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신약개관 – 신약시대의 사회상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시기는 유대사회가 멸망하기 직전의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 때는 고대사회로서는 드물게 국론이 분산되어 있었고 온갖 집단이 난무하였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고 기도하던 유대인들에게 마카비의 승리와 하스몬 왕가의 탄생은 일말의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불완전한 영광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얼마 전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곳곳에서 수시로 폭력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지만 그들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방인들이 감히 선민 위에 군림한다는 것부터 유대인들에게는 불만이었다. 로마군인, 세관원, 세리 등 이방인들이 복작거리며 거룩한 성에 이교문화를 이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구>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 안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전체 숫자는 약 45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 중에 70만명 정도가 팔레스틴 지역에 살고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본토보다 디아스포라에 더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삶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명령권에 속해 있었으며 수시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이들은 이미 로마제국의 구석구석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면서 그들이 조직한 회당을 통해 복음이 쉽게 전파될 토양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회기구>
유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단위는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한 지역, 또는 시골일 경우 한 마을이다. 회당에는 그 마을의 문제를 심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이 주어져 있었으며 대개 종교적, 율법상의 문제를 처리했다. 회당을 중심으로 지방 재판소가 조직되었는데 제사장 및 장로들 7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위에 23명으로 구성되는 지역 재판소가 조직되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 5장 21절의 “심판”이라는 용어가 이 지방 재판소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산헤드린은 71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최고 행정, 재판기구로 현직 대제사장이 의장이었다.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정치적인 경계에 따라 영향권이 제한되지 않았다. 즉 유대인이라면 사는 곳 어디에나 영향력이 미쳤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대제사상의 공문을 가지고 갔다는 사실에서 한 예를 볼 수 있다. 산헤드린이 유대의 특색 있는 기구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 6년 유대지역이 총독제로 변하면서부터였다. 그 전에는 종교적인 영역이 정치와 연합하거나(하스몬 왕가) 정치력에 굴복했으나(헤롯 치하), 이 때부터는 정치권력은 총독이 소유하고 대제사장에게 유대 고유의 종교적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었다.
<대제사장 및 제사제도>
포로기 이후 정치적 자주권이 제한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대제사장직이었다. 지중해 주변의 정세에 따라 유대인들은 정치적 독립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소유하기도 했지만, 대제사장직과 함께 종교적 자유는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소유하고 있었다. 대제사장직은 항존직으로 세습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지만, 외세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다. 대제사장이 살아서 퇴임하는 경우에 그는 이 직함을 그냥 가지고 있었으며 명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백성들은 끝까지 그를 대제사장으로 부르며 존경했다. 그러나 하스몬 왕가의 등장으로 대제사장직의 존엄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정치권이나 군사력과의 결합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혈통과 가문에 따라 24조로 나누어 1주일씩 봉사했는데, 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제비뽑기로 결정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약7천명의 제사장과 1만1천명의 레위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던 경우를 제외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끊이지 않고 희생제사가 드려졌다. 새벽과 오후9시에 드리는 번제에는 보통 양 한마리씩이 바쳐졌다. 안식일에는 각각 두 마리씩의 양을 드렸다. 월삭과 명절에는 그 수가 크게 증가했는데 그 정확한 양을 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는 구약시대말기에 “유대방언”이라고 불리우며 사용이 점차 제한되었다. 반면에 아람어는 앗시리아제국 통치기에 국제어로서의 자리를 완전히 굳힌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에 앗시리아제국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킴으로써 이 직역은 혼혈족이 거주하는 것과 함께 아람어권이 되었다. 바벨론 등지에서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귀환한 이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순수유대인 거주지역도 아람어권이 되었다. 예수님의 모국어도 아람어였으며, 이 아람어가 유대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히브리어는 율법학자들이나 사용하는 죽은 언어였다.
헬라 지배시대를 거치면서 헬라어가 지중해 연안의 통용어가 되었다. 헬라어는 지식층이나 귀족계급만이 아니라 평민 및 노예계층에 이르기까지, 또한 정복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심지어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까지 폭 넓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께서 원래 사용하셨던 원래 언어를 번역하여 전달했다. 그 언어가 헬라어이다.
<경제 상황>
유대지역은 대부분 광야로서 비옥한 지역이라 해도 가축업이나 목장 정도만 가능했다. 그래서 그 곳에 양과 염소가 방목되었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예루살렘 주변에는 올리브가 많이 자랐고 자연히 기름이 많이 생산되었다. 요단강 주변의 골짜기에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자랐다. 갈릴리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곳으로 넓은 토지가 있었고 갈릴리호수에서는 어업이 성행했다. 그래서 아리스토불루스1세는 이방인의 땅인 갈릴리지역에 정책적으로 순수유대인을 이주시켰다. 나사렛은 이 때 건설된 도시로 추정된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곳에 이주해온 이주민의 후예로 보인다.
도시에는 주로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직물, 피혁등이 성행했다. 당시에 수공업은 좋은 직업으로 평가되어 많은 율법학자들이 바울처럼 이것을 직업으로 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은 상인이었다. 더러운 것을 만지거나 여인이 하는 것, 사기나 범죄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 등은 천한 직업으로 간주되었다. 당시에는 몇몇 대지주들이나 귀족계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도와 거지가 흔한 세상이었다. 예수님의 비유에 이들이 간혹 등장하는 것도 그 한 예증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예루살렘은 순례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많은 강도와 걸인들이 들끓었고 예루살렘은 걸식의 중심지로도 불렸다. 유대와 사마리아가 로마의 총독관할구로 바뀌면서 새로운 부자계급으로 등장한 것이 세리였다. 그러나 세리는 천한 직업으로 비난 받았을 뿐 아니라 죄인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예루살렘의 역할에 따라 경제상황이 크게 달라지는데, 순례객의 숫자에 따라 드려지는 동물의 수와 그들이 뿌리고 가는 여비가 팔레스틴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였다.
<예루살렘>
예수님 당시 약 25,000~30,000명의 주민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성안에 약2만, 성밖에 약5천). 유월절 순례객은 약12만5천~15만 명으로 추산한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인 여건이 매우 열악했다. 물이 부족했고 수공업의 원료가 모자랐으며 교통망도 발달할 수 없는 산악도시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오랜 역사와 유대교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로 인하여 그 당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면의 중심지였다. 예루살렘의 역할은 중심부에 세워진 성전으로 인해 가장 확실하게 보장받았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유대사회의 중심지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계급제도와 제사제도를 포함하는 말이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와 제사를 수행하는 대제사장이 존재하는 한 예루살렘은 그 가치를 상실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경제적 가치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 및 제물과 비례했다. 유대인의 수효가 증가하면서 엄청난 양의 희생제물이 드려졌는데 이것은 곧 예루살렘의 부와 연결되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신학과 법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사방에서 율법학자나 율법학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예루살렘은 랍비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은 험하고 늘 강도의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순례단 또는 대상을 조직했다. 순례객들을 위한 여관업이 발달한 것은 당연했는데 순례객들은 여관이나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유숙하거나 민박을 하거나 예루살렘 주변의 마을에서 지냈다. 때로는 회당이 여관의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회당>
회당의 기원은 대개 바벨론 포로기로 추정한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증거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2세기에 안디옥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 열한개의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고레스 시대부터 예루살렘에서의 희생제사와 성전의 기능이 되살아나지만 디아스포라에서는 회당이 계속 그 역할을 유지했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그들이 마련한 삶의 터전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회당은 디아스포라만이 아니라 유대 본토에까지 확산되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 적어도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루살렘에도 회당이 세워졌다.
회당의 주요 기능은 예배(기도)와 율법교육이었다. 특히 후세에 대한 교육은 회당의 매우 중요한 기능이었다. 예루살렘근처의 회당은 순례객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또 하나의 목적이 추가되었다. 회당장이 모든 것을 관리했고 회당지기와 “하잔”이라 불리는 사찰이 따로 있었다. 회당장은 심지어 치리권도 행사했다. 그는 회당이 조직되어 있는 지역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은 10명이었고 회당을 조직하기 위한 최소인원은 120명이었다. 회당 예배형식은 다음과 같았다.
l 쉐마(“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신6:4-9 ;11:13-21 등)
l 낭송기도(열여덟 가지 기도문 낭송)
l 율법서 낭독
l 선지서 낭독
l 감사기도
l 통역 및 설교(낭독한 율법과 선지서의 설명)
l 축복(제사장이 없는 경우는 기도로 대치함)
사람들은 주로 안식일, 월요일, 목요일에 모였고 축제일에는 예루살렘을 찾지 못하고 남아있던 사람들이 회당에 모였다.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회당은 유대교의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요소, 즉 율법을 보존하고 유지하며 전달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회당은 기독교복음이 전파되는데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된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