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44년 8월 1일, 프랑스의 박물학자 ‘진화론의 창시자’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Jean-Baptist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1744 ~ 1829) 출생 276주년
장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슈발리에 드 라마르크 (프: Jean-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1744년 8월 1일 ~ 1829년 12월 18일)는 프랑스의 생물학자이다.

–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Jean-Baptist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출생: 1744년 8월 1일, 프랑스 피카르디지방 바장탱 르 프티
.사망: 1829년 12월 18일 (85세), 프랑스 파리
.성별: 남성
.국적: 프랑스
.경력: 진화론, 획득형질의 유전, 조프루아에게 영향
.본명: Jean-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배우자: 줄리 말렛 (1798년–1819년), 샬롯 르베르디 (1793년–1797년)
.부모: Marie-Françoise de Fontaines de Chuignolles, 필립 자크 드 모넷 드 라 마크
장바티스트 라마르크는 체계적인 학설로서 최초로 진화의 개념을 제시한 사람으로서 후에 발견되는 진화론의 힌트를 제시한 사람이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반
북프랑스의 피카르디 지방의 바장탱 르 프티에서 태어났다.
모계 혈통으로 922∼923년 프랑스 임시 국왕이었던 로베르 1세의 자손이었으며, 소귀족 계급 출신이었지만 가난했다.
의학 학교에서 의학을, 국립 식물원에서 식물학을 공부하였다.
– 학자, 교육 활동
식물학과 음악에 많은 관심을 지녔던 그는 파리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의사가 되지는 않았다.
장 자크 루소를 만나 함께 식물을 채집하게 되며, 다른 과학에도 관심을 지니면서 특히 식물학에 집중하여 쥐시외와 함께 연구했다.
일부 동료 가운데 특히 고정설 (fixsme)의 지지자였던 퀴비에에 맞서야 했으며, 정치권력에도 그리 밝지 못했다.
혁명 사상을 지지했던 그의 정치적 시각은 제정기나 왕정복고 당시의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1778년 뷔퐁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식물지’ 3권을 출판하여 호평을 받았다.
라마르크는 공화제를 지지하여 왕립 식물원 개조의 중심이 되고, 1793년 스스로 그 후신인 파리 식물원에서 무척추동물 담당교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본격화한 무척추동물 연구에서 ‘동물철학’을 낳았다. 라마르크는 자주 무신론자라는 공격을 받았는데, 그는 영적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 관하여는 상호부조가 공중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한다.
1781~1782년 독일·헝가리 등지를 여행한 후, ‘식물 사전’을 출판하였다.
그 후 1815~1822년, ‘무척추 동물지’ 7권을 출판, 고대 무척추 동물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 생애 후반
그는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두었고, 그가 택했던 직업들은 대개 명예직으로 보수가 매우 낮아서 일생 동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 직원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라마르크, 50세, 두 차례 결혼, 여섯 자녀, 곤충, 유충, 미생물 전공의 동물학 교수.”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무척추동물학을 포함한 동물학에 전념했다. 파리에서 생을 마쳤다.
1744년 8월 1일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몽파르나스 (Montparnasse) 묘지에 잠정적 승인을 얻어 안치되었으나 1830년 혁명 당시 그의 묘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으며,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으나 다섯 명만이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
라마르크의 진화론도 몇 가지 점으로 보아서 프랑스 계몽 사상의 흐름에서 탄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뷔퐁의 환대를 받았으나 그의 사상은 뷔퐁보다도 급진적이었다. 그의 경우 진화론이 싹튼 토양이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이라고 말한다. 혁명 전후의 혁신적인 분위기가 진화사상 형성에 유리했던 것만은 아니다.
기린의 목으로 상징되는 용불용설과 획득형질 유전설의 제창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라마르크는 또한 무척추동물 분류학자, 고생물학의 창시자, 생물학 (biologie)의 초안자, 현대적 의미의 화석 (fossile) 용어의 고안자, 진화론 (transformisme)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생물학사에서 그가 남긴 가장 큰 족적은 무엇보다도 생리학이나 해부학 등의 단편적 연구들로 이루어졌던 이전의 생명 연구를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서 체계화하고 여기에 ‘생물학’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 라마르크주의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진화론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생태학의 발달과 더불어 프랑스 진화학자들에게 환경 요인이 커다란 관심으로 부각되면서 라마르크의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 무렵 일부 프랑스 생물학자들은 라마르크의 이론과 다윈 이론을 접목시켜 진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이들에게 있어 라마르크의 이론과 다윈의 이론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연속적 진화론이라는 측면에서 양립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다윈은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설을 부인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자연선택 이론을 바탕으로 연속적 진화를 설명했다. 이렇게 진화론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연의 연속성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바이스만, 멘델, 더프리스와 같은 신다윈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된 자연의 비연속성 개념과 충돌을 빚게 된다. 신다윈주의자들은 생명체 진화의 전제가 되는 변이를 성의 혼합에 따르는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인 변이로 설명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생명체의 변이에 대한 설명은 점진적 변이와 돌발적 변이라는 확연히 구분되는 두 이론으로 나뉘어 수용되었다. 점진적 변이를 수용한 사람들은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설을 지지하여 신라마르크주의를 형성했고, 돌발적 변이를 수용한 사람들은 획득형질의 비유전설을 역설하여 신다윈주의를 형성했으며, 이들 사이의 상반된 두 입장은 팽팽한 대립 구도에 놓이게 되었다.
라마르크의 이론이 지금까지 진화의 메커니즘에 관련된 이론에 한정되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생물학의 창시자로서 라마르크의 위상이 묻혀온 데는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었던 생물학 역사상의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다. 동시대 퀴비에와의 대립을 비롯하여, 다윈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19세기 중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진화 메커니즘 논쟁은 라마르크의 이론을 왜곡하거나 부분적으로만 수용하는 경향을 유도했고, 라마르크주의는 신라마르크주의에 영입되면서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려 과학의 영역으로부터 밀려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인 이외에도 라마르크의 위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로 라마르크 자신의 글에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라마르크가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물리화학 이론 자체의 문제라든가 피쇼가 지적하는 구성상의 치명적인 결함에 보태어, 난해한 문체가 지리하게 반복되어 읽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든지, 형이상학적 용어의 해석이 애매하고, 결국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 용불용설 (用不用說, Theory of Use and Disuse)
용불용설 (用不用說, Lamarckism, Lamarckian inheritance, theory of use and disuse)은 장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제안한 진화생물학 이론이다. 생물이 살아있는 동안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획득한 형질 (획득 형질)이 다음 세대에 유전되어 진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음이 밝혀져 현대 진화 이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식물의 메틸화된 유전자가 그대로 유전되는 것이 후성유전학을 통해 확인되면서 재조명받고있다.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전하고 안 쓰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진화론의 일종이다. 찰스 로버트 다윈의 자연 선택과 대비되는 면이 있다.
대다수가 용불용설로 읽어서 하나의 객체 용어쯤으로 인식하지만, 用 (쓰다, 용)과 不 (아니다, 부)로 이루어진 한자어이다. 호불호와 마찬가지. 즉 용불용 가설, 굳이 풀어쓴다면 사용-미사용 가설이라고 하겠다.
.역사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슈발리에 모네 드 라마르크’ (Jean-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가 1809년에 발표한 ‘동물철학’에서 주장했다. 이 책자에서 기린은 높은 곳에 있는 먹이를 먹기 위해 목을 계속 늘어뜨렸고 그 결과 지금처럼 길어졌다는 의견을 넣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철저하게 묻혔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엉망이 된 프랑스에서 라마르크는 늘그막에는 동물원 수위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야 했다. 라마르크는 거의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눈까지 어두워졌다. 그의 연구는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동료 학자들로부터도 비웃음당했다. 심지어 장례식 조사마저도 그의 연구를 일축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1829년 85살로 숨을 거둘 때 남겨진 다섯 남매에게 언젠가 자신이 이룩한 연구가 재평가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딸인 코르넬리가 다음과 같이 위로하는 말이 묘비에 적혀있었다고 한다.
“뒤에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아버지를 칭찬해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유한을 풀어줄 것입니다.’
그의 무덤은 1830년 7월 혁명 와중에 박살나고 현재는 가묘로 남아있다.
잊혔던 이 학설은 다윈주의 진화론이 나오면서 부랴부랴 재평가된다. 당시 프랑스 과학협회는 진화론 이전에 프랑스에서도 이런 학설을 주장한 선구자가 있다고 하여 유족을 찾았는데 다섯 남매에서 막내 딸만 살아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훈장을 수여받고 그 자리에서 아버님의 뜻이 30년만에 빛을 보았다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코르넬리가 아버지를 위로하며 묘비에 남겼던 예언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용불용설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판명되었지만, 여전히 라마르크는 체계적인 학설로서 최초로 진화론을 제시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에라스무스 다윈은 1794년에서 1796년에 걸쳐 집필한 ‘동물학’에서 “모든 온혈 동물은 자신의 일부를 변형하는 힘을 갖고 있고, 이렇게 개량된 형질은 자손에게 이어진다”라고 기록하였다. 라마르크는 1809년 저서 ‘철학적 동물학’에서 에라스무스 다윈의 학설을 이어받아 “동물들은 일생동안 자신의 필요에 의해 특정 형질을 발달시키며 이를 자손에게 물려준다”고 기록하였다.
라마르크는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등과 함께 프랑스 변형론 학파 (프: Transformationism)를 창립하였다. 영국 에든버러의 급진적 비교동물학자인 해부학자 로버트 에드먼드 그런트 등은 라마르크의 학설을 받아들였다. 그런트는 후일 찰스 다윈에게 라마르크의 학설을 연구해 볼 것을 권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자연선택을 진화의 주요 원인으로 발표하였으나 진화가 일어나는 유전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이상을 제시할 수 없었다.
20세기에 들어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된 후 급속히 발전한 유전학에 의해 유전자의 역할이 밝혀지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오류로 판명났다. 현대 진화 이론은 생물 집단 내에 존재하는 개체차를 대립형질의 발현으로 파악하며, 자연선택에 의해 대립형질 발현빈도가 변화하는 것을 진화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 심리학에서의 차용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라마르크 주의의 획득형질론을 연구, 인용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는데 활용했다.
.문제점
하지만 이건 이후 등장한 다윈주의 진화론과는 엄연히 다른 분야의 것이었으며 어떻게 보면 다윈주의 진화론은 용불용설을 깨부수는 이론이었다. 현대 생물학에선 부모대에서 후천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봐야 그것이 유전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윈은 용불용설에 대해 어느 정도 옹호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독일 학자 바이스만이 생쥐 꼬리를 계속 자르고 그 생쥐들의 후손 꼬리의 길이를 확인하는 실험을 통해 획득 형질이 유전됨을 부정했다.
획득 형질의 유전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견해를 신다윈주의라 하며 진화를 획득 형질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질을 획득할 수밖에 없는 환경압으로 인해 해당 형질을 만드는데 유리한 유전자가 장기적으로는 유전자 풀에서 많아지는 것, 즉 자연선택에 의한 메커니즘으로 이해한다.
밀렵꾼들이 상아를 노리고 코끼리를 학살하자 전반적으로 코끼리들의 상아가 짧아지고 있다. 크고 멋진 상아는 인간에 의해 생존에 불리한 형질이 되어버렸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환경압으로 작용하다 보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압력이 정말 오랜 기간 지속된다면 먼 훗날의 인류가 보게 될 코끼리들은 아에 상아가 없어지거나 작아진 종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용불용설의 제대로 된 예가 아니다. 위 코끼리 예는 쥐꼬리를 자르는 게 아니라 긴 꼬리를 가진 쥐들을 죽여버리는 것과 같으므로 단순히 환경압에 의한 전형적인 자연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일 뿐, 꼬리 실험과 전혀 다른 상황이다.
.재발견
다세포 생물이 아닌 미생물이나 박테리아에서는 환경압에 의해 당대에서 특정 유전자의 복제 수가 달라진다거나 하는 현상은 보고되고 있다. 즉 100% 틀린 이론은 아니다. 아울러 후성유전학이 각광을 받으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재조명을 받고있다고 한다. 후성유전 중에는 당대에 획득한 형질이 후대에 영향을 주는 현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성유전학 역시 용불용설이 아닌 다윈의 진화론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 획득 형질 (acquired character)
후천적 형질과 같은 개념이다. 선대로부터 유전된 형질이 아니고, 후천적 환경과 생활 상태에 따라 형성된 요인 (연습과 질병, 교양 등의 환경요인이 포함)들을 들 수 있다. 개체 일대에서 얻어진 형질로서 다음 세대로는 전달되지 않는 비유전적 형질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계속된 운동의 결실로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후천적 운동으로 다져질 수 있는 부족함 없는 근육조직이 유전된 것이지, 운동으로 주어진 근육질이란 효과가 유전된 것은 아니란 얘기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로 대표되는 획득형질의 문제는 이 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파와 부정하는 학파 간에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저서활동
1778년’프랑스식물지’ (植物誌)를 출판해 유명해졌다.
대혁명 후에 식물원을 모체로 하여 개편된 자연지 (自然誌) 박물관에서 ‘곤충 및 연충학(-蟲學)’ 교수가 되어 동물학, 특히 무척추동물을 연구, ‘무척추동물’, ‘생물학’ 등의 용어를 만들고, ‘무척추동물의 체계’ (1801), ‘동물철학’ (2권, 1809) , ‘무척추동물일지’ (7권, 1815~1822) 등의 주요 저작을 출판했다. 퀴비에가 박물관장에 취임한 이후 라마르크와 퀴비에는 항상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퀴비에가 학계의 주류를 따른데 대해 라마르크는 많은 비판을 받고 만년에는 실명 (失明)에 시달리면서 두 딸의 조력으로 저술을 계속했다.
동물학에서는 무척추동물을 처음에는 5강 (網), 후에 10강으로 분류해 현재의 분류체계에 접근시켰다. 진화에 관해서는 생물이 자연발생을 하고 생물체제가 발달의 경향을 가진다고 했다. 진화의 부차적 (副次的) 요인으로서 개체가 일생 동안 외계의 영향과 기관 (器官)을 사용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얻은 형질 (形質)이 다음 세대에 유전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라마르키즘이란 이 획득형질의 유전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점진적 발달의 사상도 라마르크 학설의 중심이 되어 있다.
1778년 ‘프랑스식물지’
1801년 ‘무척추동물의 체계’
1809년 ‘동물 철학’, [이정희 역, 지만지]
1815년 ‘무척추동물지’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