 그에 따른 여파
중앙집권화와 영지의 붕괴의 경우, 또 한가지 재미있는 공통분모가 존재하는데, 바로 화약의 등장으로 인한 군비 증강이다.
물론 처음의 화기는 굉장히 조악했다. 대포라 할지라도 성벽을 파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소화기의 경우에는 조금 두꺼운 판금갑옷으로도 총알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끈질기게 화기의 연구에 매달렸고, 세월이 지나며 이야기는 달라지게 된다.
대포의 경우, 백년전쟁에서 수세로 몰리던 프랑스가 반격을 나서기 용이하게 해 주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일천 년 난공불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정면돌파 할 수 있는 괴물도 나오게 된다. 즉, 어느 수준 이상의 포격 능력을 갖추는 순간, 영주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지간한 국가도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 투사가 가능하게 된다. 물론 아예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닌데, 높고 얇게 성벽을 짓기 보다는 낮고 굵은 성벽을 가지며, 보병들에게 특정 진로를 강제하는 요새를 짓게 되었다. 어지간한 성벽은 냉병기 시절의 대전환경을 상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고, 당장 17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곡사포가 발달하며 성벽과 성채는 사양새로 접어들었다.
소화기의 경우, 파비아 전투를 기점으로 주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이후로도 화기는 지속으로 발전하여, 테르시오 방진의 로델레로들이 점점 총병으로 대체되는가 하면 나중에 가서는 아예 머스켓만 가지고 싸우는 전열보병들로 양상이 바뀌게 된다.
앞서 ‘어느 계기로 인해 군주가 영주보다 우월한 재력을 갖추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곧 영주들을 압도하는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언급을 하였는데, 이 무력의 격차를 벌리는 데에 지대하게 한몫 한 것이 바로 화기라고 할 수 있다.
– 영국
국가에 대한 소속감 및 ‘애국심’의 개념조차도 희박했었으나, 영국은 백년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개념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며, 이로 인해 왕이 특정 국호하에 중앙에서 국토 구석구석을 직접 호령한다는 그 자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여건이 형성 되었다.
‘일반적인 공통사항’에 언급된 요인들로 인한 장원의 해체가 왕-귀족-기사-농노로 이어지던 피라미드의 맨 밑부분을 붕괴시키기 시작했다면, 왕/귀족-기사 부분에 해당하는 피라미드의 중간부분을 붕괴시킨 것은 바로 방패세였다. 영주에서 지주가 된 기사들은 새로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병역의 의무를 방패세로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왕/귀족과 기사 간의 이해관계 역시나 돈에 의한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지배계급으로서의 기사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또 한편, 세력이 크게 커진 상공업자들이 법적 특혜를 노리고 피라미드 꼭대기의 왕과 직접적인 협력관계가 되었는데, 상공업자들의 지원과 방패세를 등에 업음으로써 영주들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갖추었고, 이는 곧 화기를 다루는 중앙 상비군을 바탕으로 한 압도적인 무력을 갖추게 해 주었다.
– 프랑스
영국과 백년전쟁을 겪으면서 프랑스도 비슷하게 영지 단위를 넘어선 단위의 국가, 국민, 애국심 등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편 리슐리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왕정의 명분을 강화하며 프랑스의 중앙집권화를 더욱 가속했다.
경제 활성화와 재력 확보의 경우, 여러 대에 걸쳐서 서서히 이루어졌는데, 몇 경우를 꼽자면,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을 해체하고 그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영주들을 압도하는 재력을 확보하였다.
루이 11세는 우편 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교통망을 확충하고, 귀족들에 대한 상업 참여와 관련된 규제를 풀었다.
앙리 4세는 귀족들의 세율을 올림으로써 재력 균형을 더더욱 왕실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고, 농업과 상공업을 발달시켰다.
장원 붕괴와 영주 세력 약화의 경우, 공통사항에 언급된 내용과 앙리 4세의 세율 인상 말고도 프랑스만의 특이점이 몇 개 등장하는데,
백년전쟁의 난리통에 기사들과 귀족들이 대거 갈려나갔는가 하면, 농민들이 흩어지기도 했다. 백년전쟁 자체로 인한 피해가 여러모로 장원을 무너뜨리는 데에 한몫 했다.
리슐리외는 아예 꼭 국방에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성채들을 철거했다. 장원의 중심지가 물리적으로 없어졌으니 역시나 장원이 붕괴되었다.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전쟁을 벌여서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을 죽이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부르고뉴 공국을 멸망시켰다.
루이 14세는 대놓고 사병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으며, 이게 결과적으로 봉건제 피라미드의 중간 부분인 왕/귀족-기사 부분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한편 정치적으로 귀족들의 참여를 제한했고, 여러모로 귀족들을 감시했다.
–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도 경제 활성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며, 마을과 도시가 커지고 상공업이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장원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피지배계층의 인권이 향상되기는커녕 1524년 독일 농민전쟁 패배의 여파로 오히려 인권을 뺏기고 더욱 심한 착취를 당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영지와 영주들이 나중에 들어서는 아예 왕국을 자처하고 군주로 변해버리는 양상을 보였으며, 이게 1800년대까지 지속된다. 장원만 없어졌다뿐이지 영주들이 누구의 세력하에 정리되기는커녕 아예 독립된 형태로 쪼개져서 치고박고 하며 싸우는 형태로 수백 년은 갔다.
병과로서의 기사는 화기의 영향으로 인해 도태되었지만 지배계급으로서의 기사는 그대로 지주로 변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물론 (지배계급으로서의) 기사들의 삶이 실제로 그렇게 풍요롭지 못했던 경우가 많은 만큼 그대로 몰락하는 일도 있었다.
– 동로마 제국
프로니아 제도라는 게 11세기에 도입되기는 했었는데, 땅 나눠주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주는 대신 불렀을 때 (가능하다면 부하들과) 무장을 하고 나와서 싸우는 의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피지배계층은 ‘영주’의 땅을 일구었다. 그러나 피지배계층의 자유와 인권이 상당했으며, 세습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했다지만 제국이 망할 때 즈음 가면 세습귀족화했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으로 변질되었다.
– 이탈리아
일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리소르지멘토 이전까지 딱히 ‘이탈리아 왕’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물론 온갖 공국들과 백국, 변경백국 등이 난무하지만, 다들 신성 로마 황제, 동로마 황제, 교황, 프랑스 등 각각 주군 자체가 달랐으며, 여기에 따라서 해당 영지의 특징이 갈렸다.
그나마 좀 독특하고 파고 들 만한 게 통일 직후의 시칠리아 왕국인데,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이 신성 로마 제국과 아랍 세력을 아니꼽게 여기던 교황의 사주를 받은 노르만인들에 의해 궁극적으로 ‘시칠리아 왕국’ 으로 통일되고 난 뒤, 그 안에서 또 땅을 나누어 받은 귀족들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로저/루지에로 2세는 처음에 시칠리아 왕국을 통일할 때부터 교황을 등에 업고 월등한 권력을 휘두르며 중앙집권화를 이루어냈기 때문에 봉건제하면 생각하는 왕과 영주들 간의 팽팽한 대치관계 같은 것은 없었다. 왕, 상급 영주, 하급 영주들 간의 이해관계도 처음부터 돈에 의한 것으로 출발했다. 시칠리아 섬 자체가 워낙 비옥한 땅인 데다가 지중해 날씨 덕분에 생산량이 차고 넘치는 것도 한몫 했다.
– 나바라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레콩키스타라는 특수 상황이 결속력을 강하게 해주었다. ‘모두 힘을 합쳐서 외세이교도 놈들도지사에 더 가까웠다. 물론 독립하겠다고 난리친 영주들이나 세력면에서 라이벌을 이룰 만한 다른 영지나 독립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베리아 반도는 결혼 동맹, 상속 문제에 따른 암투, 그리고 전쟁이 가장 큰 주제가 된다.
먼저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3세의 퇴위 이후, 세 아들들이 그 땅을 나누어 상속하니 여기서 갈리시아 왕국과 레온 왕국이 갈라져 나오게 된다. 한편, 여기서 레온 왕국 밑에 있던 카스티야, 부르고스, 알라바, 세레소, 란타론 백작령들이 서로 합쳐서 성공적인 무력 투쟁 끝에 카스티야 왕국으로 독립했다가 결국 이런 저런 복잡한 암투 끝에 다시 레온 왕국에 흡수되었다. 카스티야 왕국,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갈리시아 왕국이 어떻게 레온 왕국으로 흡수되었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바르셀로나 백작령과 그 인접한 백작령들은 카롤링거 왕조 때 봉한 변경백작령들을 그 시초로 하니 오히려 프랑스와 더 가까웠다. 이 중 바르셀로나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치니 바르셀로나 백작이 이쪽 지역의 ‘대표’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987년에 카페 왕조로부터 독립하며,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카탈로니아 군주국’이 시작되었다. 후에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아라곤의 여왕 페트로니야와 결혼하니, 곧 아라곤 연합왕국의 탄생이었다. 나중에 아라곤 왕국, 아라곤 연합왕국의 주축이 되는 아라곤 백국도 카롤링거 왕조의 봉토였다. 이들은 결혼을 통한 연합으로 주류 세력에 편승했다.
포르투갈 왕국의 전신이 되는 포르투갈 백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 시절 레콩키스타에 공헌한 대가로 비마라 페레스가 아스투리아스 왕을 군주로 모시는 포르투갈 백작에 봉해지면서 시작된다. 그 후 독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누누 멘데스 포르투갈 백작이 페드로수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갈리시아 왕국에 흡수되었다. 이들은 진짜로 전면전을 벌이며 세력다툼을 하다가 결국 져서 흡수되었다.
한편 이 갈리시아 왕국의 영토는 다시 레온 왕국에 흡수되었다가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가 사위 부르고뉴의 레몽에게 떼어주었으며, 여기서 ‘갈리시아 왕국’이 부활했다. 여기서 레몽의 세력을 두려워한 알폰소 6세가 오늘날 포르투갈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또 떼어서 부르고뉴의 앙리를 레온 왕을 군주로 모시는 포르투갈 백작으로 봉했다. 한편 포르투갈 백작 아폰수 1세는 발데베즈 전투에서 알폰소 7세와 싸워서 이기며, 이 여파로 자모라 조약을 채결하며 성공적인 무력 행사 끝에 독립 왕국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오늘날 포르투갈의 국경이 정해진다.
그라나다 함락 이후로 다시 한 번 결혼을 통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통일 시도가 있었기는 하였지만 결국 관련 인물들이 요절하면서 실패하였다.
○ 평가
근대에 인류 최악의 경제/사회 체제라는 주장도 있으나, 근대 초기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비교할 때 오히려 더 낫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일단 중세 유럽의 것들을 모두 나쁘게 본 근대의 체제들이 현대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나쁜 점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고, 의외로 중세 농노의 삶이 19세기 영국등 산업혁명기 유럽의 도시 노동 빈민보다 오히려 더 적은 노동시간, 더 많은 휴식, 더 많은 사회적 보호 장치를 누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는 등 중세의 여러 단면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다.
이후, 중세시대가 암흑시대라는 인식이 잘못됐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유럽 역사학계에선 이에 대해 아직 논쟁 중에 있으며, 당시 유럽의 산업 구조와 생산력, 전반적인 기술력으로는 이 이상의 체제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 (유럽 쪽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마르크 블로크는 주저 ‘봉건사회’에서 저항권의 주요한 기원이, 서양 봉건제도에 있음을 갈파한 바 있다.
○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제
동양에선 근현대 이후 한국, 중국처럼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발달한 나라들은 오히려 중앙과 지방 간 불균형과 이로 인한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히는 데 비해 유럽, 일본의 지방분권 성향은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지방분권의 전통이 강한 나라들의 수위도시 집중 경향이 중앙집권 전통 국가들보다 약하고 그 부작용도 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다. 전근대 시절 봉건제는 현대의 지방 자치와 달리 무력을 갖춘 지방 토호들의 폭력적인 통치로 인해 오히려 시민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전 자유주의자들은 봉건영주와 대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몽 전제군주에게 협력해 절대왕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한다.
일본 같은 경우도 오히려 봉건제를 극복한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세력을 떨칠 수 있게 되었는데 근대국가 정비에 중앙집권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전근대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제를 동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시대적인 변화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중앙 집권의 폐단이 심하지만 비슷하게 전근대적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한 중국의 현재 모습을 보면, 나라가 너무나 커서 한국과 달리 정치적 중심지인 베이징이 경제적 중심지까지 맡는 게 아니고 상하이나 광저우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중앙 집권이라고 다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경제적 문제도 그러한데 굳이 일본의 군마현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경제발전에는 필연적으로 선택과 집중이 벌어지기 때문에 경제적격차는 반드시 발생하게 되어있으며 정도도 둘 다 거기서 거기다. 이때 중앙집권 성향인 경우 중앙의 힘으로 억지로라도 균형을 맞춰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집권이 더 낫다.
○ 현대의 봉건제
안도라 공국은 1993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다.
영국 왕실의 직할영토인 채널 제도의 사크 섬은 2006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다. 놀랍게도 사크 섬의 주민들은 자신들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대부분 봉건제 철폐에 반대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