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95년 11월 2일, 프랑스 혁명 : 프랑스 총재정부 발족
총재정부 (總裁政府, Directory)는 1795년 11월 2일부터 1799년 11월 9일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정부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의회에서 반대파를 몰아낸 후 통령정부 (후에 제1제국이 됨)를 구성함으로써 총재정부는 소멸되었다. 프랑스 혁명기 정치체제는 ‘국민공회’ (1792 ~ 1795), ‘총재정부’ (1795 ~ 1799), ‘통령정부’ (1799 ~ 1804) 과정을 거친다.
– 로베스 피에르의 실각과 테르미도르파의 장악
1793년 프랑스에서는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한 자코뱅파의 로베스 피에르 등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로베스 피에르는 유력자를 차례차례로 숙청하거나, 해외로 유배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1794년 7월 27일 (프랑스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력의 월 이름), 반로베스 피에르파가 단결하여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를 일으켜 로베스 피에르 무리를 처형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때 앞장섰던 이들이 폴 바라스, 탈리앵, 푸셰 등이다. 나폴레옹도 바라스의 부하로서 활약했다.
– 테르미도르파의 ‘공화력 3년 헌법’ (프랑스 헌법) 제정
테르미도르파는 1795년 혁명의 색깔이 너무 강한 1793년 프랑스 헌법을 수정하여 ‘공화력 3년 헌법’ (또는 1795년 프랑스 헌법)을 제정했다. 2개월 면담 후인 1795년 8월 22일에 보통선거제의 채택 여부를 묻는 투표를 하여 찬성 투표수 105만, 반대표는 불과 5천 표로 통과시켰다.
헌법을 개정을 통해 실시되는 최초의 선거에서는 테르미도르파보다 왕당파가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테르미도르파는 “은퇴 의원의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 의원에 출마하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고 주장하고 국민 공회에서 2/3 이상의 의원을 유임시키는 법안을 제출하고, 헌법과 함께 통과시켰다.
이 표결을 통해 9월 23일 새 헌법이 공식 출범했다. 이에 대해 각파, 특히 왕당파는 선거 방해가 있었다고 하여 파리에서 집회를 열었다. 1795년 10월 5일 이것이 방데미에르의 반란이라는 폭동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정부는 폴 바라스를 시켜 사태 해결을 지시했다. 진압 명령은 받은 젊은 나폴레옹이 부관으로 2, 3천 명의 정부군과 잘 훈련된 포병대를 지휘하여 군사력이 뒤떨어지는 반란군을 다음 날에 진압했다.
– 총재 5인 선출과 총재정부의 발족 및 종결
새 헌법 하에 첫 선거가 1795년 10월 20일 실시되어, 10월 26일 국민 공회는 해산되고, 10월 31일에 총재가 선출되었다. 최초의 총재로 선출된 5인은 장 프랑수아 루벨, 폴 바라스, 라 루베리에르-라포, 라자르 카르노, 르 투르누였다.
바라스는 귀족 출신이지만 나머지 4명은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루벨, 바라스, 라 루베리에르의 사상은 자코뱅파에 가까운 급격한 개혁을 좋아했다. 한편, 카르노와 르 투르누는 급격한 개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총재정부의 성립으로 프랑스 혁명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망명중인 루이 18세와 구체제의 부활을 바라는 국민은 적었고, 반대로 공포 정치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재 정부의 중도 노선은 지지를 받았다. 국민은 혁명의 상처를 치유하는 국면을 바라고 있었다.
총재정부는 1795년 11월부터 1799년 11월까지 3년 동안 존속했으며, 입법원 (Corps Législatif)이라 불리던 양원제 의회기구를 갖추고 있었다. 하원인 오백인회 (Conseil de Cinq-Cents)는 30세 이상의 500명 의원으로 구성되어 입법을 건의하는 기구였다. 원로회의(Conseil des Anciens)은 40세 이상 의원 250명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제출된 입법안을 통과,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원로회의는 또한 오백인회가 제출한 인명부를 보고 5인의 총재 (Directeur)를 선출했다. 총재는 나이가 적어도 40세가 되어야 했으며 의원이나 장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야 했다. 해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의 새 총재가 선출되었다. 총재들은 정부 장관, 대사, 장군, 수세관, 그밖의 여러 관리들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전 공안위원회가 누렸던 중앙집권적인 여러 권력들을 명목상 이어받기는 했으나 계획에 필요한 자금이나 자신들의 의지를 실시할 사법기관을 갖지 못했다.
총재정부의 목표는 첫째, 정치·경제적 세력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증대시키는 것이었으며, 둘째,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방해하고, 국가의 부를 재분배하는 방법 등을 통해 권력을 쥔 자들을 위협할 수 있는 또다른 체제 건설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1793년~1794년 공포정치 기간 동안 존재했던 청교도적 독재에 대한 반동으로서 생겨났던, 나약하고 기반이 부실했던 총재정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더욱 규율 잡힌 독재에 굴복했다. 또한 총재정부 시대는 또한 사치스런 의상과 무절제한 오락, 느슨한 도덕관념 등으로 유명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당초부터 재원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국채인 아시냐의 폭락은 멈추지 않았고, 세제개혁도 이루어졌지만 재정은 회복되지 않았다. 1795년 12월에는 라메르가 재무장관이 되어, 1796년 3월 18일에 아시냐를 폐지하고 토지전환어음으로 발행하였다. 의회의 왕당파는 기피성직자의 허용, 에미그레 (망명자)의 친척에 관한 법률의 폐지, 에미그레와 그 친척에 대한 관용을 요구했지만, 총재정부는 이것을 거부했다.
1796년 5월 25일 토지공유화 등을 주장하는 바뵈프가 정부 전복 음모를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5월 처형되었다.
1793년 프랑스 서부에서 계속된 방데 반란이 라자르 오슈에 의해 진압되었고, 1796년 5월 26일 프랑수아 드 샤렛트의 처형에 의해 사실상 종결되었다.
– 나폴레옹의 집권과 총재정부 소멸
이런 와중에 소장파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군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 총재정부는 1799년 11월 9일까지 존속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의회에서 반대파를 몰아낸 후 통령정부 (후에 제1제국이 됨)를 구성함으로써 총재정부는 소멸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