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콜롬바(St, Columba)의 생애와 영성(8)
콜롬바에 대한 현대 학자들의 평가
콜롬바는 ‘고독을 사랑한 시인’이며, ‘친절한 현인’이라고 묘사했다(Edward C. Sellner). 또한 이안 휜레이(Ian Finlay)에 의하면, 콜롬바의 전기(hagiography)는 아이오나 제9대 수도원장인, 아담난(Adomnan)이 기록한 ‘성 콜롬바의 생애’ (Life of St. Columba)에서 잘 전해지고 있다. 콜롬바의 상징은 오래된 켈틱 십자가와도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교회묘지나, 수도원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수천 개의 켈틱 십자가를 보면, 특히 원 부분이 일부 훼손되거나, 아주 없어진 부분도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석공들에 의하여 수리된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기록도 켈트 십자가와 마찬 가지로, 기록의 원형이 일부 없어지거나, 전체가 유실되거나, 역사가들에 의해 그 내용이 보완 되어 왔을 것이다.
1979년, 왕립 스코틀랜드 학술원 회원이며, 박물관장을 역임한, 이안 휜레이(Ian Finlay)가 콜롬바에 대한 전기를 성서적이고 학문적인 체계를 세워서 저술함으로써,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휜레이는 그의 콜롬바에 대한 연구의 시발점을 아이오나에 두 지않고 성물함, 유물함에 중점을 두어 연구했다. 휜레이가 중점을 두고 연구한 것은, 콜롬바가 친필로 쓴 ‘시편’과 그의 유골이 보관 된 금속상자를 ‘Monymusk-reliquary 혹은 ‘Brecbennach’라고 부르는데, 이 유물보관함은 스코틀랜드에서 발견된 것으로써, 나무로 만들고 은과 은도금으로 장식한 것이다. 성물함은 서로 얽힌 동물 그림이나 추상적인 무늬 및 하프를 타는 인물 모습, 성서의 장면 등으로 장식되었다. 750년경, 아이오나의 수도사에 의해 제작되고 현재 에딘버그 왕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으며, 이 값진 유물을 근거로, 콜롬바의 전기를 기록했으므로, 휜레이의 저서는 학문적으로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콜롬바의 생애에서 중요한 기점이었던 Ulster와 Meath전쟁에서의 역활, 스코틀랜드 복음화를 위한 선교의 열정, 아일랜드의 수도원을 스코틀랜드에 세우는 일, 켈틱영성 위에 교회를 세워가는 기록이다. 그는 콜롬바를 위대한 선교사로 평가 하였다.
Kenneth Scott Latourette의 저서, “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the Christianity”에 의하면, 언제 기독교 신앙이 아일랜드와 영국제도에 도착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어떤 이들은 베드로나 바올이 영국여행을 통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고, 또한 아리마대 요셉이 잉글랜드의 글래스톤버리(Glastonbury)에 왔었다고 한다. 터틀리안과 오리겐은 3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아롤회의(Council of Arles, 314)에 세명의 브리튼 주교들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요크, 링컨, 런던의 주교였다고 한다. Kenneth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의 보호 아래에서 브리튼은 대박해를 받았던 갈리아 지방과는 달리 박해를 받지 않았고 그 증거로 최근에 Carewen지방에서는 당시 교회당이던 건물들이 파손된 흔적없이 발굴되었다. 매우 초기의 것들이 역사적으로 허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후기의 이야기들은 우리들을 초기 켈트교회의 지역적이고 영적인 지평으로 인도한다.
필립뉴엘(Phip Newell)은 그의 저서 “A Celtic Spirituality”에서 4세기 초 가장 두드러진 그리스도인 펠라기우스에 대한 연구내용을 발표한다. 펠라기우스의 초기 저작들의 주제들은 켈트전통의 주요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창조의 선함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많은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지혜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이러한 전통의 완성이며 지혜와 겸허함의 완전한 모범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여 켈트전통의 강조점은 교회의 교리와 종교적 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친구나 적을 사랑하며, 친구나 적이나 모두 사랑하며 악에게도 선으로 갚으라는 것이다. 그는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아프리카 주교들은 국가의 칙령으로 펠라기우스를 정죄 하였고, 죄목은 평화를 위협한다고 해서 로마에서 추방당한다. 이 시기에 영국으로 야만인들과 로마인들의 약탈이 진행되면서 켈트교회가 시작된다. 200여년이 지난 664년 여성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휘트비총회가 여수도원장 힐다(Hilda)의 주도하에 개최 되었다. 여기에서 겔트와 로마의 두 선교형태가 등장 하였다. 켈트선교는 린디스판의 에이든 지역을 통해 들어왔고 그 이전에는 아이오나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켈트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갈등은 7세기 중엽, 앵글로 색슨의 영국에서 첨예화 되었고, 이때 로마 카톨릭 사제로 전환 하지 않은 켈트 사제는 추방당했다. 유럽 대륙에서 켈트 전통은 사라져 갔으나, 스코틀랜드 주변 섬에 이 전통의 잔재가 남아 있었고, 예배의식이 유지 되었다.
티모스 제이 죠이스(Timothy J Joyce)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원운동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그의 저서 “Celtic Christianity”에서 콜롬바는 아이오나섬에 수도원을 세우고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서로의 역활은 달라도 모두가 경건한 삶을 살았다. 수도사들은 평신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함께 가는 영적인동반자로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령을 받아들이고, 영웅들을 사랑하는 민족으로, 그리스도와 성자들을 새로운 영웅으로 받아 들였다.
에드워드 셀너에 의하면, 6세기의 시(poem)는 콜롬바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친절한 현인”으로 묘사하였고, “사제가 된 것은 그의 소명중의 하나일 뿐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와 관련된 수도원 중에 아이오나는 복원된 중세의 대 수도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에큐메니칼 공동체의 발상지이다.
콜롬바는 아일랜드의 가장 위대한 시인들, 저술가들 그리고 작가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분명히 초기 켈트 사회에서 가장 재능이있는 지도자 중의 하나로 동정심 있고 친절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콜롬바를 포함한 켈트 성인들은 지혜로운 지도자들이었다. 그 지혜는 그들의 영성에서 비롯된다(필립 뉴엘).
콜롬바, 그 이름의 뜻은 비둘기였지만, 그에게는 강건함, 단호함 그리고 적극성을 가진 전사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사였지만 춤을 출 수 있는 전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또한 시인이자 저술가이며 이야기꾼이었기 때문이다(Timothy J Joyce). 콜롬바는 그의 스승인 피니안이 로마에서 가져온 시편서(psalter)를 몰래 복사하다가 발각되자,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 베낀 다음에 그 필사본을 돌려주었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서 부족간에 전쟁이 발생하여 3000명의 사상자가 생겨서 이에 책임을 지고 조국 아일랜드를 떠나게 된다. 전사로서의 우직함, 강건함을 나타낸 좋은 예이다(티모스 제이 조이스).
노정언 장로
한남·촬스슈터트대학 신학석사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